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시대를 접은 ‘실업 선배’ 4명이 취업 전선의 후배들에게 전하는 새해 메시지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 실업 청년들이 신음하고 있는 새해를 맞으면서 이 그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띄웁니다. 오랫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 가까스로 백수시대를 접은 ‘실업 선배’ 4명이 암울했던 지난날을 견딜 수 있었던 노하우를 한 가지씩 털어놨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난 뒤 거울 한번 쓱 보고 외쳐보면 좋겠습니다. 2004년아, 올 테면 와봐라, 겁 하나도 안 난다! - 편집자 |
병든 닭은 호랑이도 안 잡아간다더라
강지호/ 29 · 2003년 건설회사 입사
1년 전인 2003년 1월쯤, 열 몇 번째 면접에서 떨어지고 난 뒤였습니다. 면접에서 떨어질 때마다 처음 가졌던 자신감은 조금씩 사라졌고, 자신감 없고 패기 없는 신입사원을 어느 회사에서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제 방에서 열심히 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얼른 컴퓨터를 끄고 토익 책을 펴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빤히 쳐다보고 계셔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는 척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가 “으이그, 이 호랭이도 안 뜯어먹게 생긴 놈아~” 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30만원이란 거금을 주시면서 나가 놀라고 하셨습니다. 멀쩡한 놈이 집에만 있으면 병난다고 하시면서….
시련 속에서 당당함 터득했다
어머니가 방에서 나가신 뒤 이 돈으로 뭘 할까 궁리하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랑이가 왜 날 안 뜯어먹을까?’ 호랑이는 아마 병든 동물은 안 먹는 모양입니다. 집에서 눈치만 보고 기죽어 있는 모습이 병든 닭같이 보였고 어머님은 그게 싫으셨던 겁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이 저에게 다시 자신감을 심어준 모양입니다. 그 이후로는 면접을 볼 때마다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고, 면접에 떨어질 때마다 합격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전공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모르면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이 책의 어디쯤에 있으며, 그 질문과 관련된 내용은 이러한 것이 있다고 아는 한도 내에서 떳떳하게 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시 열 몇번의 면접을 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어디에서든 제 자신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자기 소개를 시키더니 저에게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회사에서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며 불합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장님께 요구를 했습니다. “사장님, 왜 저한테는 질문을 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회사에서 필요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저한테도 질문을 해주십시오.” 저는 시련을 통해 이와 같은 당당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86통의 이력서를 쓰고 28번을 떨어졌습니다. 괴로워서 만취하도록 술을 먹기도 했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눈물도 흘렸습니다. 저에게도, 제 주위 사람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힘들었던 시간 동안 부모님의 사랑을 느꼈고, 자신에 대한 당당함을 얻었으며,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또한 일에 대한 소중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시련이 없었다면 몇년 뒤에 얻거나 혹은 영영 얻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그냥 다가오지 않습니다. 시련은 올 때 늘 무언가를 함께 가지고 옵니다. 저는 이미 몇 가지 선물을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선물들은 그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훗날 몇십배, 몇백배로 저에게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선물을 받을 차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싶습니까? 단, 선물이 공짜인 관계로 선물을 받은 뒤에 머리가 벗겨지는 부작용이 생긴다거나 호랑이에게 뜯어 먹히는 불상사가 일어날 경우에 대한 모든 책임은 선물을 받은 본인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실업자 도우며 실업 극복했네
김지선/ 27 · 2003년 홍보회사 입사
꼭 일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2003년 1월, 영국에서 예정했던 대학원을 채 마치지 않고 일을 하겠다며 한국에 돌아온 제게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기에는 저의 경력이 모자랐고, 저를 원하는 곳에는 그다지 맘이 내키지 않아 고민을 하다 보니, 컴퓨터 앞에서 취업 사이트를 검색하고 이력서를 내는 동안 두달이 훌쩍 지났더군요. 이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겠다는 저 스스로의 다짐이 있었지만, 회사를 다니다 공부를 더 하겠다며 떠났던 제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지켜보시던 부모님의 초조해하시는 모습은 과연 제 결정이 옳은 것이었는지 혼란에 빠지게 했지요.
