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왓은 ‘밭’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왓을 따라 사람들이 살았다. 해안길을 따라, 중산간 길을 따라 어디든 왓이 있다. 제주 서쪽에 비옥한 왓이, 동쪽에 척박한 ‘빌레왓’(너럭바위가 있는 돌밭)이 있었다. 왓을 지키기 위해 검은 돌로 쌓은 ‘밭담’은 제주의 마을 풍경을 만들었다. 제주 전역의 밭담을 이어붙이면 용이 구불구불 솟구쳐오르는 모습이 보인다고 해 ‘흑룡만리’라는 말도 있다. 오랜 세월 제주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는 구실도 왓이 했다. 해녀들이 물질로 먹거리를 가져오던 바다는 아예 ‘바당밭’(바다밭)이라고 불렸다. 왓을 따라 제주 여행을 떠나보자. 아직 그 길이 낯설다면, 여기 이 건네는 제주 비밀노트가 있다. 제주의 길과 오름, 자연, 문화, 역사, 맛과 재미를 담았다.
“한라산은 한가운데 솟아 있고 여러 오름들이 여기저기 벌리어 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의 이슬방울 형국(연엽노주·蓮葉露珠)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1653~1733)은 한라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소감을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옛사람들의 표현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반대로 오름에 올라서서 한라산을 바라보면 오름군락은 한라산 앞에 도열한 자식들처럼 보인다.
제주에는 360여 개 오름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도 전역에 분포한다. 그래서 제주도를 ‘오름의 왕국’이라 부른다. 오름은 한라산·곶자왈 등과 함께 제주 사람들의 삶의 터전, 마음과 영혼의 고향, 생태계의 근간이며 제주 풍광을 결정하는 중요한 존재이다.
육지의 산과 태생이 다른 오름오름 자락에는 제주인들의 삶과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주 사람들은 오름 주변에 마을을 형성해 삶을 살았고, 힘들 때는 오름에 좌정한 신에게 의지했다. 죽어서 묻힐 영혼의 안식처로 삼은 곳도 바로 오름이다. 그래서 오름을 탐방한다는 것은 제주의 자연 가치를 향유하고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일이다. 최근 제주 오름은 제주도민뿐만 아니라 탐방객들에게도 인기 많은 명소가 되었다.
육지(본토를 부르는 제주어)나 외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오름 풍경과 제주 문화는 색다른 것이다. 육지에 있는 산과 태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육지의 산과 제주의 오름을 비교해보고 문화도 비교하면서 탐방해보자. 그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름이 간직한 것들을 제대로 알고 오른다면 한층 더 즐겁고 유익한 탐방이 된다. 일정 중에 반드시 오름 탐방을 넣을 것을 강추한다. 제주 오름은 난이도가 쉬운 곳부터 높은 곳까지 다양하니 ‘힘들지 않을까’ 미리 두려워할 필요 없다.
‘오름’은 조그마한 산체를 뜻하는 제주어다. 제주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고 세종대왕이 우리말을 만들었으니 그 뜻을 이리저리 추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제주 설화에는 설문대할망(제주를 창조했다는 할머니)이 치마폭으로 흙을 나르며 바다를 메워 제주도를 만들었는데, 치마폭에서 떨어진 흙덩이들이 오름이 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소박한 전설의 내용이 과학적인 설명보다 오히려 더 매력 있어 보인다. 이게 사실이라면 오름은 신이 만들었고, 그가 좌정해 있는 신성한 장소가 될 테니까 말이다.
지질학적으로 오름은, 화산활동으로 화구에서 분출한 물질이 쌓여 이루어진 작은 화산체인 독립화산체나 단성화산체를 말한다. 제주도는 기반을 형성하는 단계, 한라산체가 형성되는 단계, 오름이 형성되는 3단계로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면 제주 오름은 제주를 형성하는 마지막 단계로서 제주 자연은 완성한 화산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암 분출은 오름만 형성한 것이 아니다. 용암을 분출하게 하는 압력이 소진되면 화도에서 용암이 흘러나와 주변을 흐르면서 용암동굴을 형성하기도 하고, 용암대지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 위에 용암숲인 곶자왈을 형성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오름은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화산체이지만 화산체가 아닌 오름도 더러 있을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이름 없는 산체들도 있다. 따라서 오름의 수를 정하기 힘들다. 오름은 형성 원인에 따라 육상에서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분석으로 이루어진 분석구(다랑쉬오름·용눈이오름), 바닷속에서 분출해 물과 반응하는 수성화산활동으로 물과 뒤섞인 화산재가 쌓여 형성된 응회구(성산일출봉) 또는 응회환(용머리오름, 수월봉), 점성이 높은 용암이 분출해 형성된 용암돔, 수성화산과 분석구가 복합적으로 형성된 이중화산(송악산) 등으로 분류된다. 오름의 대부분(약 90%)은 분석구이다. 오름은 형태에 따라 원형, 말굽형, 원추형, 복합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생수 한 병, 요가매트 들고그렇다면 오름은 제주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오름은 섬이라는 고립되고 척박한 환경 속에 고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제주 사람의 의식주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 사람의 삶과 죽음을 관통한 생의 터전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름은 마을 공동 자산으로 목재와 땔감의 공급처, 초가지붕을 잇는 띠와 질병을 치료해주는 약초의 공급처이기도 했다. 마소를 방목하는 공동목장, 어느 한쪽 기슭에는 삶의 지친 마음을 풀어놓는 신앙의 성소가 되어주기도 했다.
