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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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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르가즘’ 오디오북이 온다

2018년 급속하게 성장한 시장,

2019년은 본격적인 실험의 해
등록 2018-12-29 13:56 수정 2020-05-03 04:29
네이버 오디오클립 제공

네이버 오디오클립 제공

유 생원만 통나무 목침을 베고 을 보고 있는 것이 유달리 눈에 띈다. “유 생원, 이야기책은 왜 속으로만 보슈?” 점쇠가 묻는 말에 그는 목쉰 소리로 겨우 알아들을 만하게, “목이 잔뜩 쟁겨서 그러네” 하고 미안하단 의미로 소리 없이 웃는다. 다른 때 같으면 유 생원을 화롯가 일등석으로 모셔놓고 육자배기조와 단가조를 번갈아가며 멋들어지게 읽는 이야기 소리에 방 안은 짝 소리 없을 것이건만, 이날 밤은 혼자 보는 이야기책이라 유 생원이 소용없게 되었다.

이근영의 ‘고향 사람들’ 첫 대목 머슴 사랑방 풍경을 읊는 장면에 나오는 문장이다. 말이 있은 뒤에 글이 있었고, 소설 역시 말로서 전달하던 것이 먼저였다. 일제 말기의 풍광을 묘사하는 이 1942년 소설에도 ‘책’이란 들려주는 것이었다. 이 단편소설은 에서 배우 정은표가 읽은 소설이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매주 한 편씩 이 책의 단편소설을 동영상 형태로 공개하고 있다. 책은 제목 그대로 최민식, 강부자, 윤석화, 박정자 등의 배우가 한국 소설 100편을 읽는 프로젝트다. 뭉뚱그려 책이라고 했지만 이것을 ‘책’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2017년 종이책은 없이 유에스비(USB)로 발매됐다. 그 뒤 몇 번의 소셜펀딩에 이어 현재 일반인들에게 판매 중이다. 언어의 원천, 이야기의 원류를 찾아가는 ‘책 읽는 소리’ 산업이 정보기술(IT)과 손잡아 급속도로 현재화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이병헌, 정해인, 변요한… 올해의 배우 혹은…</font></font>
정해인(맨 위), 이병헌·변요한은 책 읽는 남자들이 되어 오디오북을 만들었다. 밀리의 서재 제공

정해인(맨 위), 이병헌·변요한은 책 읽는 남자들이 되어 오디오북을 만들었다. 밀리의 서재 제공

이병헌, 정해인, 변요한… 2018년을 빛낸 배우들의 이름이 아니다. 책 읽는 남자들이다.

2017년 3월 론칭한 독서 앱 ‘밀리의 서재’는 2018년 7월26일 오디오북(리딩북)을 선보였다. 이병헌은 유발 하라리의 를 읽었다. 11월 초 공개한 이 책은 일주일 만에 1만5천 명이 들었다. 변요한은 유시민이 쓴 를 읽었고, 배우 구혜선은 동물학자 프란스 드 발의 을 읽었다. 모두 꽤 묵직한 책들이다. 개그맨 김수용은 자기계발서 두 권을 읽었다.

앞의 책은 모두 요약본이다. 정해인은 네이버 ‘오디오클립’(네이버에서 만든 오디오 전용 플랫폼)에서 의 단편 7편을 ‘완독’했다. 권당으로 팔리는 이 책은 현재(2018년 12월26일 현재·이하 동일)까지 10만 권 넘게 재생됐다. 아이돌 그룹 갓세븐(GOT7) 진영이 읽은 는 팬들 사이에 ‘굿즈’처럼 소비된다. 9만4천 권 가까이 재생됐다. 아이돌 그룹 EXID 하니가 읽은 은 8만4천 권 재생됐다. 네이버는 자사 동영상 플랫폼 ‘브이라이브’(VLIVE)에서 이들이 책 읽는 영상 요약본도 판다.

