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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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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또 하나의 소중한 보험!

등록 2005-03-29 00:00 수정 2020-05-03 04:24

보험계약 때 유언장 쓰는 고객들… 푸르덴셜에서 시작돼 보험권으로 퍼지다 은행으로까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마지막 눈감는 날,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 준 것 없이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자신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그런 편안한 모습으로 간 듯 보이면 울지도 마시고 안타까워하지도 마세요. …영혼이 돼서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지킬 수 있는 맑은 영혼이고 싶습니다. 행복하시구요. 언제나 사랑했습니다.”

보험금 지급 때 유족들에게 전해져

미혼인 허아무개씨가 유언장을 작성한 것은 2003년 봄 어느 날이었다. 갑작스레 무슨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었고 푸르덴셜생명의 라이프플래너(LP)인 차권율씨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종신보험을 드는 김에 그동안의 생을 돌아보는 ‘사랑의 편지’ 형식의 유언장을 한번 적어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무심코 적어본 짤막한 글이 이제 허씨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귀중품이 됐다. 힘들 때마다 한번씩 꺼내보며 위안을 삼는다고 한다.

차 LP는 허씨를 비롯한 수백명에 이르는 고객의 유언장을 받아두고 있다. 보험 가입 때마다 한번씩 써보라고 권유한 결과다.

“보험급 지급 사유가 생겼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는 바람에 유족들에게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달랑 보험금만 전달되는 것보다 따뜻한 메시지가 담긴 글귀를 함께 전해줄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될 겁니다. ‘대구 지하철 사고’ 때 있었던 일인데, 회사에 있던 남편이 죽어가는 아내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해 평생 한으로 남았다지 않습니까.”

보험계약 때 유언장 형식의 글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7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푸르덴셜생명 LP인 마경석(?)씨가 종신보험 가입 때 가족에게 남기는 짤막한 글을 써보도록 권유한 게 처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마 LP가 보관 중인 보험증서 사본에는 당시 서른이었던 고객이 3살짜리 딸에게 남긴 글이 쓰여 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건강하게 자라길 바란다’고. 마씨의 영업방식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호응을 얻자 2001년부터는 유언장 형식의 글을 받는 게 푸르덴셜생명 차원의 영업 정책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보험사들에서도 이를 채택하는 분위기가 일었으며, 최근들어선 은행에서 유언장 작성·관리를 대행해주는 서비스를 도입한 사례도 있다.

김삼정 LP도 일찌감치 유언장 형식의 글을 고객들에게 써보도록 권하고 있다. 1999년 미혼인 장아무개씨의 종신보험 가입 때 ‘어머니께 드리는 글’을 받은 게 처음이었다. 초기엔 청약서 한 귀퉁이에 메시지를 남기도록 했다가 얼마 뒤부터 별도의 용지에 좀더 풍성한 내용을 담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작성된 유언장 원본은 회사에서 보관했다가 보험금 지급 때 유족에게 전해진다. 물론, 고객의 요청에 따라 고객이 직접 원본을 보관하기도 한다.

김 LP는 몇년 전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코끝이 찡해진다. 30대 여성에게서 전화를 받은 건 2003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한OO씨 아내입니다. 남편이 돌아가셨어요. 장례 치르느라 경황이 없어 이제야 전화합니다.” 한씨는 2000년 7월 김 LP를 통해 종신보험에 가입한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직원이었다. 그는 불행히도 그해 추석 즈음 경기도 포천에서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상속 절차 등 심각한 내용도 함께 작성

뜻밖의 소식을 들은 김 LP의 머릿속에는 보험 가입 때의 한씨 얼굴이 떠올랐다. 가족에게 남기는 글을 한마디 써보라는 권유에 한씨는 “꼭 써야 되느냐”라고 되묻다가 곧 진중해지더니 부인과 아이들 앞으로 몇자를 남겼다. “60살 전에 세상을 뜰 것에 대비해 보험에 든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돈인데, 살아가는 데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김 LP는 보험금 지급을 끝낸 뒤 한씨의 부인을 따로 만나 코팅한 상태로 보관해놓은 원본 유언장을 전했다. 그때까지 비교적 담담히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던 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겨진 메시지를 접한 순간 감정에 북받쳐 왈칵 울음을 쏟는 걸 보며 자신도 숙연해졌다고 한다.

