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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니까”

한국 과학수사의 새 장을 연 인물… 국과수 최초의 법의관 문국진 박사를 인터뷰한 <법의관이 도끼에 맞아 죽을 뻔했디>
등록 2011-10-14 18:36 수정 2020-05-03 04:26

#1. 신혼부부가 약국을 열었다. 친절하고 약값도 싸 금세 입소문이 났다. 약국은 병원에서도 고치기 힘든 병을 가진 환자들까지 모여들 정도로 손님으로 붐볐다. 하루는 간경변증으로 오래 고생하던 45살 된 남자가 약국을 찾아와 자기 목숨은 이제 이 약국에 달렸으니 제발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젊은 약사는 마침 간경변에 좋은 약이 약국에 들어와 있어 일주일치 약을 조제해줬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간 환자는 약을 먹은 뒤 외출을 하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남자는 죽고 말았다. 가족들은 약사가 약을 잘못 줘서 남자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약사 부부를 고소했다.

#2. 시골에서 상경한 K는 창경궁에 꽃구경을 갔다가 저녁 어스름에 낯선 여자와 함께 여관에 돌아왔다. 그들은 술과 안주를 시켜 먹었고, 이른 아침 여자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남자가 죽어간다고 말하며 여관 주인을 찾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K의 고향에 있었던 가족들은 여자를 추궁했다. 여자는 술을 마시며 남자와 이야기를 나눴고 잠이 들려는데 남자가 갑자기 신음하며 입에 흰 거품을 물고 있더라고 말했다.

인간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

두 개의 사망 사고가 있었다. 죽은 이의 가족들은 각각 젊은 약사 부부와 K와 함께 술을 마신 여자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정황은 이들을 살인자로 몰아세우기에 충분하다. 이럴 때, 꾹 닫힌 죽은 자의 입을 대신해 이야기해주고 부족한 정황의 틈을 메우는 역할을 하는 이가 법의학자다. 부검 결과, 첫 번째 사건에서 피를 토하고 죽은 남자는 간경화로 심한 식도정맥류가 형성돼 있었고 식도정맥류가 파열을 일으키기 직전에 우연히 약을 복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두 번째 사건은 남자의 특이체질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다. K는 봄에 꽃이 피기 시작하면 콧물·눈물을 흘리고 심하게 재채기를 하는 등 특이체질을 타고났는데 특히 메밀꽃에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한다. 매해 그는 메밀꽃을 피해 장소를 이동해 생활했다. 그런데 여관에 몸을 뉘었을 때 하필이면 베개가 메밀 껍질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메밀을 피해 상경한 남자는 결국 메밀 껍질에 의한 과민성 쇼크사로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들은 법의학자 문국진의 인터뷰집 (알마 펴냄)에 실린 문 박사의 사건 경험담 중 일부를 발췌·요약한 것이다. 그는 두 사건에서 법의학적 진단이 없었더라면 억울한 사람이 평생 살인자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세상을 떠나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죽은 자들의 변도 들어주는 역할을 하니, 법의학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동시에 대변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인터뷰집을 2008년부터 꾸준히 내오고 있는 출판사 알마에서 이번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2010년 승격) 최초의 법의관이자 국내 대학원 법의학교실 창립자인 문국진 박사의 인터뷰집을 냈다. 취재와 정리를 맡은 이는 전문 인터뷰어 강창래씨다. 저자의 저작물은 물론 관련 자료까지 샅샅이 살피고 인터뷰이에 밀착해 소통한 덕분인지, 인터뷰집은 강창래씨가 썼지만 문국진 박사의 목소리가 훨씬 강하게 울리는 듯하다. 이따금 인터뷰어는 문 박사의 발화를 통째로 옮겨놓았는데, 따옴표 안에 실린 긴 문장은 문 박사의 유장한 평안도 사투리와 청산유수 같은 언변, 오랜 세월 쌓아온 깊은 지식을 모두 담고 있었다.

문국진 박사는 국내에 법의학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에 불모의 땅을 개척했다. 주검을 부검하는 일을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법의학에 대한 인식과 배려는 전무했다. 이런 와중에 문 박사는 우연하고 강렬하게 법의학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대학 3학년 때 서울 청계천 근처를 지나는데 비가 많이 쏟아졌단다. 비가 긋기를 기다리며 헌책방에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는데 후루하다 다네모도의 라는 책이 손에 잡혔다. 이런 문장이 그의 마음을 쳤다. “사람에게 생명도 중요하지만, 권리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하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 법의학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발달된 민주국가에서만 발달한다. 따라서 법의학의 발달 정도를 보면,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이나 민주화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이 문장에 ‘홀딱 반해버린’다. 의학을 하면서도 인간의 권리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단다.

문 박사는 1955년, 한국에 국과수가 독립기관으로 업무를 시작한 그해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법의관이 된다. 그리고 자신이 법의학에 빠지게 된 초심을 잊지 않고 법의학을 바탕으로 한 증거재판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려 애썼다. 1970년대부터는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며 법의학교실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는데, 이는 법의학의 토대 마련을 넘어 당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근거로 판결을 내리곤 하던 야만적 관행을 깨트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 예로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과 폭행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법의학자 황적준 박사가 문 박사의 수제자 중 한 명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1호 법의관이었던 문국진 박사는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 법의학이다’라는 문장에 반해 법의학에 빠져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알마 제공

국립과학수사연구원 1호 법의관이었던 문국진 박사는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 법의학이다’라는 문장에 반해 법의학에 빠져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알마 제공

책을 부검하는 법의학자

문 박사는 프랑스의 법의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말한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는 법칙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사건 현장의 이후를 지키며 원통한 죽음과 억울한 누명을 밝히려 애썼다. “증거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으니까.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니까. 억울한 사람이라면 돈을 들여서 변호사를 댈 필요도 없는 거요. 법의학이 공정하게 집행되기만 한다면 말이오”라고 말하는 그는 이제 사건 현장을 떠나 더 넓은 범주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유명한 예술가들의 사인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발견한 문 박사는 요즘 책을 ‘부검’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내가 씨를 뿌려야 할 분야가 여기 하나 더 있구나, 싶었던 거디요.” 이 열정에 찬 법의학자는 남아 있는 진료 기록과 전기작가들이 조사한 예술가들의 생활상을 바탕으로 왜곡돼 전해오는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겠다는 생각에 다시금 가슴이 뛴단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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