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도로·보도블록·맨홀뚜껑 등 도시의 바닥을 훑으며 디자인을 생각하다
▣ 글·사진=천경환 건축가· 저자
요즘 서울시에서 공공디자인의 개선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움직임이고 기대도 크다. 다만, 매스컴을 통해서 일반 시민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공공디자인 개선 사업의 취지가 ‘명품도시 창조’라는 다소 거창하고 피상적인 선언에 그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공공디자인 개선’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전략과 그 속에서 살아갈 대다수 시민들의 폭넓은 이해와 합의가 없다면, 일회적인 이벤트에 그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공디자인의 어떤 분야를 어떻게 개선하면 어떤 의미의 ‘명품도시’가 된다는 것인지, 그렇게 탄생될 ‘명품도시’에서 벌어질 삶의 모습은 어떠하고, 그런 삶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밀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푹 꺼진 보행로, 튀어나온 점검 뚜껑
‘거리의 바닥’에 관련된 공공디자인과 관련해 평소 갖고 있던 아쉬움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공공디자인 개선 사업의 본격적인 진행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넓고 깊은 논의의 작은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좋은 보행로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평평하고 단단해야 한다’는 것이겠다. 편하고 안전하게 걷게 한다는 것이 보행로를 조성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조건이기에 새삼스럽게 거론하기가 다소 낯 뜨겁고 민망하지만, 서울 시내에서는 이런 조건을 제대로 만족하는 길바닥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현실이다.
1.강남대로에서 찍은 사진이다. 난데없이 보행로가 푹 꺼져 있는 모습이다. 너무나도 익숙한 광경이라 새삼 문젯거리로 삼기가 꺼려질 정도이지만, 분명히 문제가 있다. 바닥에 생긴 약간의 굴곡이 당장 걸어다니기에는 크게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외로 성가신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어쩌다 비가 와서 물이 고이게 되면,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도 보행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비가 오면 거치적거리며 부딪치는 우산들 때문에 걸어다니기 불편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정신없이 걷다가 문득 발이 푹 꺼지며 고여 있는 빗물 한가운데를 밟게 된다면 기분이 나쁠 것이다.
2. 이런 장면도 많이 볼 수 있다. 거꾸로 점검 뚜껑이 길바닥보다 약간 튀어나와 있어서 주변의 바닥 표면이 언덕처럼 불쑥 솟은 모습이다. 꼭 유모차나 휠체어뿐 아니라, 요즘에는 (공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퀴 달린 가방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경우에 다소 불편과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3. 다른 재질의 포장 재료들이 만나는 접점은 표면의 고르기가 달라지면서 빗물이 고이기 쉬운 ‘상습 침수 구역’이다. 왼쪽의 돌바닥은 인근에 건물을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길바닥이고, 오른쪽 붉은 보도블록 바닥은 서울시에서 조성한 길바닥인 것으로 보인다. 조성 주체와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고르지 못한 상황’이 생긴 듯하다.
4. 표면이 고르지 않으면 비가 올 때마다 빗물이 고이게 되고, 비가 그친 뒤에는 빗물과 함께 밀려들어온 흙먼지들이 쌓이기도 한다. 그렇게 쌓인 흙먼지가 지저분하고 보기 싫다는 문제를 넘어, 안전상의 문제도 야기할 수 있다. 흙먼지가 잔뜩 쌓이다 보면 이렇게 점검 뚜껑을 가릴 수도 있는데, 자주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혹시라도 가스 폭발이나 지진 같은 재해가 일어날 경우, 점검 뚜껑이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으면 제때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할 수도 있고, 피해가 더 커질 수도 있다.
기존의 사고와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발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하고 지켜야 하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있을 때도 있다. 길바닥이 평평하고 단단하게 시공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아무리 유명하고 유능한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바닥이 ‘명품바닥’이 될 수는 없다.