제주 사람들에게 한라산과 오름은 마음의 고향이다. 제주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한 몸처럼 느껴져서 의식하지 않지만 제주도를 떠나면 비로소 한라산, 오름 등이 떠오르고 그리워진다. 이제 오름은 많은 탐방객이 찾는 경관 명승지이며, 체력 단련의 장이며, 체험학습의 장이며, 치유의 장소이다.
오름은 한라산, 곶자왈 등과 더불어 다양한 동식물의 서식처뿐만 아니라 개발 압력에 밀려 갈 곳 없는 생명들의 피난처이다. 그리고 오름에 스며든 물이 조금씩 흘러나와 주변에 습지를 만들어 많은 생명의 생명수가 되어준다. 따라서 오름은 지하수의 함양과 유지에 중요한 생태축의 하나이다.
오름은 제주도라는 큰 생태그물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어느 한 곳을 파괴하면서 다른 부분을 보전한다는 말은 제주도 자연환경의 이해가 모자람에서 비롯된다. 곳곳을 관광지와 도로로 개발하면서 점점 고립된 섬처럼 되어가는 제주의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름의 가치를 만끽할 ‘비법’도 있다. 아무리 조그마한 오름이라도 샌들을 신고 올라서는 안 된다. 다칠까 겁난다. 하지만 단단히 주의하라고 전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즐기기란 준비를 잘하는 것이다. 비에 대한 채비를 잘하면 비를 즐길 수 있다. 맨발로 걸을 준비를 하면 맨발로 걷는 것을 즐길 수 있다. 준비만 되면 땀 흘리는 것도 즐길 수 있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는 준비를 더 잘해야 한다. 여름에는 새벽이나 저녁 혹은 달밤을 택하라고 권하고 싶다. 탐방로가 잘 정비된 오름이라면 랜턴과 가벼운 복장, 깔개와 삼다수 한 병이면 족하다. 깔개 대신 요가매트를 가져가면 금상첨화다. 만약 달밤이라면 랜턴도 필요 없다. 동반자만 있으면 된다. 이제 즐길 준비가 됐다.
오름 정상에 오르면 물 한 모금 마시고 숨을 고르고 나서 자리를 깔고 명상을 해보자. 익숙하지 않으면 그냥 달을 보며 호흡에 집중해보자. 단 1분만이라도 동반자와 대화를 멈추고 판단을 멈추고 그냥 호흡에만 집중해보자. 요가매트가 있으면 달밤의 요가나 필라테스, 아니 그냥 누워서 스트레칭만 해도 기분 최고다. 달밤의 체조?! 황홀 그 자체이다.
좀더 용기가 있고, 수건과 약간의 물이 준비되어 있다면 맨발로 걸어보자.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머리 위에 빛나는 하늘의 별들, 바다에서 반짝이는 고기잡이 불빛, 소박하게 빛나는 마을의 불빛, 오름 군락의 스카이라인…, 이것은 달밤에 오름 오른 이들에게 덤으로 주는 선물이다. 그런데 어느 오름을 오르지? 탐방로가 잘 정비된 오름 몇 개를 추천한다.
오름을 대표하는 오름들 ① 다랑쉬오름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지정한 동부 지역의 오름 랜드마크이다. 제주도의 오름을 대표하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제주오름 가운데 이곳에만 오름탐방안내소가 개설돼 탐방객을 인도한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위용을 가졌다.
근처에는 가을억새로 유명한 ‘아끈다랑쉬오름’, 4·3항쟁의 아픈 흔적을 간직한 ‘다랑쉬굴’과 ‘잃어버린 다랑쉬마을’, 사진가 김영갑 선생이 사랑한 ‘용눈이오름’, 비자나무 최대 군락지이며 최고 힐링의 숲 ‘비자림’ 등이 있다. 다랑쉬탐방안내소에는 자전거를 대여해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예약하면 해설가 동반 탐방도 가능하다. 구좌읍 세화리(안내소 전화: 010-2768-2005).
② 용눈이오름다랑쉬오름에서 약 3km 거리에 있다. 저녁을 먹은 뒤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탐방로 경사가 완만하고 아름다워 사람
들이 많이 찾는 오름 중 하나이다.
③ 아부오름구좌읍 송당리에 있다. 1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올라가는 높이보다 분화구가 훨씬 깊은 오름이다. 영화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④ 수월봉한경면 고산리에 위치한 수성화산체이다. 오름 정상에서 보는 차귀도와 부속 섬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저녁노을이 아름다워 이를 촬영하기 위해 많은 사진가들이 찾는 곳이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화산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명소로서 신기한 화산지형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곳에는 마을 지질해설사가 배치돼 탐방을 안내한다.
⑤ 용머리오름과 산방산 지질트레일안덕면 화순리 화순해수욕장 서쪽 끝 썩은다리에서부터 용머리오름까지 걷는 트레일은 꼭 한번 걸어보길 추천한다. 바닷물에 발도 담가보기 바란다. 용머리오름에는 지질해설사가 있다. 용머리오름과 산방산은 오를 수 없으나 트레일을 걸으며 경관을 감상하고 힐링하기 좋은 곳이다.
⑥ 지미봉구좌읍 종달리에 있다. 오름 정상은 옛날에 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우도, 성산일출봉, 멕시코 모자인 ‘솜브레로’ 모양의 말미오름(두산봉), 한라산과 오름군락의 모습이 장관이다. 발아래 펼쳐진 마을 모습도 아기자기하다.
360개 오름, 100여 개 탐방로오름 360여 개 중 100여 개에 탐방로가 개설돼 있다. 올레길을 걷는 동안 경유하는 오름도 있다. 철 따라 피어나는 야생화들의 향연뿐 아니라 패러글라이딩이나 드론 날리기 같은 현대화된 즐거움을 누리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강윤복 제주숲해설가협회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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