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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 여성대통령 탄생 예견?

등록 2013-01-11 02:50 수정 2020-05-02 19:27

여성이자 비혼이다. 이만하면 사회적 약자로서 요건을 두루 갖춘 셈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5년을 이끌어갈 대통령 당선인이시다. 그런데도 삶의 벼랑 끝에 몰린 노동계의 약자들은 그녀가 당선되자마자 하릴없이 제 목숨을 끊고 있다. 그녀를 약자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근혜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를 외치는 노익장의 남성 마초 ‘오빠주의자’들 정도인데, 이런 표상을 대타자로 내면화한 부류는 수적으로 분명 소수다. 그러나 그들도 결코 소수자는 아니다. 약자와 소수자는 이렇듯 육체적 힘이나 수의 우열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복잡한 인식틀이다.

당선인의 삶 대비되는 표지 인물

새해 시작과 함께 발행된 사람 매거진 1월호가 어느 70대 여성 비혼주의자를 표지 인물로 내세웠다. 잡지 표지에 주름 깊은 무명의 노인 얼굴이 클로즈업돼 등장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60대 비혼 여성 대통령의 탄생을 예견이라도 한 걸까. 결과는 공교로웠지만, 기획 의도는 딴판이다. 비혼 남녀들에게 세밑과 새해 들머리는 ‘왜 결혼하지 않느냐’는 압박이 정점을 찍는 시기다. 그들에게 위로도 주고 환심도 사기 위한 ‘캘린더성 기획’ 성격이 짙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표지 인물로 등장한 비혼 여성의 일대기는 여러모로 당선인의 그것과 대비된다.

당선인은 국가 가부장 노릇을 했던 아버지를 숭모하는 데 반해, 표지 인물에게 아버지란 비혼을 선택하게 한 부정과 극복의 대상이었다. 당선인이 대학생 때 영애로서 외교사절 노릇을 했다면, 표지 인물은 1961년 남북 학생회담을 추진하던 전국학생연맹의 여성부장을 하다 당선인의 아버지가 일으킨 5·16 쿠데타 직후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당선인은 ‘선거의 여왕’으로서 정당을 이끌었다. 표지 인물은 비혼 여성 모임을 조직해 권익 신장에 나섰다. 참! 당선인의 연애사는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표지 인물에게 로맨스는 바닷가로 밀려드는 파도와 같았다.

약자/소수자는 독립된 불변의 정체성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유동하는 위상이다. 흑인 버락 오바마는 미국 사회의 소수자지만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전세계의 ‘갑’이다. 한국의 당선인도 경우에 따라 약자/소수자일 수 있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 가운데 그녀의 위상은 명쾌하지 않다. 적어도 남성성으로만 표상되던 ‘대통령’의 성별 프레임에 균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녀의 당선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징후로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70대 여성 비혼주의자에 이어 두 명의 여성 노동자 대통령 후보를 만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민주당은 패배했지만, 진보정당들은 망했다. 한 명의 여성 후보가 일찌감치 사퇴하고 또 한 명의 여성 후보가 마침내 사퇴했지만, 그녀들보다 훨씬 소수자들을 대변한 김순자·김소연 두 여성 후보는 완주했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 백수들의 실존을 등에 업은 김순자 후보는 ‘생활정치’라는 기반 위에서 새로운 좌파정치를 주창했다. 조직 단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중심에 놓은 김소연 후보는 노동자 정당운동의 새 지평을 열고자 했다.

진보정치에 대한 생생한 전망

두 사람의 득표율 합은 0.2%. ‘낙선’이라는 표현도 과분한 그녀들은 객관적으로 망했다. 하지만 48%의 민주통합당 진영보다 씩씩하다. 애초 대선은 그녀들에게 ‘전부’ 아니면 ‘전무’를 다투는 일전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힐링’이 다급하게 요청되는 시기, 1월호에서 정신승리법이나 피안의 세계를 기대하지는 마시라. 대신 ‘여성’과 ‘노동자’라는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두 신출내기 정치인의 진보정치에 대한 생생한 전망을 만날 수 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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