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제주 들꽃, 화려하지 않은 고백

한라산 고지대의 키 작은 꽃부터 검붉은 존재감 뽐내는 해변의 꽃까지… 지역마다 피고 지는 소탈한 아름다움
등록 2016-08-03 16:24 수정 2020-05-03 04:28
‘왓!?’
제주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왓은 ‘밭’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왓을 따라 사람들이 살았다. 해안길을 따라, 중산간 길을 따라 어디든 왓이 있다. 제주 서쪽에 비옥한 왓이, 동쪽에 척박한 ‘빌레왓’(너럭바위가 있는 돌밭)이 있었다. 왓을 지키기 위해 검은 돌로 쌓은 ‘밭담’은 제주의 마을 풍경을 만들었다. 제주 전역의 밭담을 이어붙이면 용이 구불구불 솟구쳐오르는 모습이 보인다고 해 ‘흑룡만리’라는 말도 있다. 오랜 세월 제주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는 구실도 왓이 했다. 해녀들이 물질로 먹거리를 가져오던 바다는 아예 ‘바당밭’(바다밭)이라고 불렸다. 왓을 따라 제주 여행을 떠나보자. 아직 그 길이 낯설다면, 여기 이 건네는 제주 비밀노트가 있다. 제주의 길과 오름, 자연, 문화, 역사, 맛과 재미를 담았다.
한라산은 전국에서 1년 중 가장 먼저 꽃이 핀다. 마지막 꽃이 남는 곳도 제주다. 식물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꽃들이 여기서 자란다. 섬잔대(위쪽)와 한라꽃장포.

한라산은 전국에서 1년 중 가장 먼저 꽃이 핀다. 마지막 꽃이 남는 곳도 제주다. 식물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꽃들이 여기서 자란다. 섬잔대(위쪽)와 한라꽃장포.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도, 들꽃을 좋아하는 사람도 제주도를 찾는다. 1년 중 가장 먼저 꽃이 피는 지역이 제주이고, 가장 늦게까지 꽃이 남아 있는 곳도 제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면적에 비해 많은 식물이 자생하는 곳도 제주다.

한라산과 바다, 그리고 이를 연결하는 오름과 곶자왈이라는 자연환경이 제주를 식물의 보고로 만들었다. ‘꽃’이라는 기준에서만 본다면 제주의 여름은 한라산에서 자라는 식물이 대세이다. 저지대 식물은 대부분 열매를 달고 있는 시기이다. 한라산에는 지금도 꽃을 피우는 식물이 많고 막 시작된 가을꽃도 있다.

한라산엔 이미 가을꽃 시작

한라산 초입으로 떠나보자. 먼저 호자덩굴이 꽃을 피운다. 제주와 울릉도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6월부터 저지대 하천 주변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해 한라산으로 번져간다. 잎겨드랑이에서 긴 통이 있는 하얀 꽃이 두 송이씩 짝을 이뤄 피고, 네 갈래의 꽃잎에는 긴 털이 뽀송뽀송 나 있다.

좀쥐손이도 일품이다. 쥐손이풀과인 좀쥐손이는 우리나라에선 한라산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왜소하지만 날렵하게 세 갈래로 완전히 갈라진 진녹색 잎, 그 표면에는 하얀 무늬 그리고 파란색 줄무늬가 있는 꽃이 깔끔한 색의 조화를 이룬다.

좀쥐손이의 사촌쯤 되는 섬쥐손이도 탐방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특산종이다. 꽃대를 숙이고 있다가 꽃을 피울 때, 차례로 하나씩 힘껏 들어올리는 모습이 꽤 생동감 있다. 분홍색 꽃잎과 붉은색 줄무늬는 곤충 눈에 잘 띄게 설계돼 있다. 섬쥐손이와 섞여 자라는 산쥐손이는 꽃이 작은 대신 꽃잎 색깔이 더 붉고 잎이 더 뾰족해 곤충 눈에 쉽게 들어올 수 있겠다.

8월 한라산에선 초롱꽃과 식물들도 꽃을 피운다. 탐방로 초입 계곡 근처에서 볼 수 있는 모싯대, 중간부터 정상까지 자라는 섬잔대, 정상 근처에만 있는 둥근잔대가 있다. 모싯대는 전국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다. 하지만 시원한 숲 속 계곡물에 파란색 꽃을 드리운 모습은 한라산을 오르는 사람만이 느끼는 즐거움이다.

