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더 좋은 카메라·노트북·자전거 등을 탐하는 마니아들의 불타는 욕망
기능으로나 비용으로나 ‘하나만 찜’ 이익… 기다렸다가 한번에 명품을 질러라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정말 원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충동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중요한 것이거든요.”(제일기획의 2635세대 설문조사의 답변 중 하나)
그러다가 ‘장비병’이 생긴다. 장비병은 물론 매우 자주 ‘지름신이 강림’하는 증상을 띠는 병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지름교도’들과 다른 게 있다. 장비병은 특정 분야의 마니아 집단에서 발병한다는 특징이 있다.
장비병 환자들은 고가의 장비를 향해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고 보조 장비를 채워나간다. 그러면서 해당 분야에 대한 식견과 실력을 늘려나간다. (디지털) 카메라가 가장 대표적이고 노트북, 홈시어터 등 디지털 제품은 물론 자전거, 인라인스케이트 등 아날로그 제품에까지 이른다.
오프 모임 ‘뽐뿌질’… 입문 1~2년차에 발병
2005년 10월 경북 청송의 주산지. 일간지 기자 최아무개(30)씨는 물에 잠긴 나무 주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사진에 담으려고 꼭두새벽에 이곳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국에서 모여든 40여 명의 아마추어들로 삼각대를 세울 공간조차 없었다.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사진작가들만 찾던 곳이었다. 게다가 아마추어들의 장비는 현란하다 못해 ‘중화기’ 수준이었다. 500만~800만원이 되는 파노라마 카메라인 린호프를 든 사람도 있었다. 그는 보조용으로 보이는 니콘 카메라도 목에 걸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다가와 물어왔다. “필름을 빼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장비병의 증상은 대략 이렇다. 장비병에 걸린 마니아들은 동호회 사이트의 온라인 장터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장터 매복 모드’에 들어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라인 장터에서 사용기를 읽으며 ‘기변’(기종변경)을 궁리한다. 카메라 동호인의 경우 보디와 렌즈를 2~3개월 단위로 바꾸기 시작한다. 주로 중고를 팔아 새 제품을 구입한다. 그러다 보면 ‘파산신’이 강림하기도 한다. 파산신은 장비병이 악화될 때 강림하는 신용불량자 통고다.
인터넷 동호회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장비병은 대체로 입문기의 1~2년차들에게서 발병한다. 이들은 처음 오프 모임에 나가자마자 엄청난 ‘뽐뿌질’(마치 펌프질하는 듯한 소비 충동)을 받게 된다. 사진 6년차 박태수(40)씨의 말이다.
“처음 큰맘 먹고 카메라를 사면 가방이나 삼각대를 번들로 끼워주잖아요. 그런데 초보자가 처음 오프 모임에 나가면 일단 놀라게 되죠. 다들 10만~20만원을 훌쩍 넘는 명품 삼각대와 가방을 들고 나타나니까요.”
박씨 또한 그때부터 온라인 장터를 들락거렸다.
특히 가족이 있는 마니아들은 ‘마눌신’(마누라)과의 대결을 벌여야 한다. 박씨는 “캐논 D30을 지르고 아내에게 ‘빌린 것’이라고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장비병을 어떻게 다스릴까. 디지털 사진 커뮤니티인 SLR 클럽에선 2003년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 장비병 환자들을 반성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여러분은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냉장고가 있나요? 지난주 목요일이었습니다. 당직 근무를 마치고 들어와 소파에서 게으름을 떨고 있는데, 얼마 전 친구 집에서 본 대형 TV와 홈시어터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설거지를 하던 아내 손목을 붙잡고 이마트에 갔지요. 한참을 TV 앞에서 씨름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내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내가 저만치에서 양문형 냉장고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더군요. 슬쩍 곁눈질해보니 180만원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어서 ‘우리 집 냉장고 바꿀 때 됐지?’라고 묻자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취미 생활을 한답시고 EOS30에서 D30으로, 또 10D로 무리한 카메라 기변을 해도 잔소리 한 번 않던 아내인데….”