준비된 자만이 원하는 일자리 찾아
그러던 중 인턴십을 지원했던 곳에서 연락이 와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인턴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저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의 미래의 동반자 재단에서 인턴을 하면서 실업 가정의 대학생들을 돕는 프로젝트에 참가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나라의 살림살이가 별로 나아지지 않아서 휴학을 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런 친구들을 돕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였기에 열정적으로 인턴십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실업 상태에 있으면서 다른 친구들을 돕는다는 것이 아이로니컬하기도 했지만, 잠시 제 문제에서 비켜서서 다른 곳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인턴을 하는 4개월 동안 저 스스로에 대한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재단의 장학금에 지원한 많은 학생들 중 자신을 가장 설득력 있게 표현한 이들에게만 장학금이 주어지는 것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적합한 준비를 해야만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내가 장학금을 타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학생들보다는, 힘들지만 난 최선을 다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친구들이 훨씬 더 호감을 준 것처럼 말이지요. 어쩌면 저는 그동안 ‘나는 이만큼 준비가 되었는데 왜 나를 알아봐주지 않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요.
아주 간단한 이치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하고 잘할 수 있는 것과는 무관한 일에 지원하고 낙방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을 볼 때 다시 한번 생각할 가치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직자들이 너도나도 자격증을 따고, 연수를 다녀오고, 학력을 높여가는 요즘 나를 돋보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지요. 홍보회사에 입사해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이 되어가는 지금 불과 몇달 전의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여러분에게 하고픈 말을 정리해보았습니다.
감사 메일로 취직의 끈을 당기고
김수현/ 28 · 2000년 광고회사, 2003년 출판사 입사, 다시 모색 중
새해라 하기에 다시 지도를 꺼내어 들여다봅니다. 나의 항해 지도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외롭고 지칠 때마다 빨간 펜으로 수정을 거듭해 어느새 붉게 헝클어졌기에 이렇게 새해라 특별한 날 진득하게 다시 검토하지 않으면 항로를 놓쳐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3년 전 제가 구직을 할 때도 이미 일자리는 귀한 것이었습니다. 전공인 이공계 관련 일자리를 두고 미디어와 관련된 다른 길들을 찾기 시작한 저에게 구직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곳의 원서는 해당 전공자 이외에는 구경하기 힘들었고, 공채는 수백 대 1의 경쟁률에 달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나를 버틴 것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자신감’ 덕분이었습니다. 서류전형에서 떨어져도, 면접에서 떨어져도, 풋내기 졸업생은 ‘그래, 나 안 뽑으면 너희 회사 손해다’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원서를 준비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자신감이 넘쳤을까 의아스럽지만, 현재 경력직 회사원이 된 나는 더 이상 그만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기에 그 시절의 제 자신이 부럽습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구직 생활에서 끈기와 열정을 갖도록 했습니다.
진심으로 대하면 마음이 통한다
그러던 와중에 제가 일자리를 얻은 결정적인 계기는 진심어린 한통의 인사 메일과 몇년 동안 조금씩 즐겨해온 일본어 덕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면접 본 광고회사가 참 인상적이어서 면접 뒤 그 마음을 담아 이메일을 한통 썼습니다. ‘참 좋았습니다. 기회가 되어 일하면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전화를 받고 다시 소개를 받아 다른 광고회사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두 회사의 사장님들은 나의 이메일을 즐겁게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이런 이메일에 기뻐하는 두분이 참 궁금하게 느껴졌지만, 어찌되었건 소박한 나의 마음이 전달되어 결국 저는 취직이 되었고, 참 기뻤습니다.
