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에서 이까지(여기까지) 걸어오는 데는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서민들·노동자·농민 대표가 이까지 오는 데 사실 50년이 걸렸어요. 걸어서 5분이면 올 거리를, 차로는 1분일 것이고… 정치적으로 오는 데는 50년이 걸렸어요.”
7월26일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추도식이 열린 연세대 대강당에 걸린 스크린에 2004년 5월31일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신분으로 첫 등원을 하며 국회 본청 계단을 오르는 그의 모습이 나왔다. 그는 방송카메라에 ‘5분이면 올 거리를’이란 말을 몇 차례 반복하며 진보정당의 첫 원내 입성의 의미를 강조했다. 1600여 석 규모의 대강당을 가득 메운 이들과 대강당 밖 공터에서 스크린으로 지켜보던 1천여 시민들은 한숨을 쉬며 눈물을 찍어냈다.
“우리를 대변할 의원들이 한두 명만 있으면 좋겠다”는 ‘을들의 염원’을 어깨에 지고 국회로 들어간 진보정당은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며 때로 희극을, 때로 비극을 연출했다. 파도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그 역시 갈팡질팡할 때가 있었고,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국회 첫 출근 때의 마음을 잊지 않은 듯했다. 그가 떠난 뒤 <한겨레21>이 만난 ‘을’들에게 ‘노회찬’이라는 존재는 ‘지름길’이자 ‘통역기’였다. 서민과 약자가 가기엔 멀기만 한 국회로 가는 길의 거리를 좁혔고, 대부분 외면하던 약자와 소수자들의 호소를 번역해 국회와 정부에 전달했다. ‘을’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되뇌었다. “우리가 비빌 언덕 하나가 사라졌다.”
말하는 사람에 앞서 ‘듣는 사람’
노회찬은 특유의 유머와 촌철살인이 담긴 입담으로 상징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을’들에게 그는 말하는 사람에 앞서 ‘듣는 사람’이었다. 7월24일 아침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박김영희(57)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는 조문하면서도 “이게 사실인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1995년 “몸도 불편한 여자애가 집에나 있지 왜 나가냐”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밖으로 나왔고, 20여 년을 장애 인권과 장애여성 인권 운동에 매달렸다. 그에게 국회는 손에 잡히지 않는 존재였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했다는 뉴스도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와 저상버스 도입 등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몇 년간 거리를 전전했을 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국회의원이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당시 장애인 단체들은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과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에 매달렸다. 특히 장애 문제를 동정과 시혜가 아닌 인권 문제로 규정하기 위해 법무부를 담당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다루기를 원했다. “당시 노회찬 의원이 법사위 소속이었어요. 저희가 국회를 찾아가 장애 문제를 인권 관점으로 다뤄야 한다고 이야기하니까 한참을 들으시더니 ‘여러분 말이 맞습니다’라고 바로 동의하시더라고요.” 노회찬은 2005년 9월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발의해, 2007년 법 제정의 주춧돌을 놨다. 박김영희 대표는 2008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2008년 진보신당 부대표를 지내는 등 잠시 노회찬과 같은 배를 탄 적이 있다. “말로 챙기시는 분이 아니었어요. 어디 행사나 회의를 가면 말없이 (휠체어 진입에 방해되는) 의자를 치워놓고, 장애물이 있으면 조용히 옮겨놓으시고….”
노동운동에 반평생을 바친 노회찬은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생소할 수도 있는 장애와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 문제를 꾸준히 챙겼다. 그 배경에는 지금도 우리 사회가 낯설어하는 성소수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일찍부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은’ 그의 노력이 있었다. 심기용(25)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노회찬과 개인적 인연은 없지만 빈소가 차려진 첫날인 7월23일 조문을 갔다. 정치인 조문은 처음이었다. “개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성소수자 단체와 꾸준히 교류하셨어요.”
국회 청소노동자에게 “사무실 같이 쓰자”
올해 초 국회에서 개헌이 논의될 때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동성애 합법화를 저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는 상황에서도 노회찬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과거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2006년), 성소수자 차별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차별금지법’(2008년)을 대표발의한 것 역시 그 노력의 결과물이다. “법안을 발의할 때도 항상 먼저 성소수자 당사자나 단체를 만나서 이야기 나누시고, 성소수자 인권 강의를 하면 꼭 들으러 오셨다고 해요. 듣고 나면 ‘내가 좀더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이야기했다고 해요.” 노회찬의 빈소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등의 이름이 쓰인 근조화환이 놓였고, 방송인 하리수씨 등 여러 성소수자들이 그의 마지막을 애도했다.
국회 청소노동자들에게도 노회찬은 같이 밥 먹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다. 2016년 4·13 총선 이후 국회사무처는 국회의사당 본청 2층에 있던 남·여 휴게실과 노조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했다. 본청 내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사무실과 휴게실을 내주면 청소노동자가 쉴 공간이 없었다. “당시 노 의원과 점심을 먹던 중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노 의원은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더니 ‘내 사무실이라도 같이 쓰자’고 말씀하셨어요.” 다행히 휴게공간은 지켰지만, 김영숙(63) 국회 환경노동조합 위원장은 노회찬의 그 한마디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청소노동자 19명은 7월27일 국회를 찾은 노회찬의 운구 행렬을 나란히 서서 눈물 속에 배웅했다.
