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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동식물도 ‘바람’을 피울까

등록 2004-12-30 00:00 수정 2020-05-03 04:23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진화의 신비를 벗겨내는

▣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왜 고기를 즐기는 식물이 태어났을까. 판다는 곰일까 너구리일까. 소라게와 킹크랩은 왜 모양이 비슷한 걸까. 생태계의 암컷들은 ‘바람기’가 있는 걸까. 멧닭과 공작 수컷들은 왜 짝짓기를 위해 한 장소에 모여드는 걸까. 세계에서 가장 큰 생물은 무엇일까.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의 조상인가 아닌가.

(존 C. 애비스 지음, 이영완 옮김, 뜨인돌 펴냄)는 다양한 생물들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을 조근조근, 쉬운 언어로 이야기해준다. 지은이는 진화유전학자다. 생물들은 스스로를 뚜렷이 구별되도록 도와주는 무수한 유전학적 변이를 일으킨다. 진화유전학자들은 생물의 DNA와 단백질 분자를 대자연이 붙여준 ‘유전적 꼬리표’로 본다. 지은이는 이런 ‘분자 유전자 표지’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동식물들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것은 수억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흥미진진한 여행이다.

책은 ‘진화사의 괴짜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식충식물들은 덫 모양, 물주전자 모양, 끈끈이 등 수백 종이 있다. 찰스 다윈은 다양한 식충식물들이 각각 서로 다른 일반 식물의 조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화유전학자들은 이들의 DNA 염기서열에 근거한 계통도를 만들어, 다윈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옳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곰인형을 연상시키는 자이언트 판다에 대해 몇몇 과학자들은 진화상 아메리카너구리과에 가깝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 결과 자이언트 판다는 아메리카너구리보다는 곰과에서 초기에 분리돼 나온 자손임이 밝혀졌다. 해안선을 따라 땅을 파고 조용히 살아가는 소라게와 심해의 차가운 바닷물에 사는 킹크랩은 이상하게도 모두 몸의 뒷부분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DNA 염기서열을 조사해온 유전학자들은 킹크랩의 혈통이 소라게의 가계도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렇게 유전학은 진화의 신비를 풀어내는 안성맞춤의 열쇠가 된다.

지은이는 특히 동식물의 짝짓기와 임신·출산 등 ‘성생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유전자 분석에 힘입어 많은 종의 조류에서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배우자가 있는 암컷이 바람을 피우는 사실이 밝혀졌다. 생물의 성생활의 핵심은 엄청난 정력과 여러 가지 행동전략을 동원하여 ‘유전적 건강성’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유전학은 개별 생물들의 짝짓기 전략에 감춰진 비밀도 파헤친다. 멧닭과 공작 수컷들은 짝짓기를 위해 하나의 구애 장소에 모여든다. 물론 가장 멋있는 몇몇 수컷들이 암컷을 독자지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왜 가능성 없는 수컷들까지 그곳에 몰려드는 걸까. 생물학자들이 이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을 제기했지만, 결정적으로 유전학이 그 해답을 제시한다. 구애 장소에 모여드는 수컷들은 배다른 형제처럼 매우 가까운 친족이다. 시시한 수컷들은 암컷을 차지할 수는 없지만 멋있는 수컷을 도움으로써 자신들의 유전자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유전학적 세계 기록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생물은 무엇일까. 고래나 코끼리라면 시시할 것이다. 그것은 미시간주 북쪽 반도의 축축한 숲 속에 숨어 있는 100t짜리 버섯이다. 지은이는 화석에 남아 있는 유전자를 통해 생물의 과거도 밝혀낸다. 그 결과 네안데르탈인의 DNA 염기서열은 현대 인류의 유전자 변위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즉, 네안데르탈인은 우리의 조상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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