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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분” 최태민

박정희 ‘친국’, 출산 루머 등 수많은 의혹에도 내치지 못한 이유
등록 2016-11-01 17:46 수정 2020-05-03 04:28
2부_비극의 뿌리 최태민
박근혜는 1988년 자서전에서 최태민 일가에 대한 깊은 신뢰의 감정을 드러냈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번 배신하고 나면 그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순수한 마음 하나로 함께한 그분들이야말로 진정 용기와 소신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1975년 5월4일 최태민(왼쪽)이 23살이던 영애 박근혜(가운데)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섰다(위쪽 사진). 이날 최태민은 자신이 준비한 ‘구국기도회’에서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는 박근혜 당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KBS 방송화면 갈무리, 연합뉴스

1975년 5월4일 최태민(왼쪽)이 23살이던 영애 박근혜(가운데)와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섰다(위쪽 사진). 이날 최태민은 자신이 준비한 ‘구국기도회’에서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대한구국선교단 야간진료센터를 방문해 최태민 총재(오른쪽)와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는 박근혜 당시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 KBS 방송화면 갈무리, 연합뉴스

결국 ‘최태민’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를 총탄에 잃고 슬픔에 잠겨 지내던 23살 박근혜가 1975년 목사를 사칭한 63살의 최태민을 처음 만난 이후부터 ‘박근혜’ 뒤에는 늘 ‘최태민’이라는 이름이 함께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졌을 때 김재규는 범행의 간접적 이유로 최태민을 거론했다. 1980년대 육영재단 문제로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을 빚은 박 대통령의 형제도 그 원인으로 최태민을 지목했다. 1994년 최태민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 이름은 이후에도 박근혜 대통령 뒤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2007년과 2012년 두 번의 대선 경선에서 최태민은 어김없이 ‘의혹’의 꼬리표를 달고 나왔다. 그리고 2016년 현재 최태민은 ‘최순실’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최태민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박근혜 대통령은 수많은 의혹의 눈길에도 그를 내치지 못한 것일까. 1975년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끈질긴 악연을 따라가본다.

“최태민을 박근혜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

최태민은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황해도경 순사였던 최태민은 남쪽으로 내려와 강원도, 대전 등지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했다. (2007년 7월호)은 최태민에게 6명의 부인이 있으며 그 사이에서 3남6녀를 두었다고 보도했다. 최순실씨는 최태민의 다섯 번째 부인 임아무개씨 딸이다.

최태민은 1965년 천일창고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 혐의를 받자 도피했다. 도피 중이던 1969년 ‘공해남’이라는 가명으로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1971년 서울 영등포구 호국사에서 불교 활동을 하다가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섞은 ‘영세계’(영세교·영생교)를 만들어 ‘영혼합일법’(일종의 최면법)을 주장했다고 알려졌다.

박근혜와의 첫 만남은 1975년 3월6일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며 하루하루 위로의 편지로 마음을 달래던 영애 박근혜에게 눈에 띄는 편지가 도착한다. 최태민이 보낸 편지였다. 에 따르면 최태민은 편지에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을 꾸었다며 박근혜에게 만날 것을 청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 편지를 받아본 박근혜가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렀고 최태민은 3시간이 넘는 대화 끝에 박근혜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첫 만남의 순간에 대해 최태민은 추후 언론 인터뷰에서 현몽설을 부인했다.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 1990년 10월호)

그러나 수많은 편지를 받았을 박근혜가 하필이면 왜 최태민의 편지만 눈여겨보고 최태민을 직접 청와대로 불렀는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일부 언론에선 최태민이 편지에 박근혜와 육영수 여사만이 아는 비밀을 썼다고 보도했지만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최태민이 박근혜를 만난 자리에서 몸에 육영수 여사의 혼령이 들어온 것처럼 육 여사의 음성과 표정을 똑같이 따라했다는 설도 떠돌고 있으나 역시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박근혜를 만나기 전 다양한 종교 활동을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종교적 부분이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박근혜는 1975년 3월 처음 최태민을 만난 사실은 인정했지만 어떻게 해서 최태민과 연결됐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박근혜를 만난 직후인 1975년 4월 최태민은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총재를 맡는다. 5월에는 임진강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에 박근혜를 초청해 이 자리에서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최태민과 박근혜가 본격적으로 함께 활동한 것은 이때부터다. 구국선교단은 1976년 ‘구국봉사단’으로, 1978년에는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아버지와 똑같은 최순실의 자금 조달 방식

