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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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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빼고 ‘생활 진보’를 논하지 말라

진보정치 대중화 이끈 노회찬이 걸어온 길…

숱한 실패 뒤 ‘대중적 진보정당’ 노선 정립
등록 2018-07-31 14:28 수정 2020-05-03 04:28
7월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김진수 기자

7월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김진수 기자

지난 7월23일은 노동자와 서민의 편에 서온 노회찬 의원의 충격적인 비보가 있던 날이다. 먼저 고인이 된 노회찬 의원의 명복을 빈다. 누구보다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을 유가족과 지인들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고인의 발자취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성급한 일이다.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이 긴 시간을 두고 평가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노 의원의 족적에 대한 언급을 사양하지 못하는 것에 고인과 지인들에게 미리 용서를 구한다.

한국 진보정당사, 노회찬의 족적

촌철살인의 무기로 한국 진보정치의 대중화를 이끈 노회찬 의원. 노 의원이 걸어온 족적에 대해 용기를 내어 언급하는 것은 그와 맺은 작은 인연 때문이다. 필자는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그전에는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에서 10여 년간 활동했다. 그때 노 의원의 활동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한국 진보정당사에서 노회찬 의원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역할이 너무 크고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적 언사의 남발과 비합법적인 조직 운영에 익숙한 수많은 급진주의자와 달리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으로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으로서 누구보다 진보정치의 대중화 노선 정립과 진보정당의 제도권 진입 방식에 많은 노하우를 가진 지도자였다.

필자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 의원을 포함해 모두 10명의 국회의원이 한국 진보정당 사상 최초로 원내 진출에 성공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 덕분에 민주노동당 정책국장과 의정정책실장으로서 정치개혁운동과 의정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진보정당의 집권 가능성도 고민할 수 있었다.

필자는 노 의원이 당내 노선 갈등으로 민주노동당을 떠났을 때 함께 탈당했지만, 그와 달리 진보신당과 정의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필자는 한국 진보정당사에 영향을 끼친 노회찬의 족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동일한 출발선상에 있었던 경기고 동창생인 민주당 이종걸 의원과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한 황교안과 달리, 고인이 어떤 동기에서 엘리트 코스에서 벗어나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대 다른 출발선상에 있으면서도 유사한 진보정치 노선을 걸었던 상고 출신 변호사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활동과도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잠정적이지만 진보정당사에서 드러난 노회찬의 족적을 미리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중적 진보정치 노선을 정립한 설계자’ ‘민주노동당 대중화와 제도권 진입을 성공시킨 촉진자’ ‘1인 2표 정당명부제 개선운동의 제안자’ ‘공론의 장에서 삼성 금권정치와 싸우다 국회의원직을 잃어본 진보정치인’ ‘유머와 위트로 대중과 소통하는 촌철살인의 대중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다.

노동현장 투신으로 엘리트 의식 탈출

필자는 민노당에 참여하면서 고려대 출신인 노 의원이 어떻게 서울대 출신 인맥들과 경쟁하지 않고 협조적 관계로 지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나중에야 그가 경기고 출신임을 알게 되면서 다소 이해할 수 있었다.

노회찬이 이종걸, 황교안과 같이 경기고 출신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고 진보정치에 들어선 것은 매우 특이하게 보였다. 대체 노 의원에게 어떤 배경이 작용했던 것일까? 고인이 YTN 동영상에서 고백한 것처럼 “학생운동 당시 엘리트 의식 같은 게 있었는데, 실제 노동현장에 가서 많은 충격을 받고 바뀌었다”고 하는 데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노회찬은 엘리트의 특권의식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동현장에 투신하고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며, 그 속에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진보정치 노선을 찾으려 몸부림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인의 노동현장과 연결된 몸부림은 1988년 12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김지선씨와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당시 고인이 노동운동의 삶을 살고자 위장취업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노회찬은 자격증을 딴 뒤 서울, 경기도 부천,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취업하면서 알게 된 노동자들과 모임을 만들었고, 이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된 후 정치 모임인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출범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인민노련은, 80년대 운동의 지배적 노선이던 주체사상파(NL)와 제헌의회파(CA) 양극단의 교조주의를 극복하는 가운데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진보정당 건설을 조직의 당면 목표로 삼았다. 인민노련은 NL과 CA의 사상투쟁 속에서 실사구시적인 진보정당 운동 방향과 진보정치의 대중화 노선을 정립한다.

노회찬이 발견하고 개척한 진보정치의 대중화 노선은 1991년 7월 인민노련에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의 변경, ‘진보정당의 신노선 문서’ 채택, 민중당과 통합, 1992년 총선 실패 그리고 민중당 해산 후 1992년 4월15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결성 등 일련의 시련 속에서 더욱 명료하게 정립돼갔다.

