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만화강국’이란 사실은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가히 만화왕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 나라 일본과 자꾸 비교하다 보니 한국 만화가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착시 현상이랄까. 그러나 한국처럼 다종다양한 만화가 사랑받는 나라도 드물다. 학습만화부터 ‘병맛’ 웹툰까지, 지금 한국 만화 생태계는 불과 10여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다양하고 폭넓어졌다.
그런데 이처럼 빠르게 발전해온 한국 만화에서 빠진 장르가 있다. 새로운 첨단 장르도 아니고, 수요가 없는 비인기 장르도 아닌데 유독 한국에서 좀처럼 선보이지 않는 만화 장르가 바로 ‘SF’이다. 그 이유는 SF가 다른 어떤 만화보다 창작하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SF는 독특한 볼거리가 가장 중요한 만화 장르다. 등장인물의 옷부터 시작해 집, 교통수단, 무기 그리고 도시 전체까지 만화 속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작가가 상상력과 디자인 감각을 버무려 창조해내야 한다. 물론 이 자체가 SF만화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SF만화는 작가가 가히 ‘조물주’가 돼야 한다. 먼저 작가가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 세계관을 표현하는 디자인 콘셉트를 잡아야 하고, 콘셉트에 따라 독자들이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개별 아이템을 하나하나 새로 창조해야 한다. SF만화는 다른 장르 만화를 그릴 때보다 구상 과정이 훨씬 더 길고, 작업 과정에도 훨씬 더 많은 공력을 들일 수밖에 없다.
SF소설? 글로 묘사하면 되니까 이런 고생을 할 필요 자체가 없다. SF영화? 영화는 산업적으로 만화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자본집약적이어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을 활용하면 되니까. 가령 이젠 고전이 된 시리즈를 보더라도 이 영화의 핵심인 외계인 괴물의 디자인은 H. R. 기거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 아티스트가 투입됐다.
만화는 산업적 특성 때문에 아무리 협업 체제를 이룬다 해도 결국 모든 것을 만화가 혼자 해결해야 하는 장르다. 만화가가 작품 하나에 완전히 ‘꽂혀’ 장인정신으로 오랜 시간 매달려야만 SF만화는 성공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SF만화가 ‘경제적으로 가장 수지 맞추기 어려운 만화’라는 뜻이다. 일본처럼 만화시장이 커서 작품 하나만 성공해도 먹고살 수 있다면 모를까 아직 한국에선 만화가가 작품 하나에 전념하면 굶어죽기 딱 좋은 현실이다. 스타 작가들도 여기저기 여러 만화를 동시에 작업해야 화실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준인데, 시간 많이 들어가는 SF를 그리면 마감 펑크 내기 십상이다.
이런 현실로 인해 앞으로도 당분간은 뛰어난 한국 SF만화의 등장을 바라기는 어렵다. 만약 그런 만화가 드디어 한국에도 나왔다면 그건 한국 만화시장이 비로소 어느 정도 커졌다는 이야기거나, 한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미친 만화가’가 등장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한국을 대표할 SF만화가 기다려진다.
구본준 기자 한겨레 문화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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