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에도 층위가 있다…글로벌, 메이저, 마이너로 나눠 내다본 2008년 트렌드
▣ 김경훈 한국트렌드연구소 소장
시작한 지 10분이 넘게 지났는데도 놀랄 일이 생기지 않거나 으스스해지지 않으면 그건 공포영화가 아니다. 혹은 요즘은 장르 혼합이 대세니까 공포를 빙자한 코미디거나…. 그러다 보니 공포영화를 볼 때면 대략 이 정도쯤 지나면 깜짝 놀랄 준비를 해야겠구나 하고 몸이 알아서 준비를 한다.
깜짝 놀라기엔 2008년은 너무 가깝네
미래라는 것도 그렇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면 갑작스런 사건들에 놀라게 되지만 막상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 사람들에겐 세계 곳곳에서 이미 1천 년 뒤 일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웬만해선 놀랄 일이 없다. 이건 미래학의 도그마다. 사람들이 놀라줘야 미래학이 진가를 발휘하는데, 한번 놀라고 나면 아무도 더는 놀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론 2천 년이나 1만 년 뒤를 얘기해야 할 것이다.
2008년이 시작됐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러니 여기에 뭔가를 덧붙인다고 해서 여기선 놀래는 재미가 없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놀랠 수는 없지만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트렌드가 뭔지에 대해 좀더 분명하게 인지할 필요는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아무리 들은 것이 많더라도 그걸 체계적으로 숙지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준비 없이 놀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공포영화 마니아처럼 놀라는 게 즐거운 분들이라면 이 글을 더는 읽지 말길 바란다.
변화가 가장 빠른 곳은 아무래도 패션 분야일 것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이란 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한국에 상륙한 청바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입고 다닌다. 일부러 바지를 박박 문질러 빛이 바래게 한다거나, 허리가 아니라 엉덩이에 걸친다거나, 바짓가랑이를 문서 파쇄기에 넣은 것처럼 갈기갈기 찢는다거나 하는 변화가 있지만 그래봤자 청바지는 청바지다.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자연이라는 물리적 환경 속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또는 법이나 제도, 관습이나 민족성은 쉽게 바꾸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길지만 한번 바뀌고 나면 거대한 물결이 이는 것들이 있다. 반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지만 그 반향은 그저 반짝하는 불꽃놀이 같은 것들도 있다. 이런 변화의 층위에 대해 알고 각각의 층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면 2008년을 준비하는 데 훨씬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변화의 층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하지만 변화의 모든 것을 세 층위로 나누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거대한 진화나 문명처럼 더 느리고 긴 변화도 있지만 일단 트렌드라는 관점에서 볼 때 비교적 주기가 짧은 변화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누는 것이다.
2020년에도 영향을 미칠 노령화, 여성, 자동화
첫째는 글로벌 메가트렌드다. 지구적 차원에서 동시성을 갖고 일어나며 변화의 생로병사 주기가 대략 50년에 걸친 거대한 변화다. 최소한 한 사람의 인생과 비교할 땐 거대한 주기가 아닐 수 없다.
둘째는 메이저 트렌드다. 이 말을 처음 듣는 분이 많을 텐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필자가 만든 조어이기 때문이다. 메이저 트렌드는 10여 년의 주기를 갖는 트렌드가 처음의 낮은 포복 단계를 벗어나 사회에 주도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트렌드를 말한다. 주류 트렌드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마이너 트렌드다. 말에서 짐작하겠지만 트렌드 생로병사 주기에서 낮은 포복 단계, 그러니까 현실 속에 징후들은 나타나고 있지만 사회적 주류가 되지는 못한 단계의 트렌드다. 하지만 이후 성장해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트렌드의 하나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다.
올 한 해의 변화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놓으면 가장 느리지만 큰 흐름을 형성하는 메가트렌드가 기본 밑그림, 그리고 메이저 트렌드가 모양과 색깔들을 정해가는 한편 마이너 트렌드는 구석진 곳에서 누군가 봐주기를 기다리는 소품이라는 식으로 미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글로벌 메가트렌드는 비단 한국에 국한된 변화가 아니다. 많은 미래학자나 트렌드 전문가, 사회비평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2000년에도 볼 수 있었고 2008년을 지나 2020년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칠 글로벌 메가트렌드는 다음과 같다.
고령화, 여성의 사회 진출, 자동화(디지털화), 아시아의 부상, 금융자본주의, 글로벌 메가시티 중심의 부 재편, 속도 전쟁.
2008년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문제들은 대부분 이들 글로벌 메가트렌드에서 기인한다. 예컨대 젊은 ‘88만원’ 세대의 등장을 보자. 이 문제는 대기업들이 자동화로 인해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인력은 덜 필요해지는 구조로 가고 있다는 점과 중국 등 저임금 노동이 이뤄지는 아시아 국가의 부상으로 한국 같은 나라는 점점 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옮겨가야 하고, 고부가가치 산업이란 결국 소수의 인재가 높은 부가가치를 올려 대부분의 부를 가져가는 고용 없는 성장, 나눔 없는 성장을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문제가 그 바탕을 이룬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디지털 통합·윤리적 소비…
따라서 2008년의 사회적 구조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글로벌 메가트렌드에 대한 이해와 영향을 인지해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메이저 트렌드다. 주류 트렌드이기에 그만큼 체감 강도가 높다. 한국 사회에서 2007년을 지나 2008년에 유력하게 볼 수 있고 2009년에도 그 방향성이 계속될 메이저 트렌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디지털 통합, 적정한 단순성, 레벨업, 활력(청춘), 안전(환경), 윤리적 소비자 등.