만신창이가 된 맨홀 뚜껑의 경계선
길거리 바닥은 보도블록뿐 아니라 맨홀, 볼라드(차량의 진출입을 막기 위해 설치되는 장애물), 가로등, 가로수, 각종 안내판 등 다양한 시설들이 설치되는 바탕이다. 보도블록을 아무리 아름답고 탄탄하게 깔아놓아도, 앞에서 열거한 다른 아이템들과 잘 짜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바닥을 얇은 표면으로만 파악하기보다는, 지상과 지하를 무대로 역동적으로 생겨나고 없어지는 온갖 아이템들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근거로 이해해야 일관되고 정돈된 거리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
5. 둥근 맨홀 뚜껑과 각진 보도블록이 만나면서 경계가 만신창이가 된 모습이다. 필자도 도쿄의 맨홀 뚜껑과 부근 처리를 보기 전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6. 동경에서 보았던 평범한 점검 뚜껑의 모습이다. 주변의 보도블록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원을 그리며 잘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탕이 단정하니까, 가운데 있는 뚜껑도 더 예뻐 보인다. 블록을 둥글게 자르는 기계가 그렇게 비쌀 것 같진 않고, 그런 기술이 배우기 힘든 고도의 첨단기술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까지나 성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7·8. 맨홀 뚜껑이 원형일 경우에는 주변 보도블록 배열에서 약간의 어긋남이 생기는 것을 조금 이해해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정도가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맨홀 뚜껑, 신호등, 보도블록 등 각기 다른 분야의 담당자들 사이에 전혀 협의 없이 각자 따로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다른 분야의 작업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
9. 가로수 플랜트 박스 테두리가 휘어졌는데, 나중에 보도블록을 깔면서 부러지며 휘어진 테두리와의 사이를 애매하게 채워넣었다. 보도블록 시공업자와 플랜트 박스 시공업자가 각자 자기 할 일만 해버리고, 전체적인 어울림과 완성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직선의 네모난 모양의 단순한 부재들이 만나는 부분을 이렇게밖에 처리할 수 없는지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10.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다. 똑바르게 멀쩡히 흘러오던 점자 블록이 불쑥 튀어나온 볼라드를 피해서 갈지자 걸음을 하고 있다. 역시 보도블록 설치 업자와 볼라드 설치 업자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보도블록을 설치할 때, 혹은 설치하기 전에 볼라드, 맨홀, 각종 표지판의 설치와 관련된 담당자들이 모여 상의를 하면서 작업하는 것은 어떨까? 너무 사치스러운 발상일까?
11. 이런 장면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맨홀의 설치는 도시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인프라 구축의 일부인 데 비해, 보도블록 설치는 거리의 표면을 예쁘게 꾸미는 표피적인 작업이라는 관념이 강해 보인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큰 것 같다. 그래서 두 분야 사이에 협의가 잘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 분야의 설치물들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강력하고 치밀한 디자인 코디네이터의 존재가 아쉽다.
가로를 구성하는 모든 아이템들에 대한 통합적인 디자인 개발과 설치, 그리고 유지·관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이렇게 허술한 장면들이 연출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 거리의 바닥 디자인 개선과 관련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새롭고 기발한 디자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설치·관리 매뉴얼의 개발과 철저한 관리·감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깨진 유리 효과’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멀쩡한 집이라도 유리창 하나가 깨진 채 며칠 동안 방치된다면,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 버려진 집으로 오해해 쓰레기를 버리거나 함부로 돌멩이를 던져서 금세 폐허가 되다시피 변해버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뉴욕을 다시 활기차게 소생시킨 것으로 유명한 줄리아니 시장이 취임 뒤 가장 먼저 집행한 정책이 ‘그래피티(낙서) 없애기’라는, 얼핏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업이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깨진 유리엔 돌도 쉽게 던지는 법
모두가 사용하는 공공 공간인 길거리는, 허술하지 않고 만만해 보이지 않게 만들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길거리 바닥이 허술하고 느슨한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은 별다른 머뭇거림 없이 그 길거리를 함부로 대할 것이다. 거리를 깔끔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길거리에 휴지나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자는 캠페인을 골백번 벌이는 것보다, 평범한 동네 거리를 소름이 끼치도록 정교하고 짜임새 있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거리 바닥은 지하와 지상의 온갖 아이템들을 엮어내는 입체적인 바탕이기도 하지만, 인접해서 세워지는 건물들을 연결하는 매개체 구실도 한다. 평범한 길거리의 바닥에서 공공디자인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업적 과시용의 요란하고 과장된 선전과 거창한 목표보다는, 작고 사소한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실행에 대한 굳은 의지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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