유언장 작성을 권유받는 이들이 모두 선뜻 응하는 건 아니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여전한 탓에 주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권유를 받고 일단 쓰기 시작하면, 인생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장중한 내용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고 한다.

양승창(38) LP의 경험담이다.

“소개를 받아 한 부부를 고객으로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찾아가 종신보험 계약을 맺었는데, 청약서 작성 뒤에 여느 때처럼 세상을 뜨는 상황을 가정하고 유언장을 한번 써보시라고 권유를 했지요. 호기심이 발동한 부부는 종이와 볼펜을 들고 각자 방으로 부엌 식탁으로 흩어지더군요. 처음엔 장난기가 발동해 ‘잘 써봐’라며 농담을 주고받더니 갑자기 조용해지는 거예요. 다 쓰고 나왔을 땐 두 사람 모두 얼굴에 물기가 흥건하더라고요.” 양 LP는 “유언장을 쓰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삶을 한번씩 돌아보게 되는 것 같더라”고 덧붙였다.

차권율 LP가 지현이 엄마, 아빠를 방문한 2003년 2월 어느 날. 부부는 마침 심한 말다툼을 한 뒤끝이어서 집안 분위기가 싸늘했다. 어찌어찌하여 겨우 보험계약을 맺은 차 LP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라는 글귀를 담은 러브레터 양식을 내밀었다.

“사랑하는 지현 엄마에게…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혼자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험도 들고 이 글도 미리 쓰고 있어…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려….” “지현 아빠… 늘 친구같이 느껴지는 당신… 내 삶의 기둥처럼 든든한 버팀나무가 돼주는 당신….” 차 LP의 권유로 연애편지 같은 유언장을 쓴 부부는 말다툼의 기억을 뒤로 하고 나란히 손잡고 외식을 갔단다.

보험사 LP에게 맡긴 것이라고 해서 가벼운 유언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뒤에 누구를 변호사로 선임하고 상속 절차는 어떻게 하라는 심각한 내용을 날인과 함께 보험사에 남긴 예도 더러 있다.

강아무개씨 부부는 공동 명의로 A4용지 두장에 자필로 빽빽하게 쓴 유언장을 통해 “사망하거나 의식불명 상태가 7일 이상 계속될 경우 아들 OO에게 재산을 넘겨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강씨 부부는 재산관리인의 선임 때 우선순위까지 정해뒀다. 뿐만 아니라 재산관리 때 유가증권 등의 투자를 금지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키고 자필 서명과 날인을 찍어 법적 요건도 갖추었다. 어떤 계약자는 유언장에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거나 의식불명 상태가 열흘 이상 계속되면 안락사하는 데 동의한다는 비장한 내용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변호사 선임을 LP에게 맡긴다며, 보험사쪽에 전적으로 신뢰를 표시한 예도 가끔 볼 수 있다.

LP들도 유언장…일정 기간마다 수정

보험 가입자들에게 유언장 작성을 권유하는 LP들도 유언장을 써두고 있는 예가 많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일상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직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푸르덴셜 소망지점(서울 삼성동)의 신철순 지점장은 A4용지 3장에 작성한 유언장을 늘 곁에 두고 있다. 그의 유언장은 아내를 만나 부부 인연을 맺기까지 겪은 일들, 13년 동안의 부부 생활, 유빈이와 민이가 태어났을 때의 감격, 아이들에 대한 당부로 가득 차 있다. 신 지점장은 유언장 끝부분에 ‘내가 죽은 후 시신은 OO대학 병원에 실습용으로 기증하고 이후 화장을 해 가까운 납골묘에 안치해주시길 바란다’는 당부를 덧붙였다.

