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게 세심히, 구석구석 키스 받은 얼굴이 있다. 이목구비와 상관없이 아름답고 생생한 얼굴. 축복은 고르지 않다. ‘오늘 가장 감동받은 사람은 나야’ 하고 벅찬 표정을 짓는 이를 골라 시간은 입 맞춘다. 축복의 차이는 태도의 차이. 감동처럼 “가르침을 주고 삶을 이끌어온 것은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이야기하는 태도”(프랑스 작가 장 주네)이다.
미학자 양효실의 두 번째 책 (현실문화 펴냄)은 시간의 입맞춤을 오래 받은 얼굴을 볼 때처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여기서 보게 되는 청소년,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그리고 우울한 자, 불행한 자, 비루한 자, 어정쩡한 자의 얼굴. “거부당했던 자기 자신을 꺼내 들고 거기에 음악과 시를 입히는 성장”에 관한 산문집인 이 책은 “경멸과 분노, 폭력을 가르치는 세상에서 사랑하고 웃고 울 곳을 만들어야 한다”고 신호한다. 이것이 ‘불구의 삶’을 이야기하는 지은이의 태도다.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학에서 20년 동안 현대예술, 페미니즘, 대중문화를 가르쳐온 그는 “학생들이 더러운 말을 쏟아내는 수챗구멍이 되려고 했다.” 수챗구멍이 막힐 때마다 시, 음악, 소설, 영화 같은 예술을 꺾어다 내밀었다. “내 비밀이 우리의 비밀이고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삶임을 공유하고자” 나눈 이야기들이 다섯 장에 담겨 있다.
청소년에게 귀 기울인 기록(1장)은 이른바 ‘비행 청소년’을 다시 정의한다. 그 아이들은 “따듯하고 무사한 현실이란 베일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버리거나 삐죽 얼굴을 내미는 이중 국적자다.” 무엇보다 “우리를 대신해 불행한” 존재일지 모른다. 지은이는 ‘탄생’을 모체로부터 분리되는 충격과 상처의 경험으로 본다(2장). ‘나’는 태어난 최초의 순간부터 귀엽지만 하찮은 존재이고 이렇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면 세상을 정확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이런 자는 예술을 받아들이고 감동받을 자격이 있다.
실비아 플라스, 최승자, 김언희의 시를 읽으며 ‘세상을 정확하게 못 느끼는’ 남성에겐 “추락”을 권한다(3장). “폭력을 없애기 위해 더 많고 더 나은 아버지를 세우는 것. 법을 더 공고히 하는 것은 근대의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실패했다. 그렇다면 남자들에게 남은 길은 ‘여자 되기’다. ‘여자 되기’는 추락이다. 더 철저히 추락하고 비천해지지 않으면 폭력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하다.” 삶의 허무, 삶에 대한 혐오, 이 둘을 극복하는 익살은 근대의 매혹적인 두 캐릭터인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를 통해 들여다본다(4장). “유머, 웃음, 희극, 가벼움, 농담”은 “경멸과 분노와 폭력의 언어를 무력화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5장). “아니 어린 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른한테?” “그럼 눈을 동그랗게 뜨지, 네모나게 떠요?” 눈을 네모로 뜰 수 없듯이, 약자는 강자가 정해놓은 세상에 맞춰 자기를 바꿔선 안 된다. “우리는 치유를 거부할 것이고 기꺼이 나쁜 쪽에 설 것”이다.
어린, 여성인, 동성을 사랑하는, 장애가 있는, 세상에 어긋나게 놓인 내가 이러다 잘못되면 어떡하냐는 “당신,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 책은 ‘사랑의 말’로 전한다. ‘그거 잘못돼도 당신은 잘못되지 않아요.’
석진희 디지털뉴스팀 기자 ninano@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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