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정치자금법)가 사람을 안타까운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준석 전 바른미래당 당협위원장이 라디오 인터뷰에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한 말이다. 노 의원을 잃은 여의도 안팎에서는 ‘정치자금법이 노회찬을 죽였다’며 정치자금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현역 국회의원과 다수 의석을 가진 거대 정당에만 유리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노 의원은 유서에서 ‘드루킹’ 김동원(49)씨에게 부적절한 돈을 받았음을 인정했다. 그는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경제적공진화모임)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고 썼다. 2016년 4·13 총선거를 앞두고 정의당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이었던 노 의원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4천만원을 받아 쓴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원외 정치인·정치 신인 옥죄는 정치자금법</font></font>노 의원은 당시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신분으로 1억5천만원까지 후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문제는 경공모로부터 받은 돈이 회계 처리를 할 수 없는 불법자금이라는 점이다. 정치자금법에 따라 개인은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후원회 한 곳에 500만원까지만 기부할 수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개인이 아닌 기업이나 단체의 기부를 금지하기 때문에 단체 후원을 숨기기 위해 개인 명의로 나눠서 기부하는 이른바 ‘쪼개기 후원’도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더라도 노 의원이 경공모로부터 받은 4천만원은 명백하게 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돈이었다. 여론의 관심은 노 의원이 드루킹에게 돈을 받은 이유에 쏠렸고 경제적 어려움, 당비 충당 등 추측이 쏟아졌지만 세상을 떠난 이는 말이 없었다.
정치권에서는 현직 의원이 아니면 후원금을 모을 수 없고, 선거 기간에 돌입해 후원금을 모으더라도 선거유세 차량 마련이나 홍보물 인쇄 등 선거 용도로만 쓰도록 제한한 정치자금법이 노 의원과 같은 원외 정치인과 정치 신인의 정치활동을 어렵게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선거제도 ‘기울어진 운동장’ </font></font>한 여당 의원 보좌관은 “후원금으로 직업 정치인의 생활비를 댈 수 없는 게 큰 문제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정치인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선거를 치르느라 넉 달 동안 일을 안 하면 그동안의 생활비를 조달할 방법이 없다. 후원금을 개인 생활비로도 쓸 수 있게 (용도 제한을)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구에 사무실을 두고 운영하려면 한 달에 최소 500만∼1천만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역이 아니면 후원금을 받을 수 없기에 변호사나 의사 등 면허가 있는 사람만 국회의원이 된다. (고소득자가 아닌) 정치 신인이 선거에 나가려면 불법 정치자금을 받지 않고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선거제도는 현역 의원과 돈 있는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정치자금법이 후원금의 모금부터 용도까지 엄격히 제안한 계기는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불거졌던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차떼기 사건’이다. 한나라당이 대기업들로부터 80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트럭째 받은 사건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국회는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할 정치가 기업 입김에 왜곡되지 않도록 정치자금법을 개정했다. 그래서 기업과 단체의 후원금 기부를 금지하고 후원금 상한액을 정했다.
다시 정치자금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법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최병천 전 국회 보좌관은 “노 의원에게 돈을 준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경기고 동창인 도아무개 변호사였다. 이른바 명문대를 나온 정치인들은 돈을 잘 버는 친구와 선후배로부터 이야기가 새어나갈 부담 없이 돈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자금법이 정경유착을 막는 방향으로 개정됐지만 현실정치에서는 여전히 학벌과 인맥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이 오가고, 현실적으로 그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 보좌관은 “낙선한 정치인도, 정치 신인도 정치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지킬 수 없게 설계된 정치자금법이 노 의원을 죽게 했다”고 말했다. 정치자금법이 입법 취지를 벗어나 불공정한 경쟁 구도를 낳고 현실성이 적다는 비판이다.
정경유착을 막기 위해 2004년 재개정한 정치자금법이 국민의 의사표현 자유를 억압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됐다. 국민이 자신의 이익과 신념을 위해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있고, 지지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기부하는 행위도 넓은 의미에서는 보장받아야 할 참정권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과거 정치인의 뇌물 수수에 대한 기억 때문에 ‘정치자금은 뇌물’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정경유착 방지와 의사표현의 자유 사이 </font></font>2015년에는 정당 후원을 금지한 정치자금법 제6조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인한 정경유착의 문제는 일부 재벌 기업과 부패한 정치세력에 국한된 것이고 대다수 유권자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다. 유권자의 정치자금 기부를 통한 의사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본 것이다.
정당 후원 제도는 1980년에 도입됐다가 개정 정치자금법이 시행된 2006년부터 폐지됐고, 지난해 6월 노 의원이 법 개정안을 발의해 한 해 50억원까지 후원금을 모금할 수 있게 됐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정치자금의 유입과 사용처까지 지나치게 규제하고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의 입법 취지가 왜곡돼 되레 국민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운용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하고,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학)의 말이다. 정경유착 방지와 의사표현의 자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정치자금법의 개정 논의가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불붙고 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을들의 꿈’ 안고 그대 잘 가라
·을들이 비빌 언덕이 사라졌다
·그를 빼고 ‘생활 진보’를 논하지 말라
·법안에 아로새긴 ‘약자 보호’의 꿈
·‘떡값 검사’ 공개로 ‘검찰의 적’ 됐다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꾹꾹 눌러쓴 노란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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