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삶과 닮았다. 가끔은 처절하고, 가끔은 처연하다. 그래도 야구에는 ‘낭만’이 있다. 이닝과 이닝 사이, 타자와 타자 사이, 투수와 투수 사이, 공과 공 사이 숨을 고를 수 있는 틈이 있기 때문이다. 경기의 여백 안으로 낭만은 스며든다.
2024시즌 케이비오(KBO)리그 개막전부터 그랬다. 3월23일 잠실야구장에서는 ‘디펜딩 챔피언’ 엘지(LG) 트윈스와 지난 시즌 9위 한화 이글스의 경기가 열렸다. 한화 선발은 류현진이었다. 2012시즌을 마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류현진은 2024년 2월, 8년 170억원 계약으로 다시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건강할 때 돌아오겠다”는 팬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한 깜짝 복귀였다.
1회말 류현진이 마운드에 오르자 LG 1번 타자 박해민은 헬멧을 벗어 류현진에게 90도 인사를 했다. 박해민뿐만이 아니었다. LG 선수들도 1루 더그아웃 앞쪽에 도열해 ‘코리안 몬스터’의 복귀를 축하했다. 비록 그라운드 위 적으로 만났으나 12년 만에 리그로 돌아온 대선배에 대한 예우를 보여줬다.
3월26일 인천 에스에스지(SSG) 랜더스필드에서도 특별한 장면이 연출됐다. 김강민은 지난 시즌까지 23년 동안 에스케이(SK) 와이번스를 거쳐 SSG 랜더스까지 인천에서만 프로 생활을 하다가 2024년에는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SSG는 2023년 11월 있던 2차 드래프트 때 베테랑 김강민을 35인 보호선수에 포함하지 않았고, 중견수 자원이 부족했던 한화는 김강민을 선택했다. 프랜차이즈 스타의 어이없는 이적에 SSG 구단은 “은퇴 논의 중이었다”고 항변했으나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고 결국 김성용 단장이 옷을 벗기까지 했다. 그만큼 김강민은 인천 야구를 관통하는 상징성 있는 선수였다.
이날은 김강민이 ‘9번’을 달고 ‘0번’의 김강민을 기억하는 인천 팬들에게 첫선을 보이는 날이었다. 김강민은 7회 대수비로 나왔다가 9회초 2사 1루 타석에도 섰다. 김강민이 타석에 들어서자 원정 3루석뿐만 아니라 홈 1루석에서도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그리고 야구장의 모든 팬이 하나가 되어 김강민의 응원가인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김강민은 헬멧을 벗어 3루뿐만 아니라 1루 팬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김강민이 옛 팬들에게 인사하는 동안 주심을 맡은 이계성 심판은 홈플레이트를 정리하면서 시간을 벌어줬다. 시범 운영 중인 피치 클록에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선수, 팬, 심판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연출한 장면이다. 인천 팬들은 김강민이 방송사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의 SSG 시절 0번 유니폼을 흔들면서 “김강민!” “김강민!”을 연호했다.
메이저리그 서울시리즈가 열린 고척 스카이돔(고척돔)에서 또한 야구의 낭만이 있었다. 국내에서 처음 메이저리그 개막전(3월20일)이 열린 가운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소속의 김하성이 2회말 처음 타석에 들어섰다. 이때 랜스 바크스데일 주심이 허리를 숙여 홈플레이트 먼지를 쓸어냈다. 홈플레이트가 깨끗했는데도 바크스데일 주심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김하성이 한국 야구팬들에게 인사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고척돔은 김하성이 메이저리그에 진출(2021년)하기 전까지 키움(전 넥센) 히어로즈 소속으로 뛰던 홈구장이다.
김하성은 바크스데일 심판의 배려 아래 피치 클록 영향 없이 헬멧을 벗어 팬들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메이저리그는 현재 피치 클록을 운영 중인데 타자는 피치 클록이 끝나기 8초 전에 타격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이를 어기면 스트라이크 1개가 자동으로 주어진다. 심판의 배려가 없었다면 김하성은 스트라이크 1개를 자동 적립했을 것이다.
이렇듯 한국과 미국을 가리지 않고 야구는 ‘스토리’에 꽤 관대한 편이다. 일상과 함께하는 야구는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야구장 안팎의 사람들은 그 스토리를 확장해간다. 베테랑이 만들어낸 스토리만큼 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은퇴를 앞둔 이에게 한없이 마음을 여는 게 또 야구다.
스즈키 이치로도 그랬다. 이치로는 2001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세우고 통산 3000안타도 때려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3000안타-500도루-골드글러브 10회 수상을 달성했다. 공·수·주 나무랄 데 없는 선수였다. 그는 타자였지만 마흔두 살에 투수로도 빅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2015년 10월5일 마이애미 말린스 소속으로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 구원 투수로 등판해 최고 시속 142㎞의 공을 던지며 1이닝(2피안타 1실점)을 책임졌다.
이치로는 경기 뒤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른 것은 내 꿈 하나를 이룬 것”이라고 감격해했다. 팀이 뒤진 상황에서 감독, 동료 선수들의 배려로 그는 오랜 기간 가슴속에 품어왔던 꿈을 현실화했다. 이게 ‘낭만’이 아니면 무엇일까.
이치로는 2021년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은퇴식에 꽃다발을 들고 깜짝 등장해 마쓰자카를 울리기도 했다. 마쓰자카는 “프로 입단 전부터 이치로 선배를 따라잡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39살의 포수 강민호(삼성 라이온즈)가 3월28일 잠실 LG 트윈스전에서 통산 최다 출장 기록을 깼을 때, 그에게 축하 꽃다발을 건넨 이는 박용택 케이비에스엔(KBSN) 스포츠 해설위원이었다. 박용택 해설위원은 강민호 이전에 최다 출장 기록(2237경기)을 보유하고 있었다. 박 해설위원은 “(강)민호는 20살 때부터 포수 마스크를 쓰고 지금까지 뛰었다. 나보다 더 나은 기록”이라며 “메이저리그 이반 로드리게스 포수 출장 기록(2543경기)까지 넘어주길 바란다”라고 덕담했다. 기록은 언젠가 깨진다. 그러나 기록을 깨는 순간, ‘전설’이 함께하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2024시즌 초반 승승장구하는 한화가 2018년 포스트시즌에 보여줬던 낭만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 한화는 정규리그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올랐는데 한화그룹은 대전야구장 전 좌석에 빨간 장미꽃과 편지를 놔뒀다.
한화 구단은 “오랫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 못해 이글스 팬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11년을 기다려준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라는 김승연 그룹 회장의 뜻을 따랐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당시 야구장을 방문해 “최강 한화”를 외치는 야구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올해 대전 홈 개막전(3월29일)을 찾아 한화의 끝내기 안타를 지켜보며 환하게 웃기도 했다.
야구 그라운드는 전장이다. 경기가 끝나면 보이지 않는 피가 낭자하게 흐른다. 실점에, 실책에, 병살타에, 뼈아픈 패배에 생채기가 많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의 시간에는 흘려버리기 아까운 순간들이 있다. 놓치기 힘든 낭만의 순간들이 있다. 야구여서, 야구라서 그렇다.
김양희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장 whizzer4@hani.co.kr
*‘김양희의 인생 뭐야구’는 오랫동안 야구를 취재하며 야구인생을 살아온 김양희 기자가 야구에서 인생을 읽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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