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신데렐라도 남자가 하면 다르다?

미러링 시대의 로맨스 tvN <남자친구>,

다 바꿨지만 딱 하나 못 바꾼 것
등록 2018-12-29 14:12 수정 2020-05-03 04:29
남녀의 지위는 역전됐지만 관계는 그대로다. 의 한장면. tvN 제공

남녀의 지위는 역전됐지만 관계는 그대로다. 의 한장면. tvN 제공

외롭고 상처 입은 사업가가 출장지에서 청포도처럼 곱고 맑은 젊은이를 우연히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꿈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삭막한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만난 상대는 알고 보니 자신의 호텔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인데…. 다음 중 신입사원에게 벌어질 일은 무엇일까?

① 대표가 명품관에 데려가 옷을 잔뜩 사 안긴다.

② 대표의 어머니가 헤어지라며 물을 끼얹는다.

③ 대표의 정혼자가 회사로 찾아와 깔보며 모욕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가난한 송혜교의 신분 상승 </font></font>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드라마 속 수많은 재벌 2세, 3세, 본부장, 대표 등등이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로 요약되는 장르적 클리셰(상투성)에 따라 충실히 움직여왔지만, tvN 의 대표님은 다르다. 갑자기 벌컥 화를 내지도, 아무에게나 반말하지도, 사람을 벽에 밀어붙이지도, 남아도는 돈 자랑을 하지도 않는다.

2000년 KBS 에서 “사랑? 이젠 돈으로 사겠어.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는 호텔 후계자에게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라며 눈물짓던 송혜교는 2018년 에서도 처음 만난 남자에게 “저기요, 돈 좀 있어요?”라고 묻지만, 이번엔 그가 호텔 대표다. 그리고 며칠 뒤 그의 부하 직원이 될 남자는 공손히 대답한다. “얼마가 있으면 될까요?”

노골적인 패러디와 암시에서 알 수 있듯 는 미러링(의도적 모방 행위) 시대의 로맨스다. 2015년을 기점으로 시작된 페미니즘 리부트(재시동)는 여성 소비자가 기존 대중문화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하는 흐름에 영향을 미쳤고, KBS 을 비롯해 몇몇 작품은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시도로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에서 무심결에 차수현(송혜교)의 손목을 잡았다가 곧바로 “죄송해요. 제가 무례했어요”라고 사과하는 김진혁(박보검)은 (SBS) 한기주(박신양)로 대표되는 ‘버럭남’의 반대 극으로 등장한 ‘조신남’ 계열의 남주인공이다. 그동안 돈과 지위를 갖추었으며 상냥하고 매너 있는 남자는 대개 여주인공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서브 남주’에 머물렀던 반면, 돈도 지위도 없지만 누구에게나 예의 바르고 다정한 남자가 돈과 지위를 가진 여성의 선택을 받는 날이 온 것이다.

물론 조금 더 들여다보면 차이가 있다. 비슷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캔디형’ 여주인공들이 대체로 ‘평범한’ 외모로 소개되던 것과 달리 회사에서 ‘비주얼’로 불리는 진혁의 외모는 가치 있게 평가되고, 회식 자리에서 그가 팀원들에게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감정노동 이전에 일종의 팬서비스처럼 작용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바뀐 듯 바뀌지 않는 남주 판타지 </font></font>

술에 취해 볼에 홍조를 띤 채 수현에게 아이처럼 조잘대는 진혁은 과도하게 엉뚱·순수·발랄하던 신데렐라 스토리의 여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순간도 있지만, 그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배신당해 곤경에 빠지던 그들처럼 가난하거나 절박하지 않다. 진혁의 부모는 소박하고 근면한 사람들이며 아들을 절대적으로 믿고 사랑한다. 무균실에서 자란 것처럼 반듯하고 성숙한 진혁에게는 모든 결핍과 불안이 제거돼 있기에, 그는 고용주와 사랑에 빠지더라도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직진할 수 있다.

반면 수현은 유력 정치인의 딸이자 유능한 사업가임에도 자신의 삶에 훨씬 무력하다. 여성 편력도 이혼 경력도 약점이 되지 않던 남주인공들과 달리, 이혼 뒤에도 전 시어머니인 김 회장(차화연)에게 지위를 위협받는다는 설정은 그를 취약한 존재로 끌어내린다. 진혁과 만남 초반을 주도하던 수현이 열애설 보도 이후 수동적 태도를 보이자 진혁이 더욱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관계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과정은 권력 차를 뒤집더라도 로맨스에서 성역할이 그대로라면 그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직원들 앞에서 자신보다 직위가 낮은 최 이사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은 수현이 스스로 상황을 정리하는 대신 진혁에 의해 ‘구출’되는 장면은 많은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의 동의 없이 ‘이 여자가 내 여자’라고 공표하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2014년 JTBC 는 돈과 지위를 가진 여성이 젊음과 재능을 가진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형성되는 관계를 통해 흥미로운 멜로드라마가 되었다. 계급, 빈부, 학력, 나이 등 서로의 차이가 더 강렬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자신이 가진 것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늘 진혁씨가 달려와요. 속초로, 우리 집으로. 남자친구 같다고 해두죠.” 수현의 말대로 매번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은 진혁이다. 그는 상사이자 연인인 수현에게 종종 “귀엽다” 말하고, 어린아이 취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섯 살 연상의 수현은 언제나 진혁에게 깍듯하게 존대하며, 어떤 의미에서든 상대를 압도하지 않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재력과 능력으로는 안 되는 관계의 클리셰 </font></font>

두 사람의 데이트는 거의 진혁의 세계를 수현이 알아가는 것이다. 진혁이 자란 동네를 둘러보고 진혁이 아는 찻집에 가며 진혁이 자신의 겉옷을 수현에게 덮어주는 평화로운 시간 속에 두 사람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수현은 성공한 사업가고 진혁보다 훨씬 사회 경험이 많지만, 진혁에게 비싼 넥타이를 선물하면서도 사은품으로 받은 거라는 거짓말을 할 만큼 자신이 가진 지식과 부와 권력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수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거나 정치력을 발휘하는 대신 자꾸만 위기에 휩쓸리고,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온 전남편이나 진혁의 보호를 받는 상황이 반복된다. 신선하게 출발한 성별 반전 로맨스가 점점 맥 빠지는 이유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font color="#C21A1A">http://bit.ly/1HZ0DmD</font>
카톡 선물하기▶ <font color="#C21A1A">http://bit.ly/1UELpok</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