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란 비극적 역사와 잔혹한 참상이 일어났던 장소를 경험하는 일종의 ‘역사 여행’이다. 사람들은 왜 가슴 아픈 역사를 기억하려 할까? 그것은 과거의 비극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는 지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는 한라산과 360여 개 오름, 신비한 용암동굴, 곡선이 아름다운 돌담, 그리고 멋진 풍경이 있는 올레길로 인해 대개 ‘천혜의 관광지’라는 지점에 시선이 멈춰 있다. 하지만 제주는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다. 이면에 가슴 아픈 현대사가 있다. 먼 과거까지 소급하지 않더라도 광복 뒤 참혹했던 제주 4·3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흔적 가운데 하나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3사건을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봉기를 정부가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는 1954년 9월21일까지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공식 집계인 3만 명 넘는 희생자도 엄청나지만 일련의 과정에서 생겨난 제주민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던 만큼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마을이 없을 정도다.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제주4·3평화공원’을 찾아보자. 이곳 전시실의 백비에는 아무런 이름이 없다. 특별법이 만들어질 만큼 한국 현대사에 비극적인 큰 사건이었고 국가의 잘못이라는 대통령의 사과도 있었지만 4·3사건은 지금까지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북촌리의 애기무덤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 가면 너븐숭이가 있다. ‘넓은 바위지대’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북촌리 사건이 벌어졌다. 1949년 1월17일 발생한 일이다. 바로 옆 마을인 함덕에 주둔하던 23대대가 동부 지역의 한 중대를 순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장대의 습격을 받고 군인 2명이 숨지는 일로 촉발됐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400여 명이 희생됐다. 희생자 가운데 어린아이도 있었다.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을 추념하기 위해 너븐숭이에는 추모비와 작은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북촌리 학살 사건을 처음 알렸던 작가 현기영의 소설 문학비도 이곳에 있다. 북촌리를 찾으면,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20여 기의 ‘애기무덤’이다. 애기무덤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려준다. 제주 4·3사건이 제노사이드(어떤 종족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절멸을 목적으로 하여 그 구성원을 집단살해 하는 것)의 증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작은 동네 낙선동에 가면, 제주 4·3사건 때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다. 1949년 봄이 되면서 무장대는 거의 괴멸 상태에 있었다. 진압군은 무장대와 주민들을 분리시킨 뒤 토벌한다는 작전에 따라 모든 마을에 성을 쌓았다. 주민과 무장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다.
축성 작업은 대부분 여자와 노인들의 몫이었고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주변 마을 주민들과 초등학생들도 강제 동원됐다. 성의 규모는 대략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로 성 밖으로 도랑을 파서 가시덤불을 놓았다. 성이 완공되자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으로 생활했다.
4·3이 끝나자 주변 부락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일부는 성 안에 정착해 오늘날 낙선동을 이루었다. 4·3 당시에는 200가구가 성 안에서 살았으나 현재는 13가구만 남아 있다. 지금은 성터 외에 당시의 망루대, 경찰서, 함바집 등을 복원해 4·3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곤을동은 현재 제주시 화북동에 위치한, 터만 남은 마을이다. 4·3을 거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4·3의 광풍이 절정이던 1949년 1월에 벌어진 일이다. 마을에 무장대원이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진압군이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주민 수십 명이 학살됐다.
지금도 곤을동에는 당시 집터와 화장실터 올레길이 뚜렷이 남아 있다. 잃어버린 마을의 대부분은 중산간 마을이었지만 바닷가 마을은 곤을동이 유일하다. 4·3 기간 중 진압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 300여 마을이 피해를 본 것으로 현재 조사되고 있다.
총탄에 초토화된 삶, 무명천 할머니4·3 후유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무명천 할머니다. 본명은 진아영으로, 1949년 1월17일 제주시 한경면 판포리 무장대 토벌 때 경찰의 총탄을 턱에 맞고 쓰러졌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 뒤 할머니는 무명천으로 턱을 가린 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90살 되던 해인 2004년에 돌아가셨다.
그 뒤 할머니가 살았던 생가는 ‘삶터보존위원회’라는 작은 단체가 단장해 사람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4·3사건 진상은 밝혀졌지만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할머니의 생가는 손바닥선인장 자생지로 유명한 제주시 한경면 월령리에 있다.