노회찬의 달변은 결국 끊임없는 ‘듣기’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는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는 수단이다. 몇몇 국회의원이 ‘기득권의 언어’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노회찬에게 말하기란 ‘을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갑들의 횡포’를 막는 무기였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의 방패
2009년 1월 ‘용산 참사’로 숨진 이상림씨의 며느리 정영신(46)씨는 용산 참사를 다룬 MBC <100분 토론> 방송 하루 전날인 2009년 1월21일 노회찬을 처음 만났다. 노회찬(당시 진보신당 대표)이 정영신씨와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 의장을 만나러 왔다. 남편은 사건 당시 부상으로 병원에 있었다. “사실 노 의원을 만나기 전까지는 마음을 열지 못했어요. 정치도 정치인도 모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고통을 겪지 않은 정치인이 과연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거리감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들의 대화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1월22일 밤에 진행된 토론에서 노회찬은 말했다. 아니 절규했다. “그분들이 여기 왜 올라갔느냐. 반국가 단체냐, 봉기하려고 올라갔느냐. 살려고 갔습니다. 자구책으로 물품을 가져간 것이고, 경찰·깡패가 설치지 않았으면 왜 던졌겠습니까. 화염병 얘기는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정영신씨는 “노 대표는 평범한 이들이 왜 화염병을 던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날카롭고 시원하게 물었다. ‘인간이 인간을 폭력적으로 진압해서는 안 된다’고 쉽고 친절하게 설명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우리는 그때 테러리스트, 화염병을 던지는 폭력적인 사람들로 비쳤어요.”
이후 노회찬은 용산 참사 유가족들을 벼랑으로 몰아세우던 이명박 정부와 공권력에 대항해 ‘방패’가 됐다. 2009년 7월18일 노회찬과 유가족들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서울광장에서 청와대로 삼보일배에 나섰다. 폭우가 쏟아졌다. “누가 비옷을 건넸는데 한사코 거절하시고 굵은 빗줄기를 그대로 맞으시더라고요.” 유가족들의 어린 자녀들은 아버지·어머니·할아버지·할머니의 모습을 영상으로 지켜봤다. 경찰들이 가족들을 끌어냈다. “어머니들한테 손대지 마라!” 정영신씨는 “아무 말 없던 노 대표가 처음으로 격앙된 순간이었다. 그도 끌려나가던 참이었다. 그 모습을 속절없이 바라봐야 했다”고 고개를 떨궜다. 정영신씨는 7월24일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상정 의원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노 의원을) 정말 다시 뵙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7년 넘게 투쟁을 이어가는 도성대(54)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지회장에게 노회찬은 국정감사 때마다 정부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확성기’였다. ‘창조컨설팅 노조 파괴’로 상징되는 유성기업 사태 해결을 위해 노동자들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들의 방을 찾았다. 의원실 사서함마다 유인물을 넣어놨다. “우리는 무조건 찾아갔어요. 새누리당(자유한국당)만 빼고 많은 의원이 도와주셨어요. 근데 대부분 국정감사 때 문제 제기 한 번 하고 끝이더라고요. 책임진다더니… 뉴스거리가 안 돼서 그러나.” 끝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국감 때마다 문제를 제기한 것은 노회찬과 다른 정의당 의원,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었다고 한다.
반올림과 KTX 승무원에 축하인사 준비했지만…
2017년 10월12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노회찬은 유성기업을 비롯해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여러 소송을 언급하며 “대법원이 판결을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넘게 미루며, 노동자들의 고통을 가중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법원행정처장에게 물었다. 유성기업 노조가 불법 직장폐쇄 기간에 미지급한 임금을 달라고 제기한 소송은 당시 대법원에서 3년4개월간 계류 중이었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이 될 수 있으면 국민 권리를 위해 신속하게 재판을 마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대단히 송구하게 생각한다”고 자세를 낮췄다. 도성대 지회장은 “내가 모든 청문회 국감장을 찾아다녔는데 노 의원은 매년 국감에서 구체적으로 우리 문제를 말씀하셨다. 속이 시원했다. 국회를 가도 식구처럼 맞아주는 데는 노 의원실이나 정의당 의원실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회찬은 애초 7월23일 오전 정의당 상무위원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회의에서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가 조정 합의에 이른 것에 대해 ‘반올림’에 감사의 뜻을, 코레일 사원으로 복직하는 180여 명의 KTX 승무원 노동자에게 축하를 전하는 메시지를 준비했지만 결국 글만 남았다. 25일 오후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인근 반올림 농성장에서 열린 농성 해단식에서 만난 이종란 반올림 상임활동가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63) 반올림 대표도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했다.
“삼성을 상대로 싸우는 의원들이 없을 때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려 애쓰셨다.”(이종란) “살아 계셨으면 해단식에 오셔서 반올림이 여태까지 싸워온 이야기나 삼성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하셨을 텐데….”(황상기)
그는 묻히고 을들은 다시 일상으로
노회찬은 7월27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잠들었다. 그가 귀 기울였던 ‘을’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아직도 장애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지하철 리프트,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싸워야 한다. 여전히 억대의 손해배상 소송 소장을 보내는 회사에, 철거민 진압작전을 지휘했지만 정치인이 돼 개발사업을 다루는 국토교통위원회에 배정된 한 의원을 보며 분노한다. 그래도 이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에 쉽게 답을 못 내리는 듯했다. “앞으로 누구한테 우리 이야기를 하지?”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변지민 기자
조윤영 기자
곽효원 교육연수생
·‘을들의 꿈’ 안고 그대 잘 가라
·그를 빼고 ‘생활 진보’를 논하지 말라
·법안에 아로새긴 ‘약자 보호’의 꿈
·‘떡값 검사’ 공개로 ‘검찰의 적’ 됐다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꾹꾹 눌러쓴 노란 그리움
·노회찬 옭아맨 정치자금법 개정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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