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와플 없으면 커피는 심심해

등록 2007-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길거리 천원짜리에서 아이스크림 얹은 1만원짜리로, 브런치 바람을 타고 카페를 점령해버린 와플의 세계</font>

▣ 글·사진 황선우 〈W Korea〉 피처 에디터·카페 애호가

곰보빵에 사이다 한 잔이 미팅의 필수 요소이던 시대가 있었다. 청춘들이 빵집에서 만나 고고장에서 안녕하던 70년대의 이야기다. 빵집과 고고장 세대의 아들딸들이 점령한 21세기의 카페 테이블에는, 한결 럭셔리해진 메뉴들이 올라온다.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가 담긴 머그 옆에 와플 한 접시가 자리잡는 풍경은, ‘서울, 2007년, 카페’를 키워드로 한 이미지 검색 결과로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홍익대와 압구정동, 명동이나 이태원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카페들 중 커피와 함께 먹을 만한 음식으로 와플을 파는 곳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천원의 행복’, 사과잼은 기본

카페 접시 위에 얌전히 눕기 전부터도, 급한 허기를 달래주는 길거리 음식으로 와플은 오래 활약해왔다. 붕어빵부터 계란빵과 바나나빵, 문어가 든 다코야키까지 유행 따라 뜨고 지는 다양한 경쟁자들에게 입지를 위협받기도 하지만 따끈하게 구운 둥근 빵 위에다 기다란 칼로 버터크림을 쓱쓱, 그 위에 사과 잼·시럽을 쓱쓱 발라 반으로 착 접어주는 반달 모양 와플은 ‘천원의 행복’으로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요즘엔 생크림이나 아이스크림을 넣어주는 곳도 늘고 있지만 반드시 사과잼이 들어간다는 것이 원조 길거리 와플의 불문율.

숙명여대 앞의 분식집 ‘와플하우스’는 이 길거리 간식과 흡사하게 버터와 사과잼으로 속을 바른 와플을 17년째 팔고 있는 소문난 맛집이다. 바삭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인데다 가격도 1200원으로 저렴하다. “처음에는 딸기잼이나 포도잼도 사용해봤어요. 그런데 맛이 너무 강해서 빵 자체의 맛을 못 느끼게 방해하더라고요.” 와플하우스에서 일하는 박선경씨는 무난하게 빵과 어울리는 맛과 풍미 때문이라고 사과잼을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집 와플을 더 맛있게 즐기는 요령을 하나 소개하자면, 역시 와플하우스의 명물인 딸기빙수를 함께 시켜서 쓰러질 듯 아슬아슬 높이 쌓아 나오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와플에 발라가며 먹은 다음, 반쯤 남겨 얼음이 적당히 녹기 시작한 빙수를 비비기 시작하는 것이다.

1천원짜리 와플은 카페로 들어가면서 사과잼과 결별하는 대신 몸값을 많이 올렸다. 가격은 한 접시에 6천~7천원부터 1만5천원까지 높아졌다. 대신 질적으로도 훨씬 풍성해졌다. 한 끼 식사에 비길 정도인 가격이 부담되기도 하지만 식사 대신 먹을 만큼 든든하기도 하다. 밀가루와 달걀, 우유 등의 재료를 섞어 발효시킨 반죽을 전기로 작동하는 틀 안에 넣어 구워내는데, 이 틀의 모양 때문에 벌집처럼 사각형 무늬가 찍히게 된다. 이렇게 구운 빵을 생크림이나 생과일, 견과류 또는 프리저브(잼), 아이스크림, 메이플 시럽 등의 다양한 토핑과 함께 낸다. 와플은 입으로 눈으로 두 번 즐기는 음식이기도 하다. 노릇하게 익은 빵 위에 올라가는 빨간 딸기나 초록색 키위, 가지각색의 아이스크림과 생크림들은 시각적으로도 아름답게 어울려 입맛을 돋운다. 오목하게 들어간 벌집무늬 안에 시럽이나 크림이 쏙쏙 배기 때문에 바삭하게 씹는 맛 속으로 달콤함이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깔깔한 햄이나 베이컨 대신

와플의 원조는 벨기에라고 하는데, 뭐든 서양 것들을 가져다가 자기 식으로 바꾸어내는 게 특기인데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카페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이 메뉴를 일찍이 발전시켰다. 다이칸야마의 카페 ‘Waffle’s’의 경우 음악 하는 유희열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희열 카페’로 입소문을 타며 우리나라에까지 유명해진 경우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 도쿄 여행의 필수 답사 관광 코스처럼 유행하기도 했다. 길거리 와플의 경우도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와 좀 다르게 발달해왔다. 벨기에의 노점들에서도 대개 그렇다고 하는데, 손바닥 위에 올라갈 만큼 조그만 사이즈의 빵처럼 구워 아몬드나 시럽 등을 뿌리고 한 점씩 또는 박스에 포장해서 판다. 긴자에 위치한 마네켄(www.manneken.co.jp)이 유명하며, 지하철역 안의 부스에서 방금 구워낸 와플 한 조각을 병우유와 함께 선 채로 먹고 있는 직장인들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환승역 중 하나인 JR 시부야역의 한 귀퉁이에서는 먼지 냄새 대신 언제나 고소한 와플내가 풍긴다.

