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 난리다. 29년간 쌓인 한이 많았나보다. 29년. 말이 쉽지 참 긴 세월이다. 고3이던 내가 중학생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될 만큼의 시간이니까. 야간 자율학습 때 몰래 이어폰으로 한국시리즈 라디오 생중계를 들으며 주먹을 불끈 쥐던 여학생은, 스포츠 기자 24년차에 이르러서야 엘지(LG) 트윈스의 우승 기사를 쓰게 됐다.
한국시리즈 1, 2, 5차전이 열린 서울 잠실야구장은 온통 유광 점퍼와 노란색 머플러 물결이었다. 관중 2만3750명 가운데 90% 이상이 LG 팬인 듯했다. 그들은 “무~적 LG”와 “사~랑~한다 LG”를 거듭 외치고 노래했다. 그리고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LG 기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들이, LG가 우승해도 어떤 보상도 없는 이들이 늦가을 밤 추위를 견뎌내며 목청껏 “사~랑~한다 LG”를 부르짖는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도대체 야구가 뭐라고.’
사실 스포츠 팬이 된다는 건 평생의 족쇄를 차는 것과 같다. 특히 야구는 더 그렇다. 1년에 최소 144일은 하니 오죽할까. 야구에 웃고, 야구에 울고, 야구에 화내고, 야구에 기뻐한다. 일상과 너무 많이 얽혀 있어 떼어내기도 쉽지 않다. 켜켜이 쌓인 애증의 감정은 단 한 번의 우승으로 스르르 녹아내린다. 삶의 순간 내내 끊어낼 수 없는 중독성 강한 그 무엇, 그것이 스포츠 팬심이다.
다행히 팬심의 긍정적 이면도 있다. <스포츠 팬: 관중의 심리학과 사회적 영향>의 저자인 미국 켄터키주 머리주립대학의 대니얼 완 교수(심리학)는 2012년 4월 미국 방송 <시엔엔>(CNN)과의 인터뷰에서 “스포츠 팬은 신체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활동적이다. 지역팀을 응원하는 팬들은 자존감이 더 높고, 덜 외로우며, 스포츠 팬이 아닌 이들보다 덜 공격적”이라고 했다.
수십 년간 스포츠 팬을 연구한 완 교수는 “현지 팀에 더 많이 공감할수록 심리적으로 더 건강한 경향이 있다. 만약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자이언츠 팬이라면 다른 사람과 연결고리를 찾는 게 더 쉽다”면서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 소속에 대한 강한 욕구와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 동일시하려는 욕구가 있다. 팬덤은 우리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연결해주고, 이는 인간의 소속감 욕구를 충족해준다”고 말했다.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관중석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는 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구장 밖에서는 ‘남남’이지만 구장 안에서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 같은 팬이니까. 그래서 스포츠 팬은 스포츠에 관심 없는 사람보다 우울증과 소외감을 덜 느낀다고 한다.
시안 바일록 다트머스대학 총장은 아예 스포츠를 직접 하거나 관전하는 행위가 언어능력을 향상한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는 하키 선수와 팬, 그리고 스포츠를 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그룹으로 나눠 연구했다. 일반적으로 행동 계획과 통제에 관련된 뇌 영역이 팬과 선수가 자신의 스포츠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활성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일록 총장은 “소파에 앉아 축구나 하키 경기를 볼 때 우리 두뇌는 실제로 어떤 면에서 경기 자체를 플레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미 해군 대위인 캐리 케네디 신경심리학자는 “스포츠의 규칙과 복잡함을 배우는 것은 언어와 관련된 신경망의 활성화를 통해 뇌 건강에 도움이 된다”며 “스포츠를 따라가려면 규칙을 배우고 경기 도중 규칙이 잘 준수되는지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해야 하며, 응원하는 팀을 따라가려면 팬들은 팀의 각 선수, 기록, 강점, 약점, 포지션 등을 배워야 한다. 개인의 기량과 전반적인 결과의 예측할 수 없는 특성은 인지 유연성, 기억력, 도파민 시스템과 관련한 인지 과정을 자극한다”고 했다.
조지아주립대학 제임스 대브스 심리학자는 응원팀이 승리하면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올라간다는 연구결과도 내놨다. 1994년 축구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이탈리아에 승리하기 전과 후에 애틀랜타에 있는 21명의 이탈리아·브라질 남성에게서 타액 샘플을 채취했는데, 승리한 브라질 출신 남성들의 테스토스테론은 평균 28% 증가한 반면, 패배한 이탈리아 출신 남성들의 테스토스테론은 27% 감소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오르면 성기능이 향상되고 에너지도 증가하는 법.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이후 이듬해에 일시적으로 출산율이 올랐다는 점(합계출산율 2002년 1.17명, 2003년 1.18명, 이전까지 하락 추세였다)을 떠올리면 틀린 말도 아니다. 더 나아가 응원팀이 승리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성적 매력에 훨씬 더 낙관적이라는 설문조사까지 있다. 팀이 지면 낙관론은 사라졌다. 팀의 승패가 자존감과 연결된다는 뜻이다.
완 교수는 “스포츠 팬덤은 경기 결과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도 말한다. 예를 들어 피자가게에서 계속 주문이 잘못된 경우 더 신뢰할 수 있는 가게로 바꿀 가능성이 크지만, 팬이 되는 것은 정체성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패배를 받아들이고 팀에 계속 충성한다는 것이다. 다른 팬들과 함께 경기를 관전하면 패배로 인한 심리적 영향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도 조사됐다. 실비아 노블로크-웨스터윅 교수(독일 베를린공과대학)는 “패배한 팀의 팬들은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자존감 상실을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나 홀로 집에서 스포츠를 보는 것보다 경기장에서 다 함께 즐기는 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얘기겠다.
일부 심리학자는 스포츠 팬덤의 뿌리가 인류가 작은 부족을 이루며 살던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가 부족을 대표하는 진정한 유전적 대표자였다고 말한다. 애리조나주립대학 로버트 찰디니 심리학 교수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프로 운동선수는 모든 면에서 용병이지만 그들의 활약은 일부 팬에게 부족 전쟁에서의 격렬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지난 20년 동안 스포츠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도 이런 감정 때문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스포츠 영웅은 우리의 전사”라면서 “스포츠는 그 고유의 우아함과 조화로움 때문에 즐기는 가벼운 오락이 아니다. 자아는 경기 결과에 중심적으로 관여한다. 누구를 응원하든 자신을 대표한다”고 했다.
응원팀의 승리에 도취해 있을 때 누군가 “야구가 밥 먹여주냐?”는 식의 핀잔을 주면 앞에 언급한 연구사례를 예로 들어 열성 팬의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언어적 이면을 설명해주면 된다. 야구는 그저 평범한 공놀이가 아니다. 야구단을 사유화하며 감정대로 칼을 휘두르는 누군가에겐 그깟 ‘공놀이’겠으나.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whizzer4@hani.co.kr
*김양희의 인생 뭐, 야구: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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