차권율 LP는 개인휴대단말기(PDA)에 유언장을 작성해두고 일정 기간마다 수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작성한 유언장은 컴퓨터로 옮겨져 비밀스럽게 보관된다. 유언장에는 부인과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남겨진 재산의 사용 방법까지 세부적으로 제시해놓았다. 재산 처분에서는 부인이 우선권을 갖되 일정 부분을 떼내 양가 부모를 배려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고 한다.

푸르덴셜생명에서 시작돼 보험권으로 차츰 퍼져나간 유언장 관리를 은행권으로 끌어들인 당사자는 신한은행이다. 이 은행은 2003년 5월 ‘미래안심 유언상속 관리 서비스’를 내놓았다. 주요 고객(VIP)을 상대로 하는 프라이빗뱅킹센터 전용 서비스인 이 상품은 변호사, 세무사 등과 상담을 통해 작성한 유언서를 대여금고에 보관했다가 유언에 따라 유산 배분, 상속 등의 유언 집행을 대신 처리해주도록 설계돼 있다.

최근 들어선 인터넷에서 유언장 서비스를 해주는 곳도 나타났다. 유언장닷컴(yoounjang.com)에는 1300명이 유료로 가입해 비공개 유언장을 작성해둔 것으로 알려졌으며, 10만명가량이 이 사이트를 다녀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굿바이메일(goodbyemail.com)은 생전에 전자우편으로 작성해놓은 유언을 유족에게 자동으로 전달해주는 인터넷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죽음과 유언장에 대한 터부가 조금씩 희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족에게 평생을 살아가는 힘을 준다

양승창 LP는 “유언장이 단지 상속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며 “자신의 삶을 한번 정리하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유족에게 남겨진 한마디는 평생을 살아가는 힘을 준다”고 말했다.

영화 <에비에이터>의 실제 주인공인 미국의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는 후손에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떠들썩한 유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알프레드 노벨은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돌린다는 유언장을 남겨 노벨상을 낳았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상당한 재력가였으면서도 8살 연상의 아내에게 가구 몇점만 남긴다고 유언해 냉랭했던 부부 관계를 끝내 청산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신은 어떤 유언장을 쓰고 싶은가?



유언, 법적 효력 보장받으려면…

보험계약 때 쓴 유언장의 법적 효력은 어떻게 될까?
민법(제1066~1070조)은 법적 효력을 인정받는 유언 방식으로 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필증서 △녹음 △공정증서 △비밀증서 △구수(口授)증서에 의한 유언이 그것이다. 보험 가입 때 쓰는 유언장은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에 해당한다.
민법 제1066조는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의 요건으로 △유언자가 그 전문과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날인해야 하고 △전항의 증서에 문자의 삽입, 삭제 또는 변경을 할 때는 유언자가 자서·날인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자필 서명과 날인을 하면 법적 효력을 인정받는 셈이다.
지난 2003년 11월 세상을 뜬 김운초 전 한국사회개발연구원 회장의 유언장을 둘러싸고 떠들썩한 논란이 인 이유는 서명과 날인 때문이었다. 고인은 부동산, 금전신탁, 예금 전부 등 500억원어치를 연세대에 기증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는데, 자필 글씨 외에 도장이나 서명이 없었다. 유족들은 유언장의 무효를 주장하며 소송을 냈고, 법원은 1년 만인 지난해 11월 강제조정 결정을 통해 “연세대가 부동산과 현금 7억원을 상속받고, 나머지 현금(116억여원)은 유가족이 상속받도록 하라”고 밝혔다.
가장 확실하게 법적 효력을 보장받는 방식은 공증에 의한 유언이다. 이는 ‘유언자가 증인 2인이 참여한 공증인의 면전에서 유언의 취지를 구수하고 공증인이 이를 필기 낭독해 유언자와 증인이 그 정확함을 승인한 후 각자 서명 또는 기명 날인해야 한다’는 요건을 달고 있다. 신한은행의 유언·상속관리 서비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서비스는 고객이 은행을 유언 집행자로 지정하면 변호사, 세무사, 부동산 전문가 등이 공정증서 방식에 따라 작성된 유언서에 바탕을 두고 유산 배분, 상속 등의 유언 집행을 대신 처리해주도록 설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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