김아무개(37)씨는 3월8일 전화 통화에서 “결국 애지중지 아끼던 180만원짜리 캐논 렌즈를 팔아 냉장고를 샀다”고 말했다. 그 뒤 그는 장비병에서 ‘완쾌’했다. 2001년 사진 입문 뒤 꾸준히 모았던 렌즈들을 팔고 3개만 남겼고, 보디는 캐논 1D 하나로 2년을 쓰고 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렌즈를 바꾸고 반년에 한 번씩 보디를 바꾸던 장비병 시절에 견주면 괄목할 만한 개과천선이다.
저사양 번들보다 값을 깎는 실속을
전문가들은 “하나의 장비를 오래 쓰는 게 좋다”고 말한다. 장비의 장점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장비와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6개월에 한 번씩 장비를 바꾸면, 카메라는 특유의 색감을 끌어낼 수조차 없고, 오디오는 앰프의 깊은 사운드에 빠져들 여유조차 없고, 자전거는 최고 성능을 발휘하도록 길들이지 못한다. 김씨 또한 “맛만 보고 바꾸면 사진 실력이 절대 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장비 소비를 하는 데도 지혜가 필요하다. 대부분 번들로 나오는 보조 장비는 좋지 않다. 어차피 마니아의 길에 들어설 요량이라면, 최초 소비 때 저사양의 번들을 받지 않는 대신 값을 깎는 실속이 필요하다.
잦은 기기 변경은 피하는 게 좋다. 박태수씨는 “고사양의 장비를 향해 중고를 사고팔면서 사양을 높이기보다는, 상위 기종을 하나 정해두고 꾸준히 돈을 모아 한번에 사는 게 낫다”고 말한다. 돈을 들이면서 돌아가기보다는, 기다렸다가 한번에 명품을 지르라는 것이다.
인터넷 동호회에는 여러 가지 장비병 퇴치법이 올라와 있다. 대부분이 자기 암시다. △지르기 전에 통장 잔고를 확인하라 △다음 버전을 기다리라 △또 다른 비싼 장비를 점찍어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하라 △지름신 부적을 사용하라 등이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 옥션이 지난해 12월 10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41.9%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자기 암시를 한다’고 답했고, 20.2%는 ‘지난달 카드 명세서나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고 말했다. 또한 ‘지름신이 갈 때까지 다른 일에 몰두’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사람(14.6%)도 있었다.
고사양의 장비를 갖추려는 욕망은 전문가 이미지를 소비하는 행위다. 이들은 첨단 장비를 갖춤으로써 전문가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장비병은 마니아 집단의 태초와 역사를 같이한다. 그러다가 인터넷의 발달은 마니아들의 집단 소비를 융성시켰다. 장비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정보가 필수불가결한 마니아의 세계에서 정보 공유의 강력한 도구로 인터넷이 기능한 것이다.
1970년대부터 오디오에서 시작해 최근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장비를 섭렵한 김갑수(47·방송인)씨는 “비합리적인 소비를 하기 때문에 마니아는 존재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마니아들은 사람과의 유대감을 느끼듯이 장비와의 유대감을 느끼면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다. 이 영역에서조차 일상의 팍팍한 경제적 효용과 가치의 잣대를 들이대면, 즐거움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파산신’의 강림을 피하면서, 주체적인 소비를 일궈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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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기획은 1990년대 X세대라고 불렸던 지금의 26~35살의 소비행태를 분석한 2635세대 보고서에서 주체적인 소비를 이들의 주요 특징으로 꼽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는 남이 뭐라 하든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만은 감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고급품을 선호한다.
이런 현상은 같은 나이대에서라도 미혼이 더욱 강하다. 64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꼭 갖고 싶은 제품은 가격과 관계없이 구매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44%(기혼의 경우 32%)였으며,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품목에 대해서는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54%(기혼 40%)에 이르렀다.
대한상공회의소도 ‘2006년 소비시장 메가트렌드 보고서’에서 감성적 만족을 위한 소비 지출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감성 제품에 대해서는 디자인, 브랜드, 희소성을 중시하고, 생활용품에 대해서는 철저히 가격, 품질 등 실용성을 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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