1975년 이후 봉사단 주변에선 최태민이 박근혜와의 친분을 이용해 각종 부정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최태민의 계속되는 전횡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당시 출판국장을 맡고 있던 김경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지난 10월25일 과 인터뷰에서 “당시 최태민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최태민을 둘러싼 99가지 문제점’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보냈다”고 밝혔다. 김 상임이사는 “당시 언론은 박근혜의 사생활에 대한 보도를 금기시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장로의 입장에서 이런 사람이 청와대 안에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박정희 대통령만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 상임이사로부터 해외 언론의 박정희 정권 비판 기사 등 청와대 내부에서는 들을 수 없는 보고를 들어왔다고 한다. 김 상임이사가 취재 메모를 정리해 박 대통령에게 보내며 “최태민을 박근혜 주변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건의한 사실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991년).

이 보고서를 읽은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을 불러 최태민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이후 김재규는 경찰과 중앙정보부 등을 동원해 최태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다양한 비리 혐의와 여성 편력 등이 담긴 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중앙정보부의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최태민 관련 자료’에 나온 최태민의 비위 내용을 보면 현재 그의 딸인 최순실씨가 받고 있는 의혹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 자료에는 봉사단 운영비 조달 과정에 대해 “운영비 조달 목적으로 ㄷ회사 회장 최아무개 등 10명의 실업인을 운영위원으로 위촉… 국내 재벌급 실업인을 거의 망라한 60명 선에 육박, 1인당 입단 찬조비 2천~5천만원에 매월 200만원씩 운영자금을 조달”했다고 나온다. 2016년 대기업으로부터 800억원에 가까운 돈을 받아낸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방식과 거의 똑같다.

김재규, 10·26 원인으로 최태민 지목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보고 화가 난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9월 최태민을 불러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을 한다. 이 자리에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외에 박근혜도 참석했다. 그러나 친국 이후 최태민 처벌은 흐지부지됐다.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련은 비망록에서 친국 일주일 뒤 박정희 대통령이 세 가지 지시를 내렸다고 썼다. “최태민을 거세하고, 향후 근혜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라.” 그러나 이 사실을 접한 박근혜가 눈물을 보이며 슬퍼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없던 일로 하고 최태민과 박근혜 사이만 떼어놓으라고 했다고 비망록은 전했다.

친국에 대해서는 진술이 엇갈린다. 최태민은 1991년 와의 인터뷰에서 고문변호사의 입을 빌려 친국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물음에 대해) 전국 조직에서 청탁이 많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금품을 받은 사실이 없다는 것을 목숨을 걸고 맹세함으로써 박 대통령은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박근혜 대통령도 2007년 대선 경선 후보자 검증 청문회에서 선우련 비서관의 비망록 내용을 부인했다. “(당시 조사 내용이) 좀 막연했다. 실체가 없는 얘기라 아버지가 그걸 대검에서 조사하고 문제 있다면 법적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대검에서 별다른 일이 없었던 걸로 안다.”

이후 최태민은 총재에서 명예총재로 직위만 바뀌었을 뿐 큰 변화 없이 계속 활동한다. 그러나 최태민 비리 조사 내용을 보고받고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박정희 대통령의 행동은 이후 10·26 사태의 간접적 원인이 된다. 1979년 10월26일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쏴 죽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재판 항소보충이유서에서 최태민이 사건의 간접적 원인임을 밝혔다.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입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봉사단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경래 상임이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태민에 대한 문제를 보고받고 김재규와 차지철을 불러 회의를 했다. 회의를 하고 난 다음에 박근혜가 차지철에게 가서 ‘최태민은 좋은 사람인데 이 사람을 모략하려고 하니 경호실장이 최태민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면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차지철은 박근혜의 애처로운 호소를 듣고 최태민을 헐뜯는 사람을 끊어내는 작업을 했다. 이것으로 인해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이 심화됐다.”

최태민은 10·26 이후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에게 다시 조사를 당한다.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조사를 맡았고, 조사 뒤 최태민을 전방부대에 보내 6개월 동안 가뒀다. 박근혜가 이 사실을 알고 전두환을 찾아가 최태민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알려졌으나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 해산된다.