4·3사건 전개 과정 중에 흐름을 바꾸는 지점들이 있는데 그 마지막이 예비검속이다. 한국전쟁 발발 뒤 예비검속으로 한림면, 안덕면, 대정면 사람들이 끌려와 아무런 절차 없이 학살당했다. 학살은 송악산 바로 앞 섯알오름, 일본군 탄약고가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몇 년 지나서야 주검을 수습하게 되었지만, 주검들이 서로 얽혀 있어 구분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안장했다. 섯알오름 학살터는 최근 추모비를 세우고 정비해 대표적인 4·3 유적지로 꼽힌다.
갱도 뚫리고 군비행장 들어선 한라산 일대제주도민들은 4·3에 앞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도 일본군의 침략전쟁으로 참혹한 피해를 당했다. 그 기억이 이 땅에 고스란히 남은 사실을 다크투어를 통해 알 수 있다. 제주도의 일본군 군사시설 구축은 1944년 10월 미군이 필리핀을 점령한 뒤 12월 일본방위총사령부가 본토 방위를 위해 제주도를 주요 지역으로 상정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45년 2월 일본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7개의 길목을 차단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른바 ‘결7호작전’이다. 제주는 이 작전의 핵심 지역이었다. 제주의 오름 일대에는 삽시간에 갱도가 뚫리고 곳곳에 군비행장이 만들어졌다. 포대, 참호, 고사포진지, 대피소, 진지동굴, 비행기 격납고, 탄약고 등이 건설됐다. 한라산 중턱에는 ‘하치마키’라는 군사도로가 만들어졌고 각 진지와 진지, 진지와 포구를 연결하는 군사도로도 곳곳에 생겨났다.
한라산국립공원 내 어리목관리사무소 뒤쪽에 있는 오름 ‘어승생악’(해발 1169m)에 제주도 내 일본군을 총괄 지휘하던 제58군 사령부가 주둔했다. 지금도 어승생악 중턱에 갱도 4개와 정상에 관측구가 뚫린 토치카(콘크리트, 흙주머니 따위로 쌓은 사격 진지) 2개소, 그리고 곳곳에 참호와 교통호가 남아 있다.
어승생악은 비교적 높은 곳이어서 제주 해안과 대부분의 오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든 오름의 방어진지를 지휘할 수 있는 유리한 곳이었다. 일본군은 어승생악을 중심으로 한라산 중턱에서 최후의 일전을 모색했다. 오름 남쪽과 동쪽 7~8부 능선에 있는 갱도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정상에 있는 토치카는 탐방로가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한경면 청수리에 있는 가마오름 동쪽에도 일본군이 지하갱도를 뚫었다. 전체 갱도 진지는 지하 3층 이상으로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오름 정상에선 서부 지역 해안을 관측할 수 있어 모슬포 또는 고산 지역으로 상륙하는 미군을 겨냥한 기동부대가 주둔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전체 길이는 1.2km 정도 된다. 그 가운데 동쪽 300m를 현재 공개하고 있다. 나무를 이용해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했다. 조명시설을 갖춰 관람객이 당시 현장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했다. 땅굴 입구에는 전시실을 만들어 일본군이 활용했던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땅굴 내부에선 당시 사령관실로 추정되는 방과 회의실, 숙소, 의무실 등을 볼 수 있다.
송악산은 일본군 군사시설이 빼곡했던 지역이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해안에 있는 오름인 송악산은 산방산에서부터 최남단 마라도까지 탁 트인 조망이 일품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관광지로도 유명해졌다. 바닷속에서 화산이 폭발해서 생긴 수성화산체와 스코리아구(화산송이로 이루어진 언덕)로 이뤄진 이중화산체로 지질박물관이라 일컬을 정도로 지질학적 가치가 큰 오름이다.
일본군이 이곳에 뚫은 진지동굴은 총길이가 약 1km에 이르고 출입구만 22곳이다. 당시 일본군 자살특공 어뢰 접안 시설과 어뢰정인 가이텐을 감추기 위해 파놓은 해안절벽의 진지동굴, 섯알오름의 고사포 진지와 격납고, 그리고 일본군이 죽으면 화장했던 화장터까지 오름 전체가 전략적 요새였다.
제주에서 전쟁까지 일어났다면이외에 수월봉과 일출봉, 서귀포 황우지 해안, 심지어 용암으로 이루어진 산방산 중턱에 진지동굴이 만들어졌다. 오름 곳곳은 군사시설로 많은 상처가 났으며 지금까지 치유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일본군 항복으로 제주에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설 규모를 봤을 때 만약 미군과 전쟁을 치렀다면 얼마나 많은 제주민의 희생이 뒤따랐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글·사진 이성권 자연환경해설사/제주 4·3 역사문화해설사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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