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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요쿠르트 왔습니다

등록 2007-01-18 00:00 수정 2020-05-03 04:24

1971년 “균을 돈 내고 먹냐”에서 죽지 않는 균이 많을수록 고급 상품인 시대로…하나 얻어먹으려고 야쿠르트 아줌마를 졸졸 따라다니던 달콤한 추억을 떠올려보라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우리나라의 대중 먹을거리 역사에서 1971년은 기념비적인 해로 기억될 만하다. 1971년 10월에는 한국인의 겨울을 따뜻하게 감싸줬던 호빵이 처음 세상에 나왔고, 두 달 뒤인 12월엔 ‘국민 스넥’ 새우깡이 출시됐다. 부라보콘이 나온 것은 그보다 1년 전인 1970년 4월이고, 초코파이는 3년 뒤인 1974년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다. 1960년대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것은 각종 공업용 재료를 고급 식품으로 둔갑시킨 부정식품 업자들의 기발한 상상력이었다. 참다 못한 보건사회부는 1970년 1월10일 0시부터 보건범죄 고발센터(전화 74-2740)를 설치했고, 서울시는 그해를 부정식품 근절의 해로 선포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결코 고급이라 말할 수 없겠지만,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먹을거리가 시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보릿고개가 여전하던 1960년대를 돌파하고, ‘한강의 기적’을 향해 힘차게 첫발을 떼던 한국 사회의 발전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 변화가 아닌가 싶다. ‘야쿠르트’(야쿠르트는 제품명이고, 유산균 발효유를 일컫는 공식 명칭은 요구르트다)라는 이름의 유산균 발효유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잘살아보세’라는 희망 섞인 구호와 군사 정권의 폭압이 일상 속에 공존하던 무더웠던 그해 여름(8월)의 일이다.

새우깡·호빵과 동기동창

요구르트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것은 일본 니혼대학 농수의학부를 졸업한 뒤 서울대 수의대 교수(1950~62)를 거쳐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장을 지낸 윤쾌병(작고) 한국야쿠르트 명예회장이었다. 한국야쿠르트가 창사 25년을 기념해 1994년에 펴낸 는 “윤쾌병 박사는 건국대에 재직하던 시절부터 당시 일본에서 한창 각광을 받기 시작한 유산균 발효유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시노다 미노루(1899~1982) 박사가 개발한 특수 유산균을 이용해 만든 보건 음료 ‘야쿠르트’의 보급률이 전 인구의 12.2%에 이를 정도로 큰 각광을 받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유산균 발효유 기술이 전무했고, 새로 출시된 제품을 농수산부에서 담당할지 보건사회부에서 담당할지조차 정하지 못하던 수준이었다. 윤 회장은 1969년 청계7가에 ‘삼호유업’이란 작은 사무실을 내 시장조사에 나섰고, 사업에 대한 확신이 서자 그해 11월 서울 중구 무교동 11번지에 자본금 5천만원으로 ‘한국야쿠르트유업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일본에서 유산균 종균을 공급받는 대가로 지분 38.3%를 넘기는 합작 계약을 맺은 것은 1년쯤 뒤인 1970년 9월이다.

산고 끝에 야쿠르트가 소비자들과 첫 대면을 시작한 것은 1971년 8월이다. 기대했던 제품의 출시였지만, 시장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우유 마시기도 힘들었던 시절 아닙니까. 유산균 음료라고 하니까 무슨 균(菌)을 돈 주고 사먹느냐고 소비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해요.” 이장성 한국야쿠르트 홍보팀장의 말이다. 사업의 성패는 유산균 발효유에 익숙지 않은 주부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한국야쿠르트는 노란색 유니폼과 노란 배달차로 이제는 한 시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아쿠르트 아줌마’들을 앞세워 주부 마케팅을 시작했다.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의 야쿠르트는 빠른 속도로 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주부들에게는 아이들에게 ‘건강 음료’를 사먹인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출시 첫해 야쿠르트는 하루에 2만579병씩 팔렸지만, 5년 뒤에는 그보다 18배 많은 36만7882병, 다시 5년 뒤에는 100배 많은 215만9922병을 파는 데 성공했다. 판매 첫 달인 1971년 8월의 수금액은 127만원이었다고 한다.

야쿠르트 먹어? 좀 사나봐

첫 출시된 야쿠르트는 80㎖ 크기 플라스틱 병에 담긴 25원짜리였고, 65㎖로 줄어든 2007년 1월의 야쿠르트는 한 병에 130원이다. 1974년 첫 개통된 지하철 1호선의 기본 요금은 30원, 연탄 한 장 값은 18원, 자장면 한 그릇 값은 50원, 같은 해 10월 출시된 호빵은 20원 하던 시절이었다. 제품 개발에 이르기까지 한국야쿠르트 직원들이 겪었을 노심초사를 감안하더라도, 그때 야쿠르트는 서민들이 마시기에는 다소 비싼 가격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문에 1970~80년대 서울 변두리 골목에서는 “야쿠르트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그 집의 경제 수준을 파악하기도 했고, 그 어림짐작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확히 들어맞았다.