연예인만 시선을 끈 게 아니다. 소설가 김영하도 자신의 소설 을 읽었고, 현재 10만 건에 이르는 재생을 기록했다. 그의 초기 단편집 오디오북 역시 3천 건 넘게 재생됐다. 연예인 ‘리더’(reader)가 시장을 리드하고 있지만, 책을 들을 기회는 부쩍 늘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오디오북’ 섹션은 2018년 7월 말 베타 서비스를 선보였다. 문을 연 첫날 630여 권, 한 달 만에 5천여 권이 팔리며 ‘있는 줄 몰랐던’ 시장으로 보였던 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30권으로 시작해 현재 유·무료 오디오북 1252권을 제공한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전년 대비 337% 늘어난 회원 수</font></font>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온 김금희 작가의 짧은 소설 모음집 는 11월2일 출간과 동시에 네이버에서 오디오북을 순차적으로 공개했다. 1천 명까지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했는데, 5시간 만에 마감되었다. 원래는 석 달에 걸쳐 ‘천천히’ 나눠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다.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는 “관계자들이 무섭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마음산책은 출판사 시리즈인 짧은 소설을 읽을 리더를 공개 모집했는데 4151명이 지원해 성황을 이루었다. “뽑힌 이들이 책을 읽는데, 별로 틀리지도 않더라.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정 대표의 말이다. 이런 이들은 유튜브나 팟빵 등에서 책 읽는 채널을 다수 만들어놓고 있다.

산업통상부 자료에 따르면 오디오북 제작업체 ‘오디언’의 2018년 2분기 오디오북 유료 이용 회원 수는 35만1500명으로 전년보다 337% 늘었다. 워낙 없던 시장이기 때문에 성장세가 눈에 띄는 것이리라. 미국이나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는 오디오북의 ‘성장’이 옛말이 됐다.

오디오북이 이북(전자책) 판매를 압도하기도 한다. 공상과학소설(SF) 작가 존 스칼지는 최신작 (Lock In)의 주인공 성별을 모호하게 했는데, 오디오북은 남성과 여성 두 명의 내레이터가 읽었다. 2014년 출간 뒤 종이책은 2만2500부, 이북 2만4천 부, 오디오북은 4만1천 부 팔렸다. 인터넷서점 ‘아마존’에는 없고 ‘오더블’(아마존 오디오북 브랜드)에만 있는 책도 늘어났다. 베스트셀러 저자 멜 로빈스의 책은 오디오북 판매량이 종이책의 4배에 이르자, 2018년 5월에는 는 오디오북만 만들었다.

‘독서 강국’ 일본도 최근 오디오북이 부쩍 성장했다. 오디오북닷제이피(audiobook.jp, 이전 FeBe)는 회원 수가 2014년 4월10일 10만 명, 2017년 3월 20만 명, 2018년 1월 30만 명을 돌파했다. 일본에서 발간된 오디오북은 2만3천 종에 이른다. 자연히 많은 사람이 책을 낼 때는 오디오북도 함께 신경 쓴다. 2018년 11월 미셸 오바마는 자서전 을 내면서 자신이 내레이터로 나섰다.

2018년 오디오북 시장을 끌고 나간 것은 인공지능(AI) 기반의 스마트 스피커 시장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네이버가 적극적으로 오디오북 시장에 뛰어든 것도 자사의 스마트 스피커 ‘클로바’가 탑재된 음성 기반 하드웨어에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동통신사와 대기업 등이 인공지능 스마트 스피커 시장에 들어서면서 콘텐츠 확보 전쟁은 더욱더 치열해질 것이다.