서울에서 와플의 유행은 지난해 크게 유행한 브런치 트렌드와도 맞물려 일어났다. 홍대 앞 주택가에 숨은 ‘다방’(D’avant)은 브런치 붐이 본격적으로 일기 전인 2005년 여름, 홈메이드 스타일의 와플과 팬케이크를 아예 주메뉴로 구성해서 문을 연 카페다. “커피와 함께 가벼운 식사거리로 먹을 수 있으면서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음식이 와플이라고 봤어요. 브런치 트렌드를 예측했다기보다는 학생을 비롯해 아티스트라든가 프리랜서 등이 많은 홍대 주변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할 때, 늦은 아침과 점심 사이에 수요가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다방 대표 유은희씨의 말이다. 미국식 브런치라고 하면 햄이나 베이컨, 소시지와 달걀 구운 것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사실 이런 음식들은 아침에 깔깔한 혀로 맛보기에는 거하고 무겁다. 기름지기도 해서 소화도 잘 안 된다. 와플이나 팬케이크는, 폭신폭신 부드러워서 속을 긁지 않고 자극이 없으니 브런치 메뉴로 적당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청담동과 분당 정자동, 용산 아이파크몰 등에 매장을 두고 있는 카페 ‘하루에’에서도 와플을 주메뉴로 한 브런치를 팔고 있다.

샌드위치, 케이크에 비교우위!

와플을 유행시킨 원동력은 대부분 예쁘고 즐겁게 먹는 데 돈을 아끼지 않고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여자들의 취향과 마인드다. 카페 좌석을 주로 채우고, 블로그에다 카페와 와플 사진을 올리며 유행을 재생산하는 사람들이 이들이라는 걸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여자친구가 손을 끌며 데려가는데 굳이 마다할 남자도 없을 것이다.

식사 대용으로 샌드위치, 식후 디저트로서는 케이크와 경쟁할 수 있겠지만 와플은 그만의 미덕을 갖고 있다. 햄이나 베이컨, 치즈, 하다못해 참치캔이라도 재료로 들어가는 샌드위치가 동물성이고 남성적이라면, 와플은 식물성이고 여성적이다. 샌드위치를 먹는 일은 나와 샌드위치 사이의 한판 대결이다. 비어나오지 않게 한입 베어무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반면 와플은 한번에 잘라 서너 사람이 다정하게 나눠 먹을 수 있다. 토핑을 발라서 입에 쏙 넣는 것도 간편하니, 한결 우아하게 ‘관리 모드’를 지키며 먹을 수 있는 셈이다. 브런치가 단순하게 먹는 일이 아니라 ‘사교 모임’의 의미를 강하게 가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비슷하게 식사 노릇을 하더라도 와플 쪽이 브런치 시대에 살아남기 훨씬 적합한 적응력을 가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와플을 카페에서 많이 내는 각종 케이크와도 비교할 수 있겠다. 식후에 생각나는 달달한 먹을거리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대개 냉장고에 있다 차갑게 나오는 케이크에 비해서 주문받아 바로 만들어내는 와플은 따끈하고 갓 만든 맛이 좋은데다, 한결 대접받는 기분까지 난다는 점에서 비교우위에 선다.

유행이라는 와플을 한번 먹어보고 싶은 요량이 섰다면, 저마다 스타일이 다른 카페들을 검색해보고 입맛 따라 고르면 되겠다. 광화문 일민미술관 안의 카페 이마는 두툼하게 구운 둥근 와플빵 위에다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인심 좋게 얹어주는데, 취향에 따라 녹차, 바닐라, 딸기 등 아이스크림의 종류를 고를 수 있다. 별다른 조리법 없이 정직한 메뉴인데도 아이스크림의 맛이 워낙 좋기 때문에 인기인데, 거꾸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먹을 이유가 없을 듯도 싶다. ‘다방’에서는 빵 자체의 맛이 훌륭한 벨지언 와플이 추천 메뉴이며, 팥과 녹차 아이스크림이 잘 어울리는 레드빈 와플이 특이하다. ‘하루에’의 와플 에브리씽은 과일과 생크림, 아이스크림 등 그야말로 모든 토핑이 올라가서 세 사람이 나눠먹어도 배부를 정도로 푸짐하다. 청담동 디자이너스클럽 옆 언덕길에 있는 ‘버터 핑거 팬케익스’는 미국 스타일로 치즈, 햄 등과 함께 내는데 남자들도 만족할 만한 볼륨 있는 식사다.

한옥을 개조한 카페들의 밀도가 점점 촘촘해지고 있는 삼청동 역시 와플 붐을 좇아가기 바빠서, ‘빈스 빈스’와 ‘와플 카페’ 등이 와플을 메뉴에 넣고 있다. 가로수 길의 카페 ‘별’은 벨기에산 초콜릿을 사용한 초코 와플을 내면서 바나나, 아이스크림 등을 원하는 대로 섞어 먹을 수 있게 따로 담아준다. 녹차를 주메뉴로 하는 카페 ‘세이지 그린 티’, 아이스크림 전문점 배스킨라빈스의 ‘카페31’에서도 각기 주재료인 녹차와 아이스크림을 활용한 와플을 판다.

어떤 스타일이든 내 입맛대로

혹시 잘 꾸며놓은 카페에서 예쁘장하게 만들어내는 와플이 소꿉장난같이 우습거나, 관광지 기념사진 박듯이 뜬다는 카페에서 셀카 찍고 음식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일이 유치하게 여겨지거나, 1만원 안팎인 가격이 허영이거나 거품이라고 느껴진다면, 길거리 와플도 여전히 ‘현명한 선택’이다. 바삭하고 폭신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맛, 그 안에 다 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