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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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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몸으로 떠는 수다

커뮤니티 댄스 위크숍 ‘엄마와 딸’에 참가한 안인용 기자 모녀… 닮아서 더 어려운 관계 춤으로 풀다
등록 2011-04-29 17:30 수정 2020-05-03 04:26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 '엄마와 딸'에 참가한 안인용 기자 모녀가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 '엄마와 딸'에 참가한 안인용 기자 모녀가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엄마와 서른을 넘긴 딸은 서로 닮는다. 화날 때 짓는 표정이나 무뚝뚝하게 걷는 걸음걸이가 그렇다. 막 30대 중반에 접어든 엄마와 채 열 살이 되지 않은 딸도 서로 닮았다. 팔을 하늘로 치켜들 때의 손 모양이나 뛰어갈 때 다리 모양이 그렇다. 엄마와 딸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복잡한 관계다. 엄마는 딸에게서 지난날의 아련함과 앞날의 희망을 함께 보고, 딸은 엄마를 통해 부정하고 싶은 자신과 사랑하는 자신을 동시에 본다. 그리하여 평생을 싸우고 화해하고 울고 웃는 관계가 엄마와 딸이다. 함께여서 불편하지만 둘로 나뉠 수 없으면서도 마주보지 못하는 샴쌍둥이다.

서로의 상처 치유하는 ‘커뮤니티 댄스’

지난 4월20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역 5번 출구에서 엄마를 만났다. 회사에서 한창 일할 시간에 엄마를 차에 태우고 인천으로 향했다. 엄마가 차에 타자마자 입에서 엄마를 향한 불만이 튀어나왔다. “엄마, 오늘 춤추러 간다고 했잖아. 더 편한 옷 입고 오라니까.” “이거 엄청 편한 옷이야. 그리고 네가 자세히 설명해주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우리 뭐하러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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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4월18일부터 29일까지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 ‘엄마와 딸’이 진행된다. 국제무용협회한국본부와 인천아트플랫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워크숍은 커뮤니티 댄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뵌다. 커뮤니티 댄스는 사람들 사이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시키거나 유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춤으로 한국에선 아직 생소하다. ‘엄마와 딸’은 엄마와 딸의 관계를 춤과 움직임으로 들여다보는 커뮤니티 댄스로 이번 워크숍은 핀란드 안무가 한나 브로테루스가 내한해 직접 이끈다.

세상의 모든 딸, 그리고 딸을 둔 엄마라면 누구나 ‘엄마와 딸’이라는 주제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게 돼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워크숍에 관한 보도자료를 보다가 엄마와 함께 춤을 춘다는 내용에 눈길이 멈췄다. 워크숍은 7~12살 딸과 엄마 그룹, 20살 이상 성인이 된 딸과 엄마 그룹, 안무가 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된다고 했다. 30초 정도 바라보다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다른 ‘엄마-딸’의 관계가 그러하듯 애증의 역사가 있다. 철없던 시절에 반항한 상대도 엄마였고 철들고 나서 화를 내던 상대도 엄마였다. 누구보다 잘 알지만 누구보다 이해하기 힘든 상대도 엄마였다. 그렇게 30년이 지나고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됐지만 엄마는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나도 딸을 낳으면 그런 미지의 존재가 되겠지….

인천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엄마에게 ‘엄마와 딸’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엄마가 말을 시작했다. “나는 널 키우며 너와 스킨십이 없었던 게 늘 아쉬웠어. 좀더 스킨십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만약 다시 너를 키운다면 그러지 않을 거야.” 그랬다. 엄마와 누구보다 친하지만 엄마와는 늘 말로만 얘기했다. 어릴 때부터 퉁명스러운 딸이기도 했고, 엄마도 자주 안아주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엄마와 몸으로 얘기하는 춤을 함께 춘다는 게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 '엄마와 딸'에 참가한 안인용 기자 모녀가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 '엄마와 딸'에 참가한 안인용 기자 모녀가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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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아기로 돌아간 엄마

