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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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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는 재생에너지·부자증세로 간다

중남미 핑크 타이드 흐름에 합류, 당선된 좌파연합 페트로 후보 급진개혁 정책 표방
등록 2022-06-25 16:03 수정 2022-06-26 07:27
2022년 6월19일 밤(현지시각) 콜롬비아 대선 결선에서 승리한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당선자(위쪽 사진 앞줄 왼쪽)와 프란시아 마르케스 부통령 당선자(오른쪽), 페트로의 부인 베로니카 알코세르(가운데)가 수도 보고타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2022년 6월19일 밤(현지시각) 콜롬비아 대선 결선에서 승리한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당선자(위쪽 사진 앞줄 왼쪽)와 프란시아 마르케스 부통령 당선자(오른쪽), 페트로의 부인 베로니카 알코세르(가운데)가 수도 보고타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남미 콜롬비아에서 최초의 좌파 정부가 탄생했다. 최근 몇 년 새 라틴아메리카에서 잇달아 좌파 정당이 집권하는 ‘핑크 타이드’(Pink Tide·분홍색 물결)의 색깔이 한층 짙어졌다. 선거운동 내내 ‘변화’를 외쳤던 좌파 게릴라 무장단체 출신의 구스타보 페트로(62) 대통령 당선자가 콜롬비아 안팎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페트로의 러닝메이트인 프란시아 마르케스(41)는 콜롬비아 최초의 흑인 여성 부통령 당선자라는 기록도 함께 세웠다.

집권당 대선 후보 1차 컷오프 통과 못해

2022년 6월19일(현지시각) 콜롬비아 대선 결선에서 좌파 연합 ‘콜롬비아를 위한 역사적 조약’의 구스타보 페트로 후보가 유효투표의 50.4%를 얻어, ‘반부패 통치자 리그’의 로돌포 에르난데스(77) 후보(득표율 47.3%)를 꺾고 당선됐다고 콜롬비아 국가시민등록청이 공식 발표했다. 앞서 5월29일 1차 투표에서 두 후보는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은 가운데 각각 1, 2위를 차지해 결선을 치렀다. 이번 대선은 집권 민주중도당의 대선 후보가 1차 컷오프를 통과하지 못했을 만큼 유권자의 ‘변화’ 욕구가 컸다.

선거 결과가 확정된 직후, 페트로는 트위터에 “오늘은 국민의 축제일. 수많은 고통이 오늘 조국의 심장에 밀려든 환희의 물결로 누그러지길. 이 승리는 국민과 역사의 승리, 오늘은 거리와 광장의 날”이라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는 이어 보고타 거리에서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진정한 변화가 오고 있다. (이전과 다른) 또 하나의 콜롬비아다”라며 차기 정부의 극적인 정책 변화를 예고했다.

이번 대선은 두 후보의 극명하게 대조되는 경력과 공약으로도 관심을 모았다. 페트로는 한때 민주화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상원의원과 수도 보고타 시장을 역임한 대선 3수 정치인, 에르난데스는 부유한 기업인 출신으로 북부 도시 부카라망가 시장을 지내고 대선에 처음 도전한 극우 포퓰리스트다. 페트로는 선거 공약으로 석유·석탄 채굴 축소, 부자증세, 연금개혁을, 에르난데스는 부패 척결,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을 내걸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 지도자들은 일제히 “페트로-마르케스 정부통령 당선자의 역사적 승리”를 축하했다고 남미 위성방송 <텔레수르>가 6월20일 보도했다.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국민을 돌보지 않는 집단의 지배가 끝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새 국면이 열릴 가능성을 보고 있다”며 반겼다. 2019년 콜롬비아와 단교한 접경국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형제국가에 새 시대가 동트고 있다”며 관계 정상화를 향한 러브콜을 보냈다. 쿠바의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도 “페트로의 대통령 당선에 최고의 우애로 축하를 표시한다”며 관계 진전을 희망했다. “페트로와 마르케스의 승리에 나는 기쁨으로 충만하다”(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라틴아메리카의 통합이 강화됐다”(루이스 아르세 볼리비아 대통령), “급변하는 세계의 도전에 맞서 단결하자”(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등 다른 이웃나라 정상들의 축하 메시지도 쏟아졌다.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이자 최대 원조 대상국

페트로의 당선은 중남미의 거센 ‘핑크 타이드’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최근 5년 새 라틴아메리카에선 멕시코(2018년)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파나마, 도미니카, 볼리비아, 페루, 칠레, 니카라과, 온두라스에 이어 콜롬비아까지 13개국에서 잇달아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2022년 10월 대선을 앞둔 브라질에서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대통령(노동자당)이 군인 출신 극우 정치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을 제치고 재집권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이번 콜롬비아 대선 결과를 공식적으론 ‘환영’했지만, 남미의 거센 변화와 좌파 블록 강화가 가져올 불확실성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6월2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페트로와의 전화 통화에서 선거 승리를 축하했다고 백악관이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기후변화, 보건안보, 콜롬비아 좌파 무장세력과의 평화협정 이행을 포함한 양국의 상호협력을 계속 강화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으며, 안보와 마약 대응에서의 상호협력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페트로 당선자도 트위터에 “(미국과) 더 밀접하고 정상적인 외교관계로 가는 길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매우 우호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양국 국민의 이익을 위한 ‘더 공정한’ 관계”라는 메시지를 올렸다.

