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왓은 ‘밭’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왓을 따라 사람들이 살았다. 해안길을 따라, 중산간 길을 따라 어디든 왓이 있다. 제주 서쪽에 비옥한 왓이, 동쪽에 척박한 ‘빌레왓’(너럭바위가 있는 돌밭)이 있었다. 왓을 지키기 위해 검은 돌로 쌓은 ‘밭담’은 제주의 마을 풍경을 만들었다. 제주 전역의 밭담을 이어붙이면 용이 구불구불 솟구쳐오르는 모습이 보인다고 해 ‘흑룡만리’라는 말도 있다. 오랜 세월 제주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는 구실도 왓이 했다. 해녀들이 물질로 먹거리를 가져오던 바다는 아예 ‘바당밭’(바다밭)이라고 불렸다. 왓을 따라 제주 여행을 떠나보자. 아직 그 길이 낯설다면, 여기 이 건네는 제주 비밀노트가 있다. 제주의 길과 오름, 자연, 문화, 역사, 맛과 재미를 담았다.</font>
매년 이맘때, 여름휴가철이 가까워오면 오랜만에 지인들의 카톡이 울려옵니다.
“다음주에 가족과 내려가는데, 제주스러운 맛집 좀 소개해줘.”
제주 출신으로, 이곳의 아름다운 경관을 소개하고 맛있는 식당을 추천하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제가 자라왔고 살아가는 제주가 좀더 많은 이들에게 휴식 공간이 되고, 방문한 분들이 행복을 얻어간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를 해봤습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지역을 나눠보기도 하고, 방문 유형에 따라 달리해보기도 하고, 의뢰자의 요구에 따라 최적의 맛집 리스트를 제공하는 것을 즐겼답니다. 가족과 함께 오는 경우, 친구들과 어울려 오는 경우, 연인과 헤어지고 홀로 오는 경우 등 누군가 제주에 오는 데는 아주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식당의 조건은 천차만별이니, 꽤 까다로운 컨설팅 작업이었습니다. 아무리 제주 출신이라고 해도.
돔베고기가 크게 썰어 올려진 고기국숫집이나, 고추장과 된장을 함께 풀어 오묘한 풍미가 나는 한치물횟집, 제때 잡아 썰어야 먹을 수 있다는 고등어횟집, 전복 대신 제주 오분자기를 풀어 칼칼한 해물뚝배기집, 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 펄펄 끓는 멜젓(멸치젓)에 찍어 먹는 흑돼지 근고깃집을 추천했습니다. 쪽빛 해변과 올레길을 따라 생겨나는 아름다운 카페들, 중산간에 보석처럼 숨은 독특한 레스토랑도 소개했고요. 제주에서 난 재료로 풍성한 식탁 앞에 즐거운 그대들의 얼굴과 바다를 배경으로 빛나는 커피잔의 사진을 보며 뿌듯함도 느꼈습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제주스러운’ 것이라니! </font></font>그런데,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제가 소개한 모든 ‘맛집’이 사실은 ‘진짜 제주 맛집’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제주에서 먹었던 맛있는 제주 음식이 ‘진짜’가 아니라니. 그렇게 즐겁게 소개해놓고서는.
‘제주스럽다’ 혹은 ‘제주의 맛집’이라는 표현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맛집들은 사실 너무나 육지인의 시선에서 본 제주의 그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료가 풍부하거나, 육지에 없는 먹을거리거나, 아름다운 경관이 있는 집들이지요.
