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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 대신 총을 들다

2차 대전 참전한 요기 베라와 테드 윌리엄스, 우크라이나 선수의 전쟁도 빨리 끝나기를
등록 2022-03-17 16:52 수정 2022-03-18 02:43
2007년 3월 요기 베라가 팬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REUTERS

2007년 3월 요기 베라가 팬들에게 인사하는 모습. REUTERS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9회말 2아웃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품는 야구팬에게 꽤 익숙한 말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가 한 말이라는 사실도 많이 알려져 있다.

요기 베라의 실제 이름은 로런스 피터 베라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유명 코미디언 보비 호프먼이 베라의 행동이 요가 자세의 힌두교 수행자처럼 보여 ‘요기’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지금은 ‘요기 베라’로 더 많이 통용된다.

촌철살인 어록, ‘요기즘’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베라는 집안 사정으로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다녔다. 그 와중에 야구를 계속했고 아마추어리그에서 맹활약했다. 작은 키(170㎝) 때문에 프로구단 입단이 어려울 뻔했으나 1943년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을 했다.

베라는 메이저리그에서 19시즌(1946~1963년, 1965년)을 뛰는 동안 마지막 시즌(1965년)을 제외하고 계속 올스타 선수로 뽑혔다. 월드시리즈 무대에 14차례 올라 10차례 왕좌를 차지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누구도 못한 일이었다.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MVP)로도 3차례 선정됐다. 그의 통산 성적은 타율 0.285, 358홈런, 1430타점. 베라는 은퇴 뒤 양키스 감독 등으로 활약했다.

베라가 더욱 주목받은 이유는 ‘요기즘’으로까지 불리는 그의 촌철살인 어록 때문이었다. “기록은 깨지기 전까지만 기록이다” “미래는 예전에 생각했던 그 미래가 아니다” “갈림길을 만나면 두 길을 다 택해도 된다”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같은, 평이해 보이지만 한번쯤 되새겨봄 직한 말을 남겼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은 베라가 뉴욕 메츠 감독 시절이던 1973년 시즌 중반에 꼴찌인 팀 성적에 한 기자가 “시즌이 끝난 것이냐”고 묻자 답한 말이었다. 메츠는 시즌 막판 주전 선수들이 복귀하면서 그해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진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던 셈이다.

베라는 2015년 9월22일 90살의 나이로 하늘 위 그라운드로 갔다. 그의 죽음 전후로 백악관 청원 사이트에는 10만 명 이상이 베라에게 ‘대통령 자유 메달’(세계 평화, 문화, 미국의 안보와 국가적 관심에 기여한 개인에게 미국 대통령이 주는 상)을 수여해달라고 간청했다. 야구 레전드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데뷔 전, 베라는 최전방에서 복무한 참전 용사였다.

베라는 마이너리그 시절 10대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였다. 공격수송함 베이필드호에서 복무하며 1944년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아군의 해변 상륙을 돕기 위해 해군 로켓 보트에서 독일 방어선을 향해 기관총과 로켓을 발사하는 사수의 동료로, 무기와 기타 병기 장비, 소형 무기 및 탄창의 작동과 유지 관리를 했다고 한다. 그 시기에 19살 베라는 손을 다치기도 했다. 베라가 군 제대 뒤 ‘퍼플 하트 메달’(미국 군사 훈장 중 부상 또는 사망자에게 대통령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메달)을 받은 까닭이다.

다른 보통의 남자들처럼 임무를 다하다

베라는 디데이(D-Day)로 명명된 노르망디 상륙작전 참여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고 수훈부대 표창, 그리고 2009년에는 ‘론 세일러 어워드’(Lone Sailor Award·미국해군기념관에서 용기와 헌신의 가치를 실현한 이에게 수여하는 상)를 받았다. 그의 화려한 메이저리그 경력만큼 놀랍지 않은가. 베라는 인터뷰 때마다 “해군에서 보낸 시간이 내 생애 가장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 또한 참전 용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조종 기술을 습득하고 전투 배정을 기다렸으나 먼저 전쟁이 끝났다. 한국전쟁 때는 직접 미군기를 몰았다. 그는 39차례 출격 임무를 수행했고 3차례 피격당했다. 북한 평양의 주요 요충지로의 첫 번째 출격에서는 비행기가 거의 반파돼 지상과 충돌하기도 했다.

윌리엄스와 함께 복무한 존 글렌 전 미국 상원의원은 <엠엘비닷컴>(MLB.com) 인터뷰에서 “윌리엄스는 자신의 의무를 전혀 회피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언급하지 않는 한 야구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며 “그는 다른 보통의 남자들처럼 임무를 위해 거기에 있었다”고 했다.

베라, 윌리엄스 외에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유명한 밥 펠러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고 곧바로 자원입대해 포화 속에 뛰어들었다. 당시 펠러는 암으로 일찍 세상을 등진 아버지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어 징집 대상이 아니었는데도 국가를 위해 야구 유니폼이 아닌 군복을 택했다.

후방에서 위문차 군부대를 돌았던 조 디마지오 등과 달리 펠러는 괌 상륙작전, 마셜섬 전투, 도쿄 공습 등 최전방에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종군 휘장 5개, 무공 훈장 8개를 품에 안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곧바로 복귀해 그해(1945년) 등판한 9개 경기에서 7개 경기를 완투했다. 전쟁에서도, 그라운드에서도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스포츠 종목 중 야구는 1루, 2루, 3루를 거쳐 단 한 명이라도 ‘홈’으로 돌아와야만 승리하는 경기다. 그리고 적으로부터 ‘홈’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는 포수다. 포수인 베라에게 ‘홈’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비단 야구에서뿐만이 아니었다. 타자인 윌리엄스도, 투수인 펠러도 그랬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 더욱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살아남은 자의 스포츠를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러시아의 명분 없는 침략에 우크라이나 출신 스포츠 선수들이 고국 수호를 위해 총을 들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그들이 베라처럼 윌리엄스처럼 그리고 펠러처럼 다시 스포츠 현장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스포츠 무대에서 꽃피웠을 그들의 찬란한 미래가 비탈리 사필로와 드미트로 마르티넨코(이상 축구 선수), 에브게니 말리셰프(바이애슬론 선수)처럼 전쟁에 바스러지지 않았으면 한다. 포성에 쓰러진 말리셰프는 고작 19살에 불과했다. 살아남은 자의 승리를 보고 싶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야구가 뭐라고> 저자

*‘인생 뭐, 야구’ 시즌2를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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