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경제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이다.” 올해 초 그리스를 시작으로 한 유럽의 경제위기와 최근 불거진 프랑스의 연금개혁 반대운동은 레닌의 철 지난 이 경구를 떠오르게 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본질이 결국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한 자본주의경제의 레토릭일 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이제 흔한 테제가 되었지만,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보다 더 명쾌한 ‘클리세’를 찾기란 쉽지 않다.
“‘체제의 위기’를 도모하자”
급진적인 주장과 활발한 지적 활동으로 서구 지성계에서 너른 자리를 마련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유럽 경제위기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은 바로 정치의 위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니, 정치의 위기를 넘어 체제의 위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선동한다.
그는 “현재의 위기가 제한적이고, 유럽 자본주의가 구성원에게 만족스러운 생활을 계속 보장해주리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면서 “위기가 가져올 손실이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횡포를 비판하는 많은 기사와 르포, 베스트셀러 등이 쏟아지는데도, 그 예리한 칼끝은 결코 자본주의 틀 자체에 대한 폭로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자본주의를 꾸준히 조정하는 데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런 문제의식은 세계 변혁의 주체를 자임한 좌파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다. 지젝은 좌파가 현재의 위기를 그저 정치 위기로만 인식하고 있다면서, 이런 실천적 태만의 이유를 기득권 놀음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유럽 사회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생활에 자족하면서 삶의 수준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좌파의 소시민적 욕망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들(좌파) 중 상당수는 경력을 장식하는 동시에 가슴을 뜨겁게 하기 위해, 그들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쿠바·니카라과·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그의 신랄한 비난은,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에 열광한 프랑스 좌파 지식인의 모습과 겹쳐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프랑스 좌파들의 나태와 더불어 언론의 굴종을 확인하고 싶다면 피에르 랭베르 기자의 기사를 펼쳐볼 일이다. 2004년 여름 우파 신문 가 세르주 다쇼에게 인수되면서 프랑스의 종합 일간지 대부분이 새로운 경영진에게 매각된다. 2005년 좌파 신문 은 은행 재벌 에두아르 드 로칠드가 대주주로 투자에 나서 회생했고, 중도좌파 신문 는 2009년 피에르 베르네·자비에 니엘·마티유 피가스라는 사업가 트리오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이 언론사들을 인수한 새로운 경영진은 구조적으로 적자를 피할 수 없는 미디어 업계의 조건을 바꾸는 대신, 다른 영향력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표현을 옹호하는 것이 기존 언론의 사명이었다면, 자유로운 기업인을 옹호하는 것이 새로운 미디어의 미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기사를 읽고 나면 프랑스의 연금개혁 반대시위에 대해 왜 프랑스 언론이 줄곧 시위가 수그러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는지 알 수 있다.
고은 시인의 노벨문학상 고배에 아쉬웠던 이들이나, 노벨상이 지니는 가치와 권위에 의문을 품는 이들은 전 발행인 이냐시오 라모네와 파리의 소장학자 다니 랑·질 라보의 글에 주목할 것. 먼저 라모네는 좌파에서 극우로 전향한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지적·사상적 편력을 추궁하면서, 소설이 가진 매력 뒤에 감춰진 ‘맹신론자’의 맨얼굴을 들춰낸다. 네오콘이자 이라크전 지지자인 요사의 초라한 몰골 말이다. 라모네는 바르가스 요사가 일전에 다른 작가에게 던진 “걸작은 쓴 ‘탁월한 소설가’이기는 하지만, 실제론 혐오스러운 성격의 인물”이라는 표현을 그에게 돌려주며 통쾌하게 글을 맺고 있다.
실업률 올리는 노벨경제학상?지난 10월11일 스웨덴 은행은 “시장의 작동 방식을 새로운 관점으로 규명하고, 실업에 대한 현대적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경제학자 피터 다이아몬드, 데일 모텐슨, 크리스토퍼 피사리데스에게 노벨경제학상을 수여했다. 다니 랑·질 라보는 시장 작동 방식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관점이란 결국 신고전학파의 이론이라며, 이는 노동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게임이 완전고용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신화로 귀결된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글쓴이들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은 실업률을 줄이기는커녕 더 늘리는 데 기여할 이들”이라고 말한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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