한시간을 달려 인천아트플랫폼 C동 공연장에 도착했다. 나와 엄마, 또 이번 워크숍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는 박은주씨와 어머니 한순옥씨, 안무가인 한나, 보조 안무가인 미리엄이 공연장 한가운데 모였다. 신발과 스타킹을 벗고 맨발로 공연장을 밟았다. 봄의 한가운데 숨어 있던 겨울의 냉기가 온몸에 퍼졌다. 워크숍은 매번 시작할 때마다 자기 이름을 외치고 동시에 자신의 기분을 몸으로 표현하며 시작한다.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의 기분을 팔로 큰 원을 그려 드러냈다. 엄마는 두 팔을 양쪽으로 힘껏 흔들었다. 엄마가 몸으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워크숍은 시작됐다.

“우리 모두 아기였던 때로 돌아가봐요!” 안무가인 한나가 제안했다. 모두 바닥에 누웠다. 아기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옆에 누운 엄마는 50년도 훨씬 더 지난 아기 때로 순식간에 돌아간 것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소리를 내요. 아기는 어떤 소리를 내죠?” 어쩐지 소리를 내기가 조금 쑥스러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엄마가 “앙앙앙~”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기로 돌아간 엄마는 낯설고 창피했지만 말할 수 없이 귀여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발로 걸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기처럼 뒤뚱거렸다. 한나는 “엄마가 저 앞에 있어요. 엄마에게 막 달려가는 거예요. ‘나 여기 있어요’ 소리치면서요”라고 했다. 공연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다섯 살 때 유치원에서 돌아와 엄마를 찾던 때의 기분이 딱 그랬다. 옆에서 엄마도 달려가고 있었다. 엄마 입에서 “엄마!” 소리가 나왔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떠올리고 있겠지? 엄마도 엄마를 애타게 찾는 시절이 있을 터였다.

한나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엄마의 등 뒤로 가서 엄마 등을 잡고 엄마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보라고 했다. 엄마 뒤에 서서 엄마를 꼭 잡았다. 엄마는 공연장을 누비며 춤을 췄다. 음악에 맞춰 양팔을 흔들고 리듬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엄마를 따라가는 데 급급했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엄마의 뒤를 쫓다 보니 어느새 내가 엄마의 발걸음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어른이 된 이후 엄마와는 평소에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아니, 엄마보다 앞서 걸었다. 엄마가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서로 역할을 바꿨다. 이번에는 엄마가 내 뒤에 서서 나를 잡고 따라왔다. 엄마가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혹시 엄마가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30년 동안 엄마와 나는 이렇게 서로의 등 뒤를 따라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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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상관 없는 부분이 있을까

“이번에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거예요. 엄마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며 엄마의 시선을 놓치지 마세요.” 엄마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자리에 앉았다가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나서 앞으로 뒤로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시선을 따라가느라 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엄마와 눈을 떼지 않으려고 부산히도 움직였다. 엄마가 바라보는 그곳에 내가 있었다. 엄마와 그렇게 오랫동안 눈을 맞추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숨을 헐떡대며 “엄마 나 괴롭히려고 계속 움직이는 거지?” 했더니 엄마가 “재미있잖아” 하며 킥킥댔다. 역할을 바꾼 다음 나 또한 이러저리 움직였다. 내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엄마가 있었다. 그렇게 몸으로 눈으로 수다를 떨었다.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 '엄마와 딸'에 참가한 안인용 기자 모녀가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커뮤니티 댄스 워크숍 '엄마와 딸'에 참가한 안인용 기자 모녀가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정해진 움직임이 없다. 짜인 대로 동작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게 여기서는 춤이다. 한나를 따라 조금씩 팔다리를 움직이다 보니 내 시선은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서 내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멋있거나 잘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움직였다. 이렇게 막 뛰어다녀본 게 얼마 만일까. 엄마와 손을 꼭 잡았다.

