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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한국어의 풍경, 한국인의 욕망

등록 2007-08-03 00:00 수정 2020-05-03 04:25

우리 언어의 자리를 되짚어보는 에세이, 고종석의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고종석의 문장은 맑다. 고종석의 문장은 문법적으로 완벽하며 쉽고 간결하다.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한국어의 어떤 경지다. 그의 글은 좀처럼 과장하거나 분노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 우리는 맵고 짠 요즘 글들에 서서히 지쳐갈 때쯤 “이젠 고종석의 글이 좋아졌어”라고 말한다. 그의 글은 우리가 철이 들면 좋아하게 되는 것들 중에 하나다.

(개마고원 펴냄)은 고종석이 에 한 해 동안 연재한 글들을 묶었다. 제목 그대로 책의 내용은 한국어를 둘러싼 다양한 풍경들이다. 제목은 김현의 유고 평론집에서 훔쳐왔다. 그리고 “말들의 풍경이 곧 욕망의 풍경”이라는 김현의 말까지 빌려온다. ‘김현, 또는 마음의 풍경화’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은 한 글쟁이가 다른 글쟁이에게 바치는 눈물겨운 찬사다. “내 글은…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지만, 그 근원은, 행복해라, 김현의 글이었다.”

이 책은 한국어의 풍경을 통해 욕망의 풍경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것은 때로는 위세로 나타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를 보자. 표준어의 패권주의는 수많은 방언들을 억누르고 한국어의 표현 가능성을 제약한다. 북한의 언어는 허영으로 가득 찬 개인숭배의 언어다. 고종석은 1979년 북한 공업출판사에서 나온 을 두고 이런 말을 한다. “거기 적힌 한국어는 가장 장식적인 한국어가 가장 조야한 한국어이자 가장 타락한 한국어라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준다.”

지은이가 일관되게 비판해온 언어민족주의도 도마 위에 오른다. 다른 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고종석은 한글학회와 한국어 운동가들이 벌여온 인위적 언어순화운동을 비판한다. 그들이 외래어를 쫓아내기 위해 만든 신조어들은 상상 속 민족과는 관련이 있을지 모르나 현실 속 민중으로부터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언어가 아니라 편협한 지식인의 언어다.” 이오덕의 작업은 ‘언어민중주의’라는 점에서 한글학회와 차별성을 가진다. 이오덕은 고유어라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말을 굳이 찾아내 쓰는 사람들을 타박했으며, ‘글의 해독’을 입지 않은 말, 민중의 구어를 소중히 여겼다. 고종석은 ‘국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시비를 건다. 자기 나라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국어’라 칭하는 곳은 일본과 한국밖에 없다. ‘국어’라는 개념은 에도시대 이래 일본의 국학자들이 중국 문화에 맞서는 자존을 학문의 밑바탕에 깔면서 사용돼왔다. 여기엔 국가주의의 충동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요즘 감정적 한국어들이 돌아다닌다. 특히 인터넷에서 그렇다. 무슨무슨 ‘빠’로 지칭되는 사람들의 집단은 그 숭배 대상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기 위해 ‘가르랑 말’을 쓴다.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듯” 호감을 사려는 언어행위다. 반면, 무슨무슨 ‘까’로 지칭되는 집단은 그 경멸 대상을 매도하기 위해 ‘으르렁 말’을 쓴다. 비아냥과 매도의 언어다. 두 언어에 담긴 의미는 개념보다 정서에 가깝다.

‘구별짓기’와 ‘차이 지우기’에 대한 분석도 재미있다. 특정한 계층(상류층)은 자신을 다른 계급과 구별해줄 수 있는 언어를 쓴다. 이것이 구별짓기다. 대중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회조건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상류층의 언어에 동화된다. 이것이 ‘차이 지우기’다. 서울내기들이 쓰는, 표준어에 포함되지 않은 서울 방언은 구별짓기의 산물이다. 지식인들이 자주 쓰는 번역 말투 역시 그렇다. 또한 어떤 말들은 사용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자리를 보여준다. 깜둥이, 흰둥이, 쪽바리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은 “제 인종주의를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특이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드러낸다. 이렇게 한 개인의 사회적 자아는 그 개인의 언어에 깊은 자국을 낸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지은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글쟁이들에 대한 단상이다. 김현, 정운영, 전혜린, 양주동, 홍승면, 서준식 등에 대한 꼼꼼한 사유들이 펼쳐져 있다. 그는 사람을 평가하는 데 매우 겸손하다. 그러나 할 말은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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