정부 지원도 오디오북 시장의 청신호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고비용인 오디오북 제작을 지원해달라는 출판계의 요구에 부응해, 2019년 20종 내외의 책에 최대 500만원을 지원하고, 제작지원센터를 상반기 중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오디오북은 첨단 기술일까, 청각 문화일까, 책일까</font></font>
스마트러닝 앱 ‘윌라’는 월정액에 가입하면 오디오북 두 권을 내려받을 수 있다. 윌라 제공

스마트러닝 앱 ‘윌라’는 월정액에 가입하면 오디오북 두 권을 내려받을 수 있다. 윌라 제공

오디오북 시장은 이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소현 오디언 대표는 “우리나라에 맞는 오디오북의 형태가 자리잡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한다. 오디오북이 어떻게 될지는 지금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렸다. 스마트 스피커 시장에서 오디오북은 첨단 기술 중 하나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어학 콘텐츠와 팟캐스트와 함께 있다. ‘듣는’ 문화 속에 오디오북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스마트러닝 앱 ‘윌라’는 자기계발서 카테고리에서 오디오북을 실험하고 있다. ‘밀리의 서재’에서는 독서 문화 중 하나로 간주한다. 서영택 대표는 “독서에 관한 서재를 운영한다든지, 독서에 서툰 사람들을 위한 큐레이션 서비스를 한다든지, 독서에 관한 팟캐스트를 하는 등 독서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이것저것을 해보고 있다. 오디오북도 그중 하나다”라고 말한다.

완독이 나을지 요약본이 나을지 등 형태적 실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북칼럼니스트 박사는 “좀더 잘 ‘읽히는’ 형태가 연구돼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상상력의 세계다. 가끔 오디오북이 과하게 상상력을 채운다. 책의 고유한 특성을 어떻게 잘 살려줄 것인가라는 고민이 필요하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font color="#A6CA37">월정액은 도서시장을 흔들까</font>


‘대여’하면 25분의 1 가격


현재 앱을 기반으로 한 이북(전자책) 콘텐츠는 월정액을 기본으로 한다. ‘밀리의 서재’는 2017년 서비스를 시작할 때부터 월정액을 내세웠다. 3만 권을 월정액으로 이용할 수 있다. 전자책 앱 ‘리디북스’는 2018년 7월3일 월정액 서비스 ‘리디 셀렉트’를 선보였다. 월정액 서비스에 가입하면 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 중심으로 구성된 2500여 권을 읽을 수 있다. ‘밀리의 서재’가 모든 콘텐츠를 월정액으로 이용하는 넷플릭스 식이라면, 리디북스는 부분 월정액제인 아이피티브이(IPTV) 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월정액 가격은 9900원, 리디 셀렉트는 6500원이다. 교보문고 독서 앱 ‘샘’ 등도 카테고리별로 제한된 월정액 서비스를 갖추고 있다. 스마트러닝 앱 ‘윌라’는 클래스(강의)와 오디오북 중 월정액을 선택할 수 있는데, 오디오북 월정액의 경우 두 권을 내려받을 수 있다. 아마존 오디오북 서점 ‘오더블’과 비슷하다.
이런 월정액 서비스에 대해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의 월정액 문제가 반복되는 건 아니냐는 우려도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다.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의 월정액 서비스는 저작권자에게 불리한 분배율로 문제가 되었다.
현재 월정액 서비스는 ‘대여’(빌려줌)라는 개념으로 값을 정한다. 오디오북의 값은 이북처럼 출판사가 다시 정한다. 별도로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부여받고 가격도 등록하는데, 이것이 정가가 된다. 저자와 계약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이북은 종이책 정가의 60~80%, 오디오북은 80~90% 수준에서 정가가 정해진다. 2차 저작물 발생 이익은 통상 50% 수준인데, 이북·오디오북에서 저자의 수익은 25% 정도 된다. 월정액 서비스에서는 25번(카피) 내려받으면 한 권 가격(‘밀리의 서재’의 경우)으로 셈한다. 대여한 책은 한 달간 읽을 수 있다.
대체로 출판사 관계자는 이북·오디오북 서비스를 응원하고 있다. 종이책 시장을 크게 잠식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부가 수익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출판사 사장은 “장기적으로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고 걱정했다. 베스트셀러 쏠림 현상, 콘텐츠 전체의 질적 하락 등이 어느 수준으로 현실화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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