한나가 우리 모두를 자리에 앉혔다. 편하게 앉아 눈을 감으라고 했다. “어릴 때 엄마가 불러주던 노래가 있을 거예요. 딸에게 불러주던 노래도 있을 거고요. 기억나죠? 재워줄 때나 평소에 놀아주며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려보세요.” 엄마는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불러주던 젊은 시절의 엄마를 떠올렸다. 옆에 앉은 엄마가 나지막이 노래를 시작했다.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브람스의 자장가였다. 엄마의 노래를 듣던 한나가 자기 아버지도 이 자장가를 불러줬다며 신기해했다. “우리 아버지는 이 노래를 한 옥타브 내려 부르곤 했어요.” (웃음)

서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 다음 한나는 우리에게 펜과 종이를 나눠주고는 각자 ‘내 안에 없는 엄마의 모습’과 ‘엄마에게 없는 내 모습’에 대해 써보라고 제안했다. 펜을 들고 흰 종이를 내려다보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게 직업인데도 문장 대신 단어만 몇 개 튀어나왔다. 나라는 사람을 놓고 볼 때 엄마와 상관없는 부분을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그래도 쓰긴 써야하니까 몇 가지 엄마가 나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을 생각해봤다. ‘엄마에게 없는 내 모습’은 더 어려웠다. 항상 엄마보다 나는 더 많이 배우고 경험해서 분명 더 ‘나은’ 인간일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쓰려니 별다르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모두 둘러앉아 자기가 쓴 글의 일부분을 읽어내려갔다. 나는 몇 개의 단어를 얘기했다. 박은주씨 차례가 됐다. 은주씨는 종이 위에 그린, 엉킨 실타래 같은 그림을 보여주며 “나와 엄마는 모든 부분이 이렇게 엉켜 있고 뒤섞여 있다”고 말했다. 속으로 은주씨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 살인 은주씨는 엄마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참여했다고 했다. 한나는 “그렇게 서로 엉켜 있는 게 엄마와 딸의 관계”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갔다.

내가 엄마의 딸이라 다행이야

엄마와 함께 발바닥이 까매지도록 돌아다니고 나서 공연장을 나오는데 엄마도 나도 “재미있는 시간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물론 나올 때는 다시 서로 약간 거리를 두고 걷는 ‘원래’의 엄마와 딸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의 공간에 흐르는 기운은 조금 달라졌다. 팔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뛰고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글 쓰고 얘기 나눈 엄마와 나는 어쩐지 들떠 있었다. 어쩌면 엄마가 나의 엄마이고 내가 엄마의 딸이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안무가 한나 브로테루스.

안무가 한나 브로테루스.

‘엄마와 딸’ 워크숍을 핀란드에서 쭉 진행해온 한나는 모든 과정이 자신의 일상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한다. “저는 딸 하나와 아들 셋을 키워요. 딸과는 같은 성(姓)이기 때문에 참 많이 비슷해요. 외모부터 인생까지. 엄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엄마와의 관계가 수월하지 않았어요. 매일 딸과 함께, 또 엄마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관찰하는 것들을 워크숍을 통해 풀어내죠. 가장 닮았고 친밀하며 가장 오래 지속되지만 그만큼 어려운 ‘엄마와 딸’의 관계를 춤을 통해 들여다보고 싶었어요.”

열흘 동안 진행되는 ‘엄마와 딸’ 워크숍은 27일(수)과 ‘세계 춤의 날’인 29일(금) 각각 인천아트플랫폼 갤러리와 서울광장 무대에서 쇼케이스를 갖는다. 워크숍 그룹별로 진행하며 조금씩 쌓은 움직임을 연결된 춤으로 엮어 무대에 올린다. 워크숍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엄마와 딸’들은 이 쇼케이스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무대 위의 엄마들과 딸들의 몸짓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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