섬잔대는 한라산에만 있는 특산식물로 물 근처 모싯대와 달리 햇볕이 잘 드는 경사진 풀밭이나 바위틈에서 자란다. 줄기를 곧추세우고 그 끝에 두어 송이 파란색 통꽃이 달려 있다. 꽃의 크기가 작고, 키도 20cm 정도로 크지 않지만 곤충 눈에 쉽게 띌 수 있도록 한곳에서 많은 개체가 무리지어 핀다.

둥근잔대는 섬잔대보다 더 높은 곳에서 자라지만 섞여 있기도 하여 비슷한 두 종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섬잔대에 비해 둥근잔대는 꽃이 더 크고 뿌리잎이 둥글며 한두 개체씩 흩어져 자라는 차이가 있다.

이름에 ‘한라’라는 접두어가 들어가는 자체로 그 식물을 한 번 더 눈여겨보게 된다. 한라개승마가 그렇다. 저지대 계곡 주변에서부터 한라산 정상까지 자라기 때문에 꽤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셈이다. 키가 큰 것은 어른 무릎 정도 되지만 바람 드센 한라산 높은 곳에 자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키가 작다. 잎은 깃꼴 모양으로 가늘게 갈라져 있고 긴 꽃대에 흰색의 작은 꽃들이 앙증맞게 줄지어 달린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만 자라는 꽃은 한라산 해발 1500m 정도에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꽃잎이 특이해서 눈에 들어오는 산솜방망이다. 산솜방망이는 제주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에 한라산을 오를 때는 꼭 봐야 할 꽃으로 추천한다. 산솜방망이는 꽃대 끝에 노란색으로 피워 올린 꽃이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노란꽃 아래로는 노란색 두상화와 대비되게 주황색 꽃잎을 힘이 부친 듯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뭔가 허술하고 부족한 느낌을 준다.

산솜방망이 옆에는 한라산에서만 자라는 한라꽃장포도 피어난다. 백합과 풀꽃으로 해발 1700m 이상 높은 곳의 햇볕이 잘 드는 풀밭이나 바위틈에서 자란다. 키는 보통 어른의 손가락보다 조금 큰 편으로 뿌리에서 올라온 잎은 긴 칼처럼 생겼다. 꽃은 줄기 끝에서 약간 성글게 달린다. 흰색 꽃잎 위에 붉은빛 분홍색 점 하나를 찍어놓은 모습이 아주 귀엽다.

산솜방망이, 한라꽃장포, 구름떡쑥
전주물꼬리풀(위쪽)과 좀쥐손이. 좀쥐손이는 국내에서 한라산에만 자라는 꽃이다. 날렵한 세 갈래 녹색잎과 하얀 표면, 파란색 줄무늬의 조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전주물꼬리풀(위쪽)과 좀쥐손이. 좀쥐손이는 국내에서 한라산에만 자라는 꽃이다. 날렵한 세 갈래 녹색잎과 하얀 표면, 파란색 줄무늬의 조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정상에 다다를 무렵 구름떡쑥을 만난다. 이름에 ‘구름’이란 말이 붙은 것만으로도 신비함이 느껴진다. ‘구름이 떠다니는 높은 곳에 있는 식물’이라는 뜻이겠다. 구름떡쑥은 키가 다 커도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을 만큼 작다. 하지만 추운 고산에서도 잘 견딜 수 있게 뽀송뽀송한 솜털로 몸 전체를 무장했다. 노란 꽃은 주변의 하얀색 화피 조각으로 인해 더 도드라져 보이고 여러 꽃대가 모여 우산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 오랜 세월을 견뎌내서 그런지 소박함이 전해진다.

이 밖에 8월이면 가을이 되어야 절정인 물매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더 높아진 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룬 파란색 구름체꽃, 뿌리 모양이 손바닥처럼 생겼다는 붉은색 손바닥난초, 꽃잎 4개에 귀가 있는 듯 보이는 네귀쓴풀, 꽃이 좁쌀만 한 검붉은 깔끔좁쌀풀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들꽃들이다.