노회찬은 진정추의 대표를 하면서 1995년 9월25일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해 진보정치연합(진정련)으로 거듭났다. 진정련의 대표인 노회찬은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보정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에 수용되면서 1997년 국민승리21이 출범했다. 노회찬은 국민승리21에서 정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자신이 벼려왔던 ‘대중적 진보정당 노선’을 설계한다.

민주노동당 선거 지휘, 원내 진출 촉진
노회찬 당시 정의당 원내대표가 지난 2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발언에서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투표용지(26번 기표)를 들고 ‘8번 기표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를 반대하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주장을 반박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노회찬 당시 정의당 원내대표가 지난 2월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발언에서 2016년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투표용지(26번 기표)를 들고 ‘8번 기표의 어려움’을 얘기하며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를 반대하는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주장을 반박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노회찬은 인민노련, 한국노동당, 통합민중당, 진정추, 진정련, 국민승리21 등 자신이 경험한 수많은 조직의 건설과 선거 실패에서 배우고 성장했다. 노회찬은 숱한 시련과의 싸움에서 진보정당을 노동자 조직 속에 뿌리내리고 대중적 지지를 통해 원내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승리21은 1998년 6월4일 대한민국 제2회 지방선거에서 23명의 당선자를 내 이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노회찬은 2000년 16대 총선, 2002년 지방선거, 2004년 17대 총선에서 사무총장과 선대본부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이 치른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제도권 정치를 향한 노회찬의 발걸음은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안착했으며, 비례대표 8번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더욱 탄력을 받았다. 노회찬은 총선 때 열린 방송사들의 각종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촌철살인과 함께 유머러스한 말로 단숨에 유명인이 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파란을 일으킨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득표율 13%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원내 3위 정당 자리에 올랐다. 이같은 극적인 결과는 2001년 헌법재판소가 비례대표 의석을 지역구 후보의 총득표수에 따라 나누는 ‘1인 1표 비례대표제’에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가능해졌다. 위헌결정에 따라 2002년 선거법을 개정, 지금의 ‘1인 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2000년 2월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하면서 기존 비례대표 의원 선출 방식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기존 방식은 별도의 정당투표를 하지 않고 지역구 출마자의 득표를 합산해 비례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역구 후보에게 던진 표를 통한 간접투표이므로 ‘직접’투표라는 헌법 규정에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노회찬의 1인 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제안운동을 2001년 7월19일 헌법재판소가 받아들였고 2002년 3월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지방선거에 처음 정당명부제도가 도입됐고, 이후 2004년 총선에서 1인 2표 정당명부제가 제도화하며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에 결정적 계기로 작동했다.

고인의 죽음이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유사점은 첫째, 양쪽 모두 입담과 토론 능력으로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노무현이 거침없는 언변과 감성적 접근에 탁월했다면, 노회찬은 유머로 이성적 접근에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양쪽 모두 지역주의 청산과 정치개혁에 나섰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 정당 민주화와 상향식 공천 개혁에 앞장섰다. 노회찬은 당원 중심의 대중 정당화와 당원공천제를 주장한 반면, 노무현은 의원들의 자율성을 기반으로 원내 정당화와 일반 유권자들도 정당 공천에 참여하는 국민참여경선제를 주장했다.

진보정치가로서 노회찬과 노무현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차이점도 있다. 두 사람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차이를 보였다. 노회찬은 2007년 4월10일 한-미 FTA 협상의 주역인 노무현 대통령을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비판했다.

하지만 노무현은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유작인 에서 정통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비판하지만, 진보가 ‘진보 원리주의’라는 정통 구진보좌파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되며, 시장을 인정하는 ‘제3의 길’과 같은 신진보를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회찬의 멈춤과 당의 미래

그렇다면 노무현과 노회찬 양자의 차이는 왜,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꿈꾼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정한 세상, 정의로운 세상이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선 그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야만 한 현실이다.

노회찬 의원은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애원했다. 노회찬 의원은 왜 극단을 선택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의 핵심은 자신의 실수로 일생 동안 가꿔온 진보정당과 정의당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정의당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노회찬은 진보정당사의 상징적인 대중정치인으로서 자신이 일생을 건 수많은 조직활동의 경험과 시련의 노하우를 통해 진보정당을 대중화하고, 진보정치를 지금의 위치까지 올려놓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여기서 멈춤으로써 이후 진보정당의 미래가 성공할지 장담하기 어렵게 되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비교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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