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와 21세기의 단절을 그린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김기영은 스물두 살이던 1984년 겨울, 평양에서 서울로 남파된 스파이다. 그는 1995년 자신을 남으로 보낸 담당자가 숙청당하면서 북에서 잊혀진다. 2005년 영화수입업을 하는 386세대이자 아내와 고등학생 딸을 둔 가장이 된 기영은 한 통의 스팸메일을 받는다. 4번 명령. 그는 24시간 뒤에 남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북으로 귀환해야 한다. 김영하의 신작 (문학동네 펴냄)은 여기까지 흥미진진한 스파이 소설을 예고한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초반부에 재기발랄한 장르소설의 멍석을 깔아놓은 은 실은 과거와 현재에 관한, 혹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에 관한 이야기다. 김기영은 24시간 동안 자신의 잊혀진 과거를 반추하기 시작한다. 그는 주체사상과 경애하는 지도자의 은총으로 뒤덮여 있는 북한과, 지금의 남한보다는 차라리 북한을 닮아 있던 80년대의 남한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절이다. 80년대의 평행선 속에 배치돼 있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국제통화기금이 완전히 바꿔버린 21세기 남한. 소설은 이 두 시간의 축 위에서 삐걱댄다.
여기서 ‘잊혀진’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잊혀진 것들의 귀환. 김기영은 스파이다. 스파이는 과거를 감추고 있지만 과거에 지배받고 있는 존재다. 그에게 현재는 허상일 뿐이다. 과거는 그의 기원이며 종착역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인 과거를 지워버렸고, 현재라는 허상 속에서 허상의 인물로 살아왔다. 그리고 2005년 어느 날 김기영은 과거로부터 복수를 당하게 된다.
따라서 은 김기영의 비극이다. 21세기 김기영은 자신의 기원을 잃어버린 채 배가 불룩 나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의 남자로 살아왔다. 한때 열렬한 주사파이던 그의 아내도 수입차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과 젊은 대학생과의 섹스로 자신을 내던진다. 이 시간에서 삶은 모조리 가짜고, 인터넷으로 사들이는 종류의 것들 중 하나이며, 망각의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다. 김기영은 마침내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현재의 삶을 택한다. 실재의 삶이 아니라 ‘어떤 것’인 척하는 삶 속으로, 한편의 연극 같은 삶 속으로.
소설은 80년대와 21세기의 균열을 바라본다. 소설 속 인물들은 왜 과거를 망각 속으로 침몰시키려는 것일까. 왜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갈까. 그것은 과거엔 뭔가 치명적이고 불쾌한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파이는 자신의 불온한 과거를 지워버리지 않으면 현재의 삶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잊을 수 있는 과거는 없다. 다만 잊은 척하고 살아갈 뿐이다. 마치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쓰여진 것 같은 후일담. 그러나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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