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만화는 칸 안에 존재한다. 낙서와 만화를 가르는, 크로키와 만화를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칸이 있느냐 없느냐다. 만화 창세기를 쓴다면 ‘아마 태초에 칸이 있었다’쯤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만화가 아무 꼴을 갖추지 못하고 있을 때, 작가는 백지에 칸을 친다. 작가에 의해 칸과 여백이 갈라지면 ‘만화’라는 세계가 창조되기 시작한다.
칸은 화면이다. 작가는 화면 안에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묘사한다. 배경이나 인물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움직임이나 소리, 냄새, 기분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기호에 담아낸다. 칸과 함께 근대 만화를 끌어낸 위대한 발명은 ‘말풍선’이다. 화룡점정하듯, 말풍선 안에 대사를 써넣으면 칸이 살아난다. 이제 칸은 생명을 얻었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칸은 한 칸으로만 남지 않는다. 한 칸으로 이야기가 완결되는 카툰도 있지만, 그건 문학에서 소설과 시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카툰은 (이야기) 만화와 다른 양식이니 하나로 퉁쳐서 고민하면 답이 안 나온다. 칸은 다른 칸을 부른다. 한 칸 옆에 다른 칸이 붙으면 인간은 무의식 중에 두 칸을 이어붙인다. 1초에 수십 프레임이 쪼개져서 눈의 착각을 통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영상매체와 달리, 만화는 순전히 인간의 자발성에 의해 칸을 이어붙인다.
앞칸과 뒤칸을 잇는 자발성은 학습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라 인류의 DNA에 숨겨진 공식에 의한 것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한 칸을 읽고, 다음 칸을 기대한다. 한 칸에서 그다음 칸으로, 배워서 익힌 게 아니라 몸에 밴 습관이다. 만화를 볼 때 대부분 앞칸과 뒤칸이 잘 이어지지만 가끔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뭔가 이상한데? 좀처럼 포기하지 못하고 두 칸을 자꾸 이어가려고 한다. 동작이나 시간으로 연결이 안 되면 분위기라도 연결짓는다.
칸과 칸을 이어가는 독서는 만화 문법의 기초다. 문법 기초 없이 독해가 안 되는 것처럼, 칸과 칸을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만화맹’이다. 어느 분야라도 그렇듯이 가장 중요한 건 기초다. 만화를 처음 볼 때, 혹은 그릴 때 ‘그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화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고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아니다. 만화에서 가장 어려운 건, 칸을 만들고 그 칸을 이어가는 연출이다. 초보일수록 칸의 연결이 엉성하다. 만약 오늘 당신이 읽은 만화가 재미없었다면, 십중팔구 문제는 칸에서 비롯된다.
한 칸을 읽고 그다음 칸으로. 아주 쉬운 원칙인 듯 보인다. 하지만 당신이 그림‘만’ 잘 그려, 그 그림을 이어 만화를 그려볼 마음을 먹었다고 하자. 아무것도 없는 원고 용지와 마주하면 쉬 칸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만화 독해도 마찬가지다. 첫 칸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때론 그다음 칸이 어느 위치인지 헛갈린다. 칸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한국 만화와 미국 만화의 경우, 일본 만화는 반대), 위에서 아래로 진행한다. 옆으로 진행되는 칸이 있으면 옆이 먼저고, 그다음 아래로다. 그러니 보통 오른쪽 끝칸에서 왼쪽 아래칸으로 전개된다. 직선과 대각선, 직선 하는 식의 리듬이 나온다.
가끔 이 리듬을 깨는 연출이 보인다. 아마추어거나, 아니면 익숙한 형식을 새롭게 하려는 혁신자다. 일본 만화는 칸이 페이지에 자리잡는 순간 연출이 시작된다. 칸 모양도, 크기도 다양하다. 반면 서구 만화에서는 일부러 동일한 모양과 크기의 칸을 규칙적으로 늘어놓기도 한다. 일본 만화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좀더 차분해진다. 칸 모양이 작품의 스타일을 결정짓기도 한다. 크리스 웨어의 은 칸 연출의 ‘끝판왕’이다. 처음에는 어색하지만 금방 적응하면 재미있다. 이게 묘미다. 만화를 볼 때, 그냥 쉽게 넘어가는 칸을 유심히 보자. 칸이 만화의 알파요, 오메가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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