척박한 토양을 가지고 있고, 파도가 높아 위험한 바다가 있기에, 제주는 먹을 게 없는 땅이었습니다.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다는 ‘삼다(三多)도’라는, 언뜻 정겨운 이름은 사실 돌이 많아 일굴 땅이 없고, 바람이 거세어 띄울 배가 없고, 설혹 바다에 나갔더라도 남자가 수없이 죽어, 여자만 남았다는 ‘결핍’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자아이를 낳으면 넌 고기밥이요, 여자아이를 낳으면 너야말로 효도할 아이’라고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주인들의 먹거리라는 게 평소에는 감자나 삶아 먹다가, 제사나 잔치 같은 큰 행사를 할 때 겨우 돼지의 뼈 부스러기까지 긁어 우려내 국물을 내고 다른 지역에선 쳐다보지 않는 바다의 부산물 모자반을 갈아 넣어 만든 ‘몸국’이나, 정말로 별 맛이 나지 않는 무생채를 아주 얇은 메밀전병으로 감싸 만든, 간단하고 고열량인 음식 ‘빙떡’(제 고향 지역에선 ‘쟁기’라고 부릅니다) 같은 ‘마지막까지 남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음식은 굳이 식당에서 팔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돌이켜보면, 제주스러운 맛이라는 건 소박하고 근면한, 그리고 늘 결핍에 시달린 제주인들의 옛 문화를 간직한 그 무언가의 정수가 쌓여 이뤄진 어떤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찾은 제주의 ‘맛집’은 어떤가요?
어지간히 알려진 음식점에는 연예인과 정치인의 사인으로 도배돼 있고요, 아담하고 정겨워 이모님들과 만담을 나눴던 식당은 이젠 덩치가 커져 2호점, 3호점을 내기 바쁩니다. 점점 더 바빠지는 것에 비례해 친절함은 줄어들고요. 조용했던 해변가의 작은 카페들은, 지역이 유명해지니 도리어 젠트리피케이션의 희생양이 되어 더 한갓진 데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TV에 제주 맛집이라 소개된 곳에는 어김없이 예약줄이 길게 늘어서서, 맛과 경치를 제대로 느끼기보다는 발도장을 찍고 가는 데 급급합니다.
<font color="#C21A1A"><font size="4">알려주기 싫지만</font></font>점점 더 제주를 찾는 ‘사람’은 많아지고, ‘유명한 식당’도 많아지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오는 ‘사진’도 많아진, 이 새롭게 풍요로운 삼다(三多)의 섬에 ‘진짜’ 제주스러운 맛집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남들 알려주기 싫은 나만의 보석 같은 몇 군데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물론 호평만 존재하는 식당 없고, 악평만 있는 맛집도 없습니다만. 제주에서만 30년을 산 토박이가 격하게 애정하는 집들의 리스트입니다. 제주 사투리로 붐비는 소박한 제주 맛집 6.
<font color="#008ABD"><font size="4">1. 코코분식 칼국수</font></font>
한줄평: 배고픈 제주 학생들의 디딤돌
위치: 제주시 도남동 920-17
분식집이라 해서 우리가 상상하던 분식이 아니다. 코코분식 메뉴엔 떡볶이나 김밥이 없고, 칼국수와 비빔밥, 육개장이 있다. 그중 표고버섯이 가득 들어간 진한 국물의 칼국수는, 언제 먹어도 물리지 않고, 후루룩 면을 들이켜보면 맛깔나는 버섯 향기가 적절하게 풍겨 즐거운 느낌을 준다. 게다가 거의 모든 메뉴가 3500원. 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완벽한 맛이 만나, 점심시간에는 반드시 줄을 서야 한다. 그래도 요즘 제주에 ‘제주 사투리만으로 붐비는’ 장소는 몇 없다는 것.
<font color="#008ABD"><font size="4">2. 잉꼬가든 내장탕</font></font>
한줄평: 술병 걸린 자들이여 내게 오라
위치: 제주시 아라1동 6080
회식 다음날에는 항상 당기는 진한 국물. 아라동 천변에 쓰러질 듯한 집, 간신히 달려 있는 간판, 빛바랜 바닥이 세월의 더께를 짐작하게 해주는 ‘묵은 집’. 고춧가루를 한 숟갈 퍼서 진한 국물에 묻고 나면, 울컥했던 속이 순간 달래지곤 했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술 소비량이 전국 1위인 탓이었을까. 깔끔하게 새로 건물을 올렸다 하니, 맛도 새로워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font color="#008ABD"><font size="4">3. 우리집밥상 몸국</font></font>
위치: 제주시 연동 312-32
최근 ‘몸국’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 적잖게 놀라고 있다. 돼지 누린내와 모자반 특유의 끈끈함이 처음 먹어보는 이들에게는 편하지만은 않았을 터인데. 알고 보니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부자가 함께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왔다고 한다. 본래 몸국은 제주 사람들이 잔치를 벌일 때 먹던 음식이었으니, 주메뉴로 삼는 집은 관광지보다는 도청, 군청 근처에 있게 마련이다. 우리집밥상은 개업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오랫동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온 주인장 가족을 잘 아는 만큼 몸국의 오리지널리티와 맛은 보장한다. 단, 처음 먹어보는 사람은 도전하는 기분으로 임할 것!