미국의 중남미 안보 정책에서 콜롬비아는 전통적 우방국이자 최대 원조 대상국이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미국은 2016년 콜롬비아 정부와 좌파 무장단체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콜롬비아에 10억달러(약 1조3천억원) 넘는 지원을 직간접적으로 해왔다. 6월20일 <워싱턴 포스트>는 “(콜롬비아 대선에서) 페트로의 당선은 한 세대 전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던 충격적 사례”라며 “라틴아메리카에 또 하나의 좌파 국가가 들어서면서 미국은 뒷좌석으로 물러앉을 수 있다”고 짚었다. 이 신문은 특히 “최근 중남미의 잇단 좌파 집권은 가톨릭이 지배해온 이 지역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한다”며 “콜롬비아·아르헨티나·멕시코에선 페미니즘 운동이 낙태를 합법화했고, 일부 국가는 안락사를 허용한 콜롬비아의 선례를 따르고, 칠레는 2021년에 동성결혼을 인정했다”고 소개했다.

2022년 6월19일 밤(현지시각) 콜롬비아 제2도시 메데인에서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당선자의 지지자들이 대선 결과에 환호하고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2022년 6월19일 밤(현지시각) 콜롬비아 제2도시 메데인에서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당선자의 지지자들이 대선 결과에 환호하고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콜롬비아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가운데 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에 이어 4위 경제대국이다. 칠레와 함께 남미 대륙에서는 둘뿐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정치·경제적 수준은 미흡하다. 인구 5120만 명의 일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334달러(세계은행 2020년)로 경제선진국 수준과 거리가 멀고, 빈곤율(중위소득 50% 이하 가구 비율)이 40%에 이를 만큼 빈부 격차가 크다. 기득권 집단의 부패와 마약 카르텔의 준동, 좌파 무장조직의 반정부투쟁 등 정치·사회적 불안정도 여전하다. 20세기에만 대선 후보 5명이 집권세력과 공모 관계의 정치적 반대자, 마약 밀매자, 준군사조직 등에 암살됐다. 이번 대선 기간에도 페트로와 에르난데스 두 후보 모두 정체불명의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호소했다.

누구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할지 주목

후보 시절 페트로 대통령 당선자는 콜롬비아 수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석유·석탄 산업을 재생에너지 산업으로 개편하고 지식 기반 산업과 관광 주도 경제를 구축하겠다고 공언했다. 중남미 국가와 세계의 이념적 동맹국들에는 화석연료에서 벗어난 경제의 새로운 블록을 구축하는 데 동참하기를 촉구했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페트로 당선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가 유럽연합(EU)과 비슷한 지역 통합을 위해 협력할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밝혔다. 페트로는 연금과 건강보험체계 개혁, 비생산적 토지 중과세, 수입관세를 통한 지역 농업과 산업 보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도 약속했다. 모두가 경제주권 회복과 극심한 불평등 해소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러나 좌파 연합이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페트로 정부가 공약을 얼마나 실행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페트로의 급진 개혁 정책이 자국의 석유·석탄 산업 기업과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와 반발에 부닥칠 수도 있다. 대선 이틀 뒤인 6월21일, 국영 석유회사 에코페트롤의 주가가 11.9%나 폭락하는 등 콜롬비아 증시는 크게 흔들렸다. 6월22일 미국의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 뉴스>는 “석유 탐사 중단, 연금개혁, 증세 같은 페트로의 구상이 일부 기업인과 자산 보유자들을 섬뜩하게 한다”며 “신경이 곤두선 투자자들은 좌파 정부의 거버닝(정책 집행)을 짐작하기 위해 페트로 당선자가 누구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는지 주목한다”고 보도했다.

콜롬비아에 “진정한 변화”를 약속한 페트로는 당선 첫날부터 나라 안팎에서 기대와 우려, 찬사와 경계를 동시에 받고 있다. 콜롬비아 최초의 좌파 정부가 가보지 않은 길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페트로가 이끄는 새 정부는 2022년 8월7일 출범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게릴라에서 정치인으로, 미혼모에서 환경운동가로

신임 대통령·부통령은 누구?

구스타보 페트로는 1960년 콜롬비아 북부 코르도바주 소도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톨릭계 중등학교에 다니면서 해방신학에 관심을 보였고, 학생 신문을 창간했다. 수도 보고타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17살에 변두리 빈민의 참상을 목격하고 좌파 무장단체 ‘4·19운동(M-19)’에 가입해 도시 게릴라로 활동했다. 25살 때 불법무기 소지 죄로 18개월 감옥살이를 했다. 4·19운동은 1970년 콜롬비아 대선 부정선거에 반발해 창설됐으며, 1990년 평화협정에 따라 해산하고 제도권 정당으로 변신했다.

페트로는 국내 대학원을 거쳐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과 스페인 살라망카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와 정치에 뛰어들었다. 2002년 하원의원, 2006년 상원의원으로 당선했다. 2010년 대선에 처음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2011년 보고타 시장에 당선했다. 2018년 두 번째 대선 도전에도 실패한 뒤, 2022년 대선에서 좌파 연합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

콜롬비아 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부통령 당선자가 된 프란시아 마르케스는 환경·인권 운동에 앞장서온 변호사다. 1981년 남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광산 노동자였다. 마르케스는 16살에 미혼모가 된 사실을 선거 기간에 당당하게 밝혔다. 10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려고 금광에서 일하면서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깨닫고 환경운동을 시작했다. 2014년에는 불법 금광 채굴에 항의해 여성 80명이 수도 보고타까지 560㎞를 행진하는 시위를 주도해 정부의 불법 채굴 단속을 끌어냈다. 2018년 환경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먼 환경상’을 받았고, 이듬해엔 수자원 보호를 위해 싸우다 피살될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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