만만찮았던 초기 야쿠트르의 가격은 호주머니 사정이 빤하던 서민들에게 말 못할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냈다. “가격? 두말하면 뭐해. 그때 기준으로는 비쌌지.” 관악구 봉천동 은산아파트 101동에 사는 이각순(60)씨의 말이다. 그는 요즘도 야쿠르트를 배달해 먹는 야쿠르트 골수팬이다. “우리 집에 애들이 셋이거든. 몸에 좋은 거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마셨지. 그런데 집안 형편이 나빠지니까 어쩔 수 없이 끊어야겠더라고.” 소동은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야쿠르트가 마시고 싶었던 삼남매는 ‘야쿠르트 아줌마’만 나타나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곁을 떠나지 못했다. “애들이 아줌마만 오면 달려나가 같이 배달차를 끌더라고. 어린 마음에 그렇게라도 하면 야쿠르트를 공짜로 줄지 알았나 보지.” 결국 손을 든 것은 이씨였다. 삼남매는 다음날부터 다시 야쿠르트를 마실 수 있게 됐다. 그때 이씨의 막내가 올해 34살이 됐다. “자꾸 야쿠르트가 없어진다”는 주인집 아낙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두려움에 떨며 울먹이던 아이의 볼기짝을 후려치던 셋방살이 아낙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197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해태제과·남양유업·빙그레·서울우유·매일유업 등 경쟁 업체들의 카피 제품들이 쏟아졌고, 요구르트 시장은 본격적으로 경쟁 체제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오일쇼크를 무사히 넘기고 대망의 1980년대가 밝아오자,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3저 붐’을 타고 매년 8%가 넘는 고속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그에 맞게 사람들의 입맛도 까다로워졌고, 요구르트 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시는 요구르트가 지배하던 시장에 판도 변화를 가져온 것은 떠먹는 요구르트였다. 떠먹는 요구르트로 처음 소개된 것은 삼양식품이 미국의 카네이션사와 기술 제휴해 1981년 6월 내놓은 ‘요거트’였다. 그 뒤 빙그레는 1983년 10월 프랑스 소디마사와 기술 제휴해 딸기·산딸기·살구·오렌지 4가지 맛의 ‘요플레’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론칭했고, 이듬해 6월 해태유업은 ‘요러브’를 시장에 내놨다. 떠먹는 요구르트는 1㎖당 1천만 마리 이상의 유산균이 사는 마시는 요구르트보다 유산균 양이 10배 이상 많은 고급 제품이다.

떠먹는 요구르트, 다음은 기능성 요구르트

시장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는 ‘88 서울올림픽’이었다. 업계 선도기업이던 한국야쿠르트는 2년 넘는 준비 끝에 1988년 8월 떠먹는 요구르트인 ‘야쿠르트 슈퍼100’을 출시한다. 이 제품의 등장으로 고급형 떠먹는 요구르트 시장이 급성장해 1988년 기준 하루 4만3천 컵 정도 팔리던 슈퍼100은 1992년 72만4463컵으로 늘어났다.

1990년대 들어 유산균 발효유 시장은 다시 한 번 큰 변화를 보였다. ‘반짝’ 인기를 끌었던 떠먹는 요구르트가 시들해지고 기능성을 강조한 고급형 요구르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고급형 드링크 요구르트 시장의 문을 본격적으로 연 것은 1990년 출시된 남양유업의 불멸의 히트 상품 ‘불가리스’다. 불가리스는 해우소에 들어간 큰스님의 손 씻을 물을 들고 있는 동자승이 큰스님의 ‘끄~응’ 하는 몸부림에 놀라 물을 쏟고 마는 재미있는 광고로 대박을 터뜨렸다. “장이 편안해야 아침이 편안합니다”라는 불가리스의 메시지는 단순한 건강음료로 여겨졌던 요구르트가 우리 몸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일깨운 사례로 손꼽힌다.

