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발표된 모스크바 삼상안은 조선인을 둘로 갈라놓았다. 모스크바 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자국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했고, 조선 문제는 부차적 관심사였을 뿐이다. 이미 그어놓은 38선은 점령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딱 알맞은 경계선이었다. 38선을 깔고 앉아 있기만 해도 한반도 반쪽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독립’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놓고, 우익은 ‘신탁통치 반대’로 줄달음쳤고 좌익은 ‘모스크바 삼상안 절대 지지’로 나아갔다. 수많은 정당과 단체가 탄생해, 정치 상황이 변함에 따라 좌·우·중간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꼭 거쳐야 할 단계인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렸지만, 아무 성과를 내지 못한 채 1946년 5월부터 휴회에 들어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한국 내 좌우익 누구와 협의할지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익이 좌익을 공격하다독립국가 수립은 점점 멀어지는 듯 보였다. 언제 독립할지 가늠하기 힘든 지지부진한 정치 일정은 즉각 독립을 원한 조선인들에게 좌절감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3·1절은 예사롭지 않은 날이었다. 일제에 저항한 3·1운동은 독립국가와 민주정부 수립 뜻을 다시 한번 새기는 중요한 기념일이었다.
1947년 3·1절 28주년을 맞아 미군정 관리와 김규식 입법의원 의장이 참석한 군정청 행사는 오전 10시30분 군정청 뜰에서 열렸다. 서울 시민이 준비한 행사는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 두 곳에서 별도로 열렸다. 우익세력은 브라운 소장 등 미군정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12시에 열었고, 좌익세력은 남산에서 ‘3·1운동 28주년 기념식’을 11시40분부터 거행했다. 민족 독립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해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 기념식을 같이 열 수 없었던 것은 194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좌우익 대립 때문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우익의 3·1절 기념식에는 브라운 소장 등 미군정 당국자가 참석해 축사를 하고, 전국학생연맹·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단체가 주로 참가했다. 기념식 도중에 “신탁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거나,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결의했다. 오후 1시30분쯤 기념식을 마친 우익 단체들은 광화문에 있는 군정청과 서대문을 거쳐 서울역에서 해산하려 했지만 계속 행진했고, 4시가 거의 다 돼 남대문에 도착했다.
남산공원에서 열린 기념식 집회는 좌익 연합단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주도했고, 청년단체들이 참여했다. 기념식에서 사람들은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촉구했고 “토지를 농민에게”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적은 펼침막을 내걸었다. 남산에서의 기념식은 3시에 끝나, 좌익 단체들도 남대문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좌우익 세력은 남대문 부근에서 충돌했다. 당시 신문은 “오후 4시3분 전 시위행렬을 지어 남대문에 이른 전국학생연맹과 남산에서 식을 마치고 내려오던 3·1 측과의 돌팔매가 시작되자, 경관 측에서는 이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었는데”라고 보도했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도 인정했듯, 충돌의 도화선이 된 돌팔매질은 우익 쪽이 먼저 시작했다.
이 사실은 동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 통신대는 기록을 위해 주요 활동을 카메라로 찍었는데 항상 동영상도 함께 찍었다. 미군이 기록한 사건 사진이 남아 있다면, 그때 그 장소를 찍은 동영상도 함께 있기 마련이다. 사진과 동영상을 교차 비교해보면, 신문에 보도된 것 이상의 사실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충돌을 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사진❶은 남대문 충돌을 담은 동영상 가운데 한 부분만 갈무리한 것이다. 총분량 10분56초의 동영상은 1947년 3월1일 기념식의 전 과정을 담고 있다.
동영상이 6분45초 지나서 사진❶의 장면이 나타난다. 좌우익 대열을 가르는 도로 중간에 트럭 한 대가 보이더니, 흰색 완장을 찬 청년 30여 명이 한꺼번에 재빠르게 내린다. 그 뒤 바로 나오는 것이 사진❷인데, 남대문 충돌이 시작되는 장면이다. 왼쪽에 서울시청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카메라가 찍는 충돌 장소는 지금의 남대문시장 쪽이다. 우익 대열 속에 여자중학교의 펼침막도 보인다. 이 사람들이 행진하는데 갑자기 우익 대열 오른쪽에 있던 청년 무리가 길 건너 좌익 행진 대열로 돌격한다. 영상을 보면, 긴 장대를 들고 돌격할 듯이 뛰어가거나, 돌팔매질을 한다. 우익이건 좌익이건 대열 사이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사람들이 놀라 혼비백산 흩어졌고, 그사이 총탄 여러 발이 발사됐다.