제주의 여름꽃 가운데 한라산 외에 습지에서 자라는 꽃들도 있다. 대표적 식물이 전주물꼬리풀자주땅귀개이다. 두 종은 자생지가 드물어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식물로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

전주물꼬리풀은 제주 동부 지역 습지 두어 곳에서만 자생한다. 이름처럼 전북 전주에서 처음 발견돼 현재의 이름을 얻었을 텐데 전주에서는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년 전 제주에서 가져간 종자가 꽃을 피워 올해 전주의 습지에 복원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물이 깊지 않고 햇빛이 잘 드는 습지나 연못에서 자라고, 키는 약 50cm로 가늘고 길쭉한 잎이 4장씩 돌려난다. 꽃대에 촘촘히 달린 연보라색 작은 꽃이 화려하지만 습지 전체를 덮은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제주 해녀 닮은 바닷가 꽃

한라산 해발 1100m의 습지 몇 곳에는 벌레잡이식물 자주땅귀개가 있다. 귀이개처럼 생겼고 꽃이 자주색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모양이다. 키는 커봐야 어른 손가락 정도이며 8월부터 꽃을 피운다. 벌레잡이식물은 대부분 물이나 습기가 있는 곳에 자생한다. 습지나 연못이 생물의 생존에 필요한 양분이 쉽게 씻겨 내려갈 수 있는 곳이어서 부족한 것을 벌레로부터 얻고 있는 것이다. 자주땅귀개는 줄기 맨 아랫부분, 아니면 땅속 뿌리에 벌레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땅 위나 땅속으로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들을 주머니로 빨아들이겠다는 의도이다. 주머니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벌레가 든 주머니는 검은색을 띠고 그렇지 못한 주머니는 흰색을 띤다.

습지에는 잠자리난초도 있다. 키는 큰 개체가 70cm 정도 자라고 줄기 윗부분에 흰색으로 무리지어 핀 꽃은 마치 한동안 놀다 잠시 쉬고 있는 잠자리를 닮았다. 제주에만 있는 게 아니고 습지뿐만 아니라 습도가 높은 풀밭이면 아무 데서나 잘 자라 보기 어려운 꽃이 아니다. 그래서 귀한 축에 들어가지 않지만 난초과 식물의 고고한 자태에 대한 감상을 놓칠 수 없다.

이 밖에 순백의 아름다움을 주는 어리연, 잎이 마름모 모양인 마름, 늦은 오후에만 피는 흰꽃물고추나물, 고산 습지에서 자라는 노란색 애기원추리, 검은색 꽃이 도드라진 흑박주가리도 습지에 가면 빼놓을 수 없는 식물이다.

바닷가에는 무궁화를 닮은 황근이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다. 아욱과 식물로 어린아이 주먹 크기의 꽃이 잎겨드랑이에서 하나씩 피어난다. 노란색 꽃잎과 검붉은 꽃잎의 중앙부, 노란색 수술과 붉은색 암술머리는 손바닥 크기의 연초록 잎사귀와 어울리며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시기에는 해녀들의 애환이 깃든 해녀콩도 꽃을 피운다. 해녀콩이 바닷가 바위틈이나 모래땅의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모습은 제주 해녀들의 삶과 많이 닮았다. 해녀들이 원치 않은 임신을 했을 때 먹었다고도 전해진다. 3장의 잎이 넙데데하여 크고 연분홍색 꽃도, 강낭콩 같은 열매도 다른 콩과식물에 비해 큰 편이다. 이런 사연과 독특한 모습 때문에 해녀콩은 문학작품에도 등장한다.

들꽃 따라 다니다보면 1년 훌쩍

계절이 바뀌는 걸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이 들꽃이다. 1월 말이면 꽃을 피우는 세복수초부터 늦가을 마지막으로 피는 감국까지 들꽃을 따라 다니다보면 1년이 훌쩍 지나는 느낌이다. 8월 제주 바닷가 주변 꽃들은 검붉은색을 토해낸다. 한라산 높은 곳에 자라는 꽃들은 은은한 아름다움을 준다. 어떤 것이든 제시간에 맞춰 피는 들꽃들로 하여 꽃 보는 일은 늘 즐겁다.

글·사진 이성권 자연환경해설사/ 제주 4·3 역사문화해설사

이 기사를 포함한 제주에 관한 모든 기사를 만나볼 수 있는 낱권 구매하기!
모바일 낱권 구매 ▶바로가기
인터넷 낱권 구매 ▶바로가기
* 한겨레21 1년 정기구독하기 ▶바로가기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