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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민족적 삶’에 대하여

등록 2005-12-09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일 관계의 감춰진 고리, 재일 조선인의 삶을 보여주는 <재일한국인>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한-일 관계에서 정리할 건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시점이 됐다. 불신과 증오가 가득한 기존의 ‘교통로’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일 교류의 양이나 질이 비약적이다. 여기엔 동아시아의 고질적인 내셔널리즘이 어슬렁거린다. 그런데 한-일 관계의 문제를 생각할 때, 그 중요성에 비해 매우 적게 언급된, 그러나 모든 문제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일 조선인, 그들은 한-일의 과거이자 미래이다.

<재일한국인>(박일 지음, 전성곤 옮김, 범우 펴냄)은 재일 조선인의 세계를 ‘삶의 방법’이라는 시점에서 해독하는 책이다. 색다른 시각이나 논란거리를 제시하기보다는 재일 조선인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총체적인 모습을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책은 ‘신화’를 만든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들의 삶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투쟁과 화해로 요약될 수 있다. 소프트뱅크 사장 손정의씨는 청소년기까지 일본 이름으로 살았지만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와 사업을 시작하면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한국명으로 바꾼다.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열등감을 당당히 드러내는 행위이자 일본 사회에 ‘열림’을 요구하는 행위였다. 그는 이렇게 일본의 폐쇄적인 경제 시스템을 격파해간다. 전후 일본 스포츠의 영웅 역도산만큼 온갖 신화에 갇혀 있는 인물도 드물다. 지은이는 그에 관한 진실과 거짓말을 가려내면서, 그가 자신의 출신을 어떻게 은폐하고 드러내며 괴로워했는지 보여준다.

이어, 지은이는 설문조사를 통해 재일 조선인 2·3세의 의식을 살펴본다. 이것은 재일 조선인의 미래를 짚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다. 2·3세에 대해선 재일 조선인 사회 내부에서도 자신의 ‘민족성’을 잃어버리고 일본에 동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지은이는 신세대일수록 국가나 민족이라는 집합적 아이덴티티에서 자유롭지만, 맹목적인 ‘동화’보다는 자신의 민족적 특성도 획득해가는 매우 가변적인 존재들이라고 분석한다. 여기서 지은이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일본인과 공존할 수 있는 재일 조선인의 가능성을 애써 제시한다.

재일 조선인 운동은 민족 자결권을 요구하는 투쟁에서 일본인과 평등한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참정권 투쟁으로 발전해왔다. 즉, 총련과 민단 중심의 위로부터의 운동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으로 확대돼왔다. 참정권 운동은 특히 총련에서 ‘일본 동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지은이는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제3의 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본에서의 공존을 모색하는 이런 입장은 교육에서도 ‘민족학교’라는 격리보다는 일본 학교에서 민족교육을 강화하자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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