경찰은 누구를 위해 총을 쐈나나중에 수도경찰청 출입기자단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날 모두 6명이 총탄에 맞았고 2명이 죽었다. 죽은 이는 상인과 중학생이었다. 사건 다음날 신문은 경찰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지만, 수도경찰청은 6명 모두 건물의 높은 곳에서 날아온 총알에 맞았다고 주장해 책임을 좌익 쪽에 전가하려 했다. 경찰이 책임을 회피하고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고 생각한 기자단은 스스로 조사해 6월13일 결과를 발표했다. 기자단은 사격 장소가 탄환 각도와 부합하는지 조사했는데, 총알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들의 상처는 총알을 맞은 각도가 거의 0도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 높은 곳에서 발사했다는 경찰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고, 경찰이 사격 장소로 지목한 건물에서는 피해자를 도저히 맞힐 수 없는 위치라고 주장했다. 기자단은 경관이 엎드려 쐈다는 목격담도 있고, 빌딩 창문이 이중창으로 종일 닫혀 있었다는 증언도 있어, 철저히 조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남대문 좌우익 충돌’은 우익 쪽의 돌팔매와 돌진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것이 사건의 핵심은 아니다. 해프닝에 그칠 수 있었던 남대문 충돌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든 것은 경찰의 총격이었다. 경찰이 서울에서만 발포했던 것은 아니었다. 3월1일 전북 정읍, 부산, 전남 영암과 순천, 제주에서도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와 중상자가 생겼다. 경찰은 이 지역들의 시민들이 경찰과 경찰서를 ‘습격’해 응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주의 경우, 경찰서를 공격하는 것으로 오인한 응원경찰(육지에서 지원 나온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는 사건은 1년 뒤 ‘제주4·3’이 일어나는 도화선 구실을 할 만큼 도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북한에서 남하한 청년들로 구성된 서북청년회는 전국 각지에서 테러로 악명이 높아 피를 몰고 다녔고, 특히 제주도에서 도민을 괴롭혀 서북청년회가 오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서북청년회는 ‘경찰서와 들어가는 입구는 다르지만 사무실은 같은 곳을 썼던 조직’이었다. 서북청년회는 공공연히 경찰의 재정 지원을 받는 ‘경찰 보조조직’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피 끓는 청춘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일삼았던 것은 이들을 봐주는 든든한 배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진정한 ‘애국자’라며 부추기는 우익 정치집단과 이들을 눈감아주는 미군정 권력은 증오와 적대의 감정을 최대한 끌어내고 폭력을 묵인하며 정치적 힘으로 동원하려 했다.
군사적 사고에 익숙한 미군정은 점령 초기부터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 구별하려 했고, 조선의 정치세력을 항상 ‘좌’와 ‘우’로 나눠 정치 동향 보고서를 썼다. 그들에게 ‘우’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이고 말이 통하는 친미 기독교 반공 세력이었고, ‘좌’는 미군정에 비우호적인 반미=친소=친공 세력이었다. 오른쪽은 배후를 봐주고 돈을 들여 지원해야 할 ‘올바른’(right) 정치세력이었지만, 왼쪽은 소련을 추종하고 질서를 존중하지 않기에 무너뜨리고 파괴해야 할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미군정과 경찰은 1947년 3월 일어날 수 있는 소요 사태에 확고한 방침을 이미 정해두었다. 사진❸을 설명하면서 미군은 좌익세력을 ‘riots’(폭동자)라고 표현했지만, 사진❹에선 우익세력을 ‘Korean people’(조선 사람들)이라고 표시했다. 시위를 하더라도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좌익은 폭동, 우익은 조선 사람미군정의 시각에 따라 강요된 ‘편가르기’ 정치가 3년간 정치판을 좌우했다. 이승만을 미국에서 데려와 우대해준 것도, 김구가 일찌감치 미군정의 눈에서 벗어난 것도, 김규식·서재필과 중도파 여운형을 어찌 이용해보려 하다가 버린 것도, 1946년 9월 체포령을 내려 박헌영을 북한으로 쫓아낸 것도 다 미군정의 점령 정치였다. 모든 정치세력을 좌우로 나누는 미군정의 편가르기와 구별의 정치 속에서 친일 청산과 독립국가 건설은 오히려 부차적 문제로 보였다.
모든 것이 이념으로 돌아가는 듯했고, 이념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최후의 심판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짜 그랬을까? 이념은 편가르기를 위한 꺼풀에 지나지 않았고, 이념의 과잉 결정 뒤에 웃고 있던 것은 욕망의 ‘덩어리들’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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