“언니를 격리·고립시킨다”

최태민과 박근혜는 이후로도 관계를 지속했다. 박근혜가 1983년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최태민의 전횡 의혹이 다시 등장한다. 이사장은 박근혜였지만 최태민에게 보고해야 박근혜의 결재를 받을 수 있었고, 그의 딸 최순실도 당시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1987년 10월호).

육영재단과 최태민을 둘러싼 분란은 1990년까지 계속된다. 박근령·박지만 남매는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박근혜와 최태민을 떼어달라며 탄원서를 보냈다. 탄원서 내용을 보면 “저희 언니와 저희들을 최씨의 손아귀에서 건져달라. (최태민은) 순수한 저희 언니에게 교묘히 접근해 언니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킨다. 이번 기회에 언니가 구출되지 못하면 언니와 저희들은 영원히 최씨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라고 했다.

결국 1990년 11월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박근령에게 넘긴다. 박근혜는 이사장직 사퇴 기자회견에서 최태민의 전횡 질문에 대해 “내가 누구로부터 조종받는다는 말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최 목사는 청와대 시절 새마음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로 지난 88년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내가 도움을 청해 몇 개월 동안 이 사업을 도와주었을 뿐 그 이상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이후 재단 일에 손을 떼고 요양하던 최태민은 1994년 만성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박근혜 곁에 남아 있었다. 1998년 박근혜가 재·보궐 선거로 정계에 입문할 때 최태민의 딸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씨(지금은 이혼했음)가 옆에서 도왔다. 정윤회씨는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으로 2000년까지 의원실 활동을 총괄했다. 정씨는 현재 청와대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이재만 총무비서관,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 정호성 부속비서관을 1998년 직접 뽑았다고 알려졌다.

“아이 데려오면 DNA 검사 해주겠다”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최태민의 그림자는 또다시 박근혜를 괴롭힌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했다는 ‘최태민 관련 자료’가 언론에 공개되고 당시 이명박 후보 쪽으로부터 의혹을 해명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박근혜 후보는 대선 경선 후보자 검증 청문회에서 최태민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제가 아는 한도에서는 실체가 없지 않느냐 그렇게 알고 있다.” 최태민과의 추문에 대해서도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하겠다. (최태민과의 사이에) 애가 있다고 하는데, 있다면 애를 데리고 와도 좋다. DNA 검사도 해주겠다”며 역공에 나섰다. 와 한 경선 후보 인터뷰에서도 최태민에 대해 “아버지마저 돌아가셔서 어렵고 힘들 때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도와주고 위로해주셨다. 저에게는 고마운 분”이라고 감쌌다.

2012년 대선에서도 언론을 통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가 재조명됐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대통령 당선 뒤 서서히 잊히는 듯하던 최태민의 이름은 2014년 이른바 ‘정윤회 문건’으로 다시 불거졌다. 그리고 2016년 현재 최태민의 딸 ‘최순실’이란 이름은 대한민국에 짙은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이 모든 상황에서 박근혜에게 최태민은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짐’이었다. 그럼에도 40년 넘게 최태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최태민이 박근혜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이기에 마지막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일까.

정부  보고서에  남은  최태민  약력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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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
■출생 1912년 황해도


■별칭
최도원(태몽에서 선녀가 지었다는 어릴 적 이름)
최상훈(월남 후 개명)
최봉수(부산 거주시)
최퇴운(법명)
공해남(1969년 천주교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시 사용한 이름)
방민(계시에 의한 개명. 원자경, 칙사, 태자마마라는 자칭도 사용)


■약력
1942∼45 일제시대 황해도경 순사
1945∼47 강원도, 대전, 인천 등에서 경찰경 소속 경찰
1949∼50 육군, 해병대 등에서 근무
1951 (사)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1955 한국복지사회 건설회 회장,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전국불교청년회 부회장
1955 개운중학교 교장
1963 민주공화당 중앙위원
1965 천일창고 회장
1973 영세교 교주 사칭(영혼합일법 주장)
1976∼80 구국봉사단(새마음봉사단) 총재
1990 육영재단 분규 건으로 공식 석상에서 물러남
1994 사망


■1975년~79년 비리 혐의
횡령 14건(2억2135만6천원)
사기 1건(200만원)
변호사법 위반 11건(9420만원, 토지 14만1330평)
권력형 비리 13건
이권 개입 2건
융자 간여 3건
총계 44건
*자료: ‘최태민 관련 자료’(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것을 바탕으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에서 내용을 추가)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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