<font color="#008ABD"><font size="4">4. 동성식당 두루치기</font></font>
한줄평: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장소에 있는, 땀 흘린 서귀포 노동자의 휴식처
위치: 서귀포시 토평동 1290
서귀포 두루치기로 따지자면, 1인분 3천원의 ‘혜자가격’(가격 대비 훌륭한 맛이라는 뜻의 신조어)을 자랑하고 술을 팔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용이식당이 있다지만, 나는 토평 동성식당을 더 애정한다. 제주 돼지 삼겹살을 먼저 굽다가 콩나물과 무채, 파채, 감자를 통째로 볼 넓은 냄비에 쏟아넣고 함께 볶으면 끝. 함께 나오는 미역오이냉국은 몇 번이나 리필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동성식당이 위치한 토평동은 감귤밭과 공업단지, 군부대가 인접한 지역이라 점심·저녁 시간에 오는 손님들이 대부분 노동자다. 제주인의 진짜 흙 묻은 숟가락질의 역사가 이 집에 있다.
<font color="#008ABD"><font size="4">5. 맛있는 참세상 문어칼국수</font></font>
한줄평: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라
위치: 제주시 한경면 조수리 116-4
세상에 식당 이름이 ‘맛있는 참세상’이다. 그나마도 간판 글씨가 다 바래어 ‘참’ 글자만 겨우 읽을 수 있다(곽지해수욕장변에 있다가 지금은 저지리 근처로 옮기며 간판을 바꿨다). 1970년대에도 이런 촌스러운 네이밍 센스가 풍겨오는 집은 없었을 게다. 게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흰색 기름종이가 테이블마다 깔려 있는 비주얼이라니…. 그러나 큰 칼국수 대접에 문어가 한 마리 통째로 들어 있는 모습으로 편견을 꼬집어준다. 두툼하게 잘라 해물이 진하게 우려진 국물, 면과 함께 들이켜니 이제는 식당이 잘생겨 보이기까지 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 트랜스퍼 효과가 이런 곳에. 다만 계산할 때쯤 되면 만만찮은 가격에 레드 선,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은 주의하라.
<font color="#008ABD"><font size="4">6. 추자본섬 삼치숙회</font></font>
위치 : 제주시 연동 314-9
제주에서 회란 회는 거의 다 먹어보고 내린 결론은, 광어회나 객주리(말쥐치)회는 여기저기서 비슷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여느 해변 도시가 다 그렇듯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횟집이 가격도 싸고 정갈한 음식이 나오는 법. 제주도청 근처에 있는 이곳에서는 잘 숙성된 삼치회를 합리적인 가격에 먹을 수 있다. 윤기 흐르는 삼치회 한 점을 두꺼운 김에 올려놓고 마늘, 부추, 밥을 적당히 올린 뒤 특제 양념장에 푹 찍어 먹으면 술술 넘어가, 꼭 추가를 하게 만드는, 마력의 횟집. 마지막 회 한 점이 남아 있으면 어지간해선 양보 못하게 만드는 안면몰수의 집. 제주로 오는 지인들이 ‘회’를 먹고 싶어 할 때마다 ‘바다도 안 보이는 데라 투덜거려도’ 데려가는 곳. 나올 때는 반드시 최고라는 평을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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