그리고 일본어. 단기간 몰아쳤던 자격요건으로서의 영어보다는, 숙제할 때 참조 문헌을 번역하기 위해 들춰보기 시작했고, 일본 탐방 준비를 위해 연습했던 일본어(일본어능력시험 또한 그저 호기심에서 준비했죠)가 정작 취업에 도움이 됐습니다. 토익은 기본이고, 다른 자격증을 많이 요구하는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이 어려움을 관통할 수 있는 진리는 알고 보면 단순한 몇 가지 원칙으로 이루어지는 것일지 모릅니다. 모든 이에게 진심어린 인사를 씩씩하게 하면 어디에선가 일자리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관심사가 있어서 도서관에 꽂힌 관련 서적을 다 읽어 내려가면 취직이 안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솔직함, 정성어림. 그리고 내가 즐거이 익혀왔고, 활용할 수 있는 것들. 그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불안 지우고 미지의 섬을 향해
인생은 짧습니다. 그래서 구직 활동의 순간들도 소중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깁니다. 그래서 조바심 내지 않고 표류의 위험 가득한 제 인생에 대해 찬찬해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학업, 졸업, 구직, 취직, 사회생활. 항해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제 항해 지도의 머나먼 신대륙에도 몇개의 단어들이 적혀 있습니다.
아, 어떻게 하면 이 무형의 섬에 도달하여 나무를 심을 수 있을까요?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섬에 가득 찬 숲을 상상해보면서 지워나가려 애쓰고 있습니다. 모두 힘을 내어 항해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넷으로 전공을 확 꺾어보니
전진희/ 28 · 2002년 IT기업 입사
제게 2000년은 ‘암울한 기억’입니다. 나름대로 괜찮다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못 잡아 가족들의 눈칫밥을 먹었던 경험 때문입니다. 1996년 대학에 입학해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놀러다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졸업이 코앞이었습니다. 학점은 대충 받아뒀는데, 남들 다 가진 토익 성적 하나 없었죠. 고민은 그제야 시작됐습니다.
‘선생님이 최고’인 줄 누가 모를까
부모님의 권유로 들어가게 된 한문학과에서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기란 쉽지 않다는 건, 일찌감치 취업준비로 고생하는 선배들을 보며 알게 됐습니다. 교육학을 부전공으로 이수해놓았고, ‘여자는 선생님이 최고’라는 부모님 말씀에 이끌려 별다른 고민 없이 임용고시를 준비했습니다. 6개월 동안 준비해 시험을 봤으나 보기 좋게 낙방했습니다. 할 수 없이 짐을 싸서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백수 생활은 시작됐습니다.
부모님은 대놓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제가 외출하는 걸 은근히 꺼리셨습니다. 서로의 소식이 빤한 조그만 소도시에서 “서울로 유학 보낸 딸이 취직도 못하고 집에서 놀고 있다”는 말을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닥치는 대로 이곳저곳 지원서를 내는 그 우울했던 시기에 게임에 미쳐 하얗게 지새운 날밤도 손꼽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조용히 혼자서 영어와 컴퓨터 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때 저를 구원한 것은 컴퓨터 학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이었습니다. 도서관에 앉아 교육학을 공부할 때는 그렇게도 지루하더니, 홈페이지를 만든다고 여기저기 인터넷 서핑도 하고, 디자인도 해보고, 프로그래밍도 할 때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 홈페이지를 완성하고, 요청하지도 않는 친구들 홈페이지까지 자진해서 만들어주느라 며칠간 밤새우며 컴퓨터와 씨름하고, 관련 서적도 사다가 읽고 하면서 ‘이 일이라면 내가 평생 즐겁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2000년은 정보기술(IT) 열풍이 한창 뜨겁던 시기였습니다. ‘옳아, 역시 인터넷이야.’
새로운 도전, 지금도 늦지 않으리
전망도 있고 적성에도 맞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체계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친구 집에 몇달간 얹혀살면서 사설 교육기관에서 6개월 과정을 수강하는 한편, 소규모 인터넷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임시직이었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 직원이 됐고, ‘한문선생님’을 고집하던 부모님도 제 노력을 이해하시고 다시 서울에 집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8개월 뒤 원하던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새옹지마’란 옛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궂은일이 나중에 기쁜 일이 된다고, 취업에 불리한 학과를 나온 탓에 아예 전공과는 생소한 분야에 도전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슬퍼하고만 있으면 그 다음에 올 좋은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놓고 준비하고 있으면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경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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