불가리스가 처음 시장에 소개되던 1990년 당시 150㎖ 한 병의 가격은 700원이나 됐지만, 장 기능이나 변비 개선에 좋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며 여성들과 직장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최근 요구르트 시장은 기능성 강조가 극대화된 느낌이다. 장 건강 드링크 요구르트 시장에서는 ‘매치니코프’(한국야쿠르트), ‘불가리스 프라임’(남양유업), ‘쾌변’(파스퇴르), ‘프로바이오 GG’(매일유업), ‘칸’(서울우유) 등이 각축을 벌이고 있고, 위 건강 드링크 요구르트 시장에서는 ‘윌’(한국야쿠르트), ‘위력’(남양유업) ‘GUT’(매일유업), ‘위화장력’(해태유업)이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간 건강 요구르트로는 ‘쿠퍼스’(한국야쿠르트)와 ‘구트 HD-1’(매일유업), ‘헤파스’(서울우유) 등이 있다. ‘쾌변’에서 ‘불가리스’까지는 납득할 수 있지만, 전문 의약품 이름처럼 들리는 ‘구트 HD-1’에 이르면 다소 번잡스러움이 느껴진다.

추억을 담고 1조700억원 시장 규모로

1971년부터 2007년까지 37년 동안 한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어왔다. 10·26의 총소리에서 시작된 일곱 번의 대통령 교체가 있었고, 광주의 피흘림이 있었고, 1인당 국민생산은 290달러에서 2만달러 수준으로 70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빈부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고 미친 듯 오른 아파트 가격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유산균 발효유 시장은 2005년 현재 1조700억원 수준의 거대 시장으로 변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면 지금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충만했던 ‘그때 그 시절’보다 우리 삶은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은 흐르지만 추억은 남는다. 호빵과 새우깡과 쵸코파이와 브라보콘과 야쿠르트가 없었다면, 우리의 어린 시절은 우리가 지나왔던 것보다 훨씬 더 엄혹하고 암담했을 게다.



‘여사님’의 친밀 마케팅

제품 나오기 전부터 활동 시작… 평균 나이는 44.5살, 평균 소득은 월 140만원

한국 요구르트 시장의 발전은 ‘야쿠르트 아줌마’라 불리는 1970년대 값싼 여성 노동력에 빚진 바가 크다. 야쿠르트 아줌마가 첫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품이 시장에 나오기 석 달 전인 1971년 5월이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새로 나온 제품 홍보를 위해 동네 주부들을 찾아다녔고, 당시 한국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유산균 발효유를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데 큰 구실을 했다. 1971년 최초의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47명에 불과했지만, 2006년 현재 그 수는 1만3500명으로 287배나 늘었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친근한 이미지가 완성된 것은 드라마 로 큰 인기를 모았던 탤런트 태현실씨가 광고에 등장하면서부터다.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이 다른 잡상인들의 출입은 금지하고 있지만, 야쿠르트 아줌마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다(우리나라에서 야쿠르트 아줌마가 출입하지 못하는 곳은 삼성 본사 정도라고 한다). 한국야쿠르트는 제품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방문 판매원들의 이미지 관리에 심혈을 기울여왔는데, 초창기 모집 기준은 기혼자여야 한다는 것과 당시로서는 고학력인 중졸 이상의 학력이었다고 한다. 야쿠르트 아줌마의 공식 차림은 회사에서 지급하는 노란색 모자, 노란색 상의에 검은 바지, 하얀색 운동화에 짙지 않은 화장이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야쿠르트 아줌마’ 이혜숙(49)씨는 “야쿠르트 아줌마의 이미지가 좋아 이 일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구청 사회복지관에서 일하던 그는 5년 전 정리해고된 뒤 야쿠르트 아줌마의 길을 걷게 됐다. 2007년 1월10일 오전 11시, 그와 함께 마을 배달 일에 나서는데 점심 때가 가까워오자 올해 두 살 된 수한이 할머니의 “밥 먹고 가라”는 성화가 이어졌다. 소비자들은 배달을 빼먹는 경우 보급소에 항의하는 대신 “토요일에 우유 안 넣으셨던데, 어디 아프셨어요”(상민이 어머니)라는 안부 메모를 남긴다. 주민들이 야쿠르트 아줌마를 마을의 대소사를 훤히 꿰뚫는 사랑방인 동시에, 자녀 양육 문제를 상의할 수 있는 인생 선후배이자 동료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국야쿠르트가 야쿠르트 아줌마를 부르는 공식 명칭은 ‘여사님’이다. 한국야쿠르트의 전체 매출 가운데 여사님들을 통한 매출은 80% 안팎으로, 회사의 전체 조직은 여사님들의 활동을 효율적으로 지원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1992년에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포항공대 등 이른바 명문대 입학생 15명을 포함해 189명의 여사님들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자 회사가 이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기도 했다. 아이들을 집에 떨어뜨려놓고 취업 일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여사님들의 감동 수기는 너무 많아 하나하나 글로 옮겨 적기가 어렵다. 2006년 현재 여사님들의 평균 나이는 44.5살이고, 평균 소득은 월 140만원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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