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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이야기’가 구원할 거야

등록 2004-05-20 00:00 수정 2020-05-03 04:23

철학자가 그린 자아와 타자의 공존 지도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주요 외신 사이트에 접속해보자. 어느 사이트라도 좋다. 오늘의 국제기사들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면, 우리는 애써 무시하고 있던 사실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숨쉬는 매 순간마다 세계 곳곳에서 적들의 가슴에 총알을 퍼붓고, 강간하고, 고문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공포의 심연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낯선 존재들, 즉 ‘타자’에 대응하는 인류의 가장 손쉽고 오래된 방법은,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다시 돌아온다. 폭력처럼.

사실 자아와 타자의 문제는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인간의 이성이 확장될수록 타자는 생각하는 주체의 강력한 힘, 즉 ‘자기동일성’의 체계에서 배척돼왔고, 이런 태도는 근대 계몽주의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찾아왔다. 9·11 이후 세계가 작정하듯 선과 악,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선 상황에서, 우리가 타자와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더욱 절실한 것이 되었다. (리처드 커니 지음, 개마고원 펴냄)은 우리와 타자가 공존할 수 있는 지도를 철학의 지평에서 그리려 한다. 그것은 매우 길고 힘든 과정이다.

우선, 리처드 커니는 근대철학의 반성에서 출발한 ‘포스트모더니즘 형이상학’을 존중하면서도 거부하고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타자의 재발견을 고민하면서도, 타자를 우리 내부에 가둬버리거나(정신분석학), 외부의 초월적 존재로 격상시킨다(해체주의)고 비판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타자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그렇다면 리처드 커니는 이방인·신·괴물로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 앞에 드러나는 이 무서운 존재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리처드 커니는 고대부터 계속된 ‘희생양 전략’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타자는 제단에 오른 염소 같은 존재였다. 이 염소의 목을 침으로써, 우리는 내부의 타락과 혼돈을 제거했다. 희생양은 점점 악마와 동일시됐다. 신대륙에 상륙한 서구인들은 인간이 아닌 ‘미개인’들의 머리에 뿔을 그렸다. 영화 의 외계생물과 의 커츠 대령도 희생양이었다. 이들은 우리 안의 광기와 폭력을 대신 짊어진 ‘거울 이미지’다. 즉, 타자는 우리 밖에 있으면서 우리 안에도 있다.

리처드 커니는 우리의 안과 밖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의 모습을 악·기괴함·숭고, 테러, 유령, 멜랑콜리, 잊혀진 기억, 신 등으로 변주해나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칸트·프로이트·하이데거·크리스테바·데리다·조이스 등을 인용하며 시종일관 타자를 불가해하고 소통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시도를 비판한다. 리처드 커니의 전략은 비판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리처드 커니는 ‘서사적 이해’를 제안한다. “인간의 자아는 다른 이에게서 듣고 또 남에게 말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서사적 정체성이다.” 이야기의 인물들은 무수한 고난을 겪으며 타자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우리는 타자가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짓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실천적 차원에서 끊임없이 타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이 지은이가 최종적으로 제안하는 ‘판별의 해석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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