설명하기가 단순하지 않은 개념들인데 지면 관계상 다 설명하기는 어렵고 이 중에 디지털 통합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PC, 노트북, 휴대전화, 디지털TV,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인터넷 통신, 인터넷 프로토콜 텔레비전(IPTV), 로봇청소기 등 다양한 매체와 기기의 출현을 지켜봐왔고 그 하나하나의 출현에 재미있어하기도 하고 한숨을 짓기도 했다. 그런데 큰 흐름은 점차 이들 기기가 어느 하나, 혹은 몇 가지로 통합되는 것이다. 예컨대 노트북 하나가 다른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기능들을 다 포괄한다거나 로봇청소기가 통신이나 DMB 기능을 포함하는 것이다. 혹은 각 기기는 다 살아남지만 그 기기들을 운용하는 시스템이 통합돼 PC에서 받은 동영상을 휴대전화로 보고 다시 IPTV로 전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런 흐름을 간파하고 누가 선점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경쟁에 들어갔거나,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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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윤리적 소비자의 문제도 비록 이번 대선에서 실용의 위세에 밀렸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환경 파괴, 비윤리적 노동 착취, 소비자 기만 등의 행위를 한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에서 제외될 뿐만 아니라 점점 강화되는 각 나라의 규제에 떠밀려 조금씩 설 곳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처럼 메이저 트렌드는 사회의 핵심적인 이슈가 되면서 2008년을 사는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변화들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마이너 트렌드, 이곳은 아주 재미있는 미시적 트렌드의 세계다. 마이너 트렌드는 아직 작아서 구석에 있거나 막 고개를 드는 새싹 같은 것이다. 선견력을 가진 이들은 이 마이너 트렌드에서 큰 기회를 구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도 세상의 모든 마이너 트렌드를 봤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유심히 관찰하기만 하면 누구나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2008년을 맞아 글로벌 마켓을 조사하면서 이런 마이너 트렌드 40개를 찾아 〈눈으로 보는 글로벌 트렌드 ‘Hot Trend 40’〉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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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과학자 차우소브스키라는 이는 흥미로운 접시를 개발했다. 이름은 ‘스마트 플레이트’(smart plate)다. 여기엔 손바닥만 한 컴퓨터가 연결돼 있으며 접시에는 센서가 있다. 만약 접시의 주인이 다이어트를 결심해놓고 미리 용량을 지정해놓았다면 이 접시는 주인이 더 많은 양을 접시에 담거나 하면 “그만 먹어!”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래도 담으려고 하면 “너 다이어트 의지는 있는 거야?”라고 면박을 준다. 꼭 예전 어릴 때 잔소리하던 엄마를 닮았다. 그래서 이 접시가 내포하는 트렌드를 ‘디지털 잔소리’라고 이름지어봤다. 실제로 키나 몸무게를 입력하면 하루 수분 섭취량을 계산해 주인에게 알려주는 똑똑한 물병이나 말하는 종이로 담배갑을 만들어 담배를 피울 때마다 경고를 하는 기술도 개발돼 있다.
갈수록 강해지는 시각적 자극에서 그 강도를 더하는 마이너 트렌드도 있다. 바로 ‘루미덕트’(Lumiduct)다. 말 그대로 빛 상품이다. 필립스사가 개발한 ‘포토닉 텍스타일’이라는 상품은 잘 구부러지는 얇은 발광다이오드(LED)와 배터리를 섬유와 함께 직조해 옷을 만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으로 옷을 해 입으면 그때그때 자신의 기분을 빛 문자나 빛 그림으로 옷에 표현할 수 있고, 밤에는 누구도 그를 못 알아보는 일은 없게 할 수 있다.
빛이 나는 옷 입고 크루즈 여행
2008년부터는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크루즈 여행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바다는 영원한 판타지의 고향으로 이제 새로 태어나려 하고 있다. 이것 역시 ‘오션 라이프’라는 마이너 트렌드로 정리할 수 있다. 바쁜 생활, 그러나 자기만의 스타일이나 멋을 내고는 싶은데 시간도 감각도 없는 이들을 위해 쇼핑을 코치해주는 쇼핑 큐레이터는 어떤가? 미국의 ‘수전의 파일’이라는 사이트는 고급 라이프스타일을 엄선해 스타일에 따라 여행, 음악, 스포츠, 레스토랑, 요리 코스, 스파, 미용 등을 안내해준다. 벨기에의 한 음식점은 크레인으로 50m 상공에 식탁과 의자, 요리사까지 함께 끌어올려 저녁식사를 즐기게 해주는데 이 짜릿한 식사는 일상에 스릴을 더하려는 도시인의 욕구를 재치 있게 잡아낸 탓에 한 끼에 770만원이나 하지만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다.
그 누구도 감히 미래를 정확히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징후 속에서 미래를 살필 뿐이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이미 너무 분명해져서 미래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통해 단지 미래를 걱정하거나 공상하는 것이 아닌 지금 나의 선택을 결정한다. 미래를 고민하는 것은 현재의 선택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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