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서양음식 경험은 서울 광화문 경양식집에서 먹었던 돈가스다. 지금은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가 분식집에서도 흔하게 사먹을 수 있는 김밥·떡볶이 같은 국민 분식 메뉴가 됐지만, ‘나 때는’ 아주 귀한 날에나 먹는 최고급 서양음식이었다. 돈가스가 일본식으로 개량된 서양음식임을 알게 된 건 나중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함께 갔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 경양식집에서 난생처음 돈가스를 시켰을 때, 나비넥타이를 맨 종업원은 이렇게 물었다.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밥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때 머릿속에 이는 번민의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경양식집에서 ‘빵이냐 밥이냐’를 고민하던 순간보다 더 머리에 지진이 날 것 같았던 순간은 ‘중국이냐 러시아냐’를 선택하는 갈림길에 섰을 때다.
나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라는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내가 러시아어를 공부한 건, 얼마 전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정책’ 영향이 컸다.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잠시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나의 러시아’를 떠올렸다.
1988년 7월7일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국가들, 북한과 새로운 화해와 협력을 추구해가겠다고 선언한 ‘7·7 선언’ 이후 한국과 러시아(당시 소련)의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러시아와의 수교는 1990년 9월30일에 이뤄졌지만, 7·7 선언 이후 한국에는 이미 ‘러시아 붐’이 조성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대학입시를 앞두고 ‘앞으로 가장 잘나갈 것 같은’ 학과인 러시아어를 공부해보라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를 받고 아무 생각도 없이 덜컥 ‘러시아어’를 선택하고 말았다. 러시아와 수교한 그해, 러시아어과는 영어과를 제치고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학과였다.
나는 4년 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사락사락 눈 내리는 자작나무숲과 바이칼호를 지나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닿는 꿈을 꾸며 나타샤와 카추샤, 바실리 등이 기다리는 ‘나의 러시아’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내가 닿은 곳은 푸시킨과 레닌의 동상이 있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마오쩌둥 초상화와 오성홍기가 펄럭이는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톈안먼) 광장이다.
돈가스를 시키며 ‘빵이냐 밥이냐’를 고민한 것처럼, 나는 인생의 또 다른 분기점에서 ‘러시아냐 중국이냐’를 두고 수많은 날을 번민했다. 1992년 구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어과는 더 이상 ‘커트라인이 가장 높던’ 학과가 아니라 순위가 추락하는 비인기 학과가 됐고, 그 자리에 대신 ‘중국’이 들어섰다. 1992년 노태우 정부 시절, 러시아와의 수교처럼 또 한 차례 ‘역사적인’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차이나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아주 약삭빠르게 ‘앞으로 가장 잘나갈 것 같은’ 중국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나의 러시아’는 멀어져갔고 내가 사랑했던 러시아 이름들인 나타샤와 카추샤, 바실리도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그런데 베이징에서 다시 러시아를 만났다. 한 번도 실제 만나본 적이 없던 나타샤와 카추샤 같은 러시아인들도 베이징에서 만났고, 대학 수업 시간에 듣던 러시아 국민가요 <카추샤>와 <모스크바 교외의 밤>을 베이징의 공원과 광장 등에서 수시로 들었다. 심지어 러시아 음식을 처음 먹은 곳도 베이징이다.
“베이징은 20년의 세월 속에서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고, 옛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변화는 내 기억을 가물거리게 했고 진실과 환상을 뒤섞어버렸다. 어느 여름이었을 것이다. (…) 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냈고 욕망을 억제하기 힘들어했다.”
1994년 개봉해 그해 베네치아(베니스)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감독상 등 각종 상을 휩쓴 중국 장원 감독의 처녀작 <햇빛 쏟아지던 날들>의 오프닝 내레이션이다. 이 영화는 문화대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70년대 베이징 골목을 배경으로, 인생의 가장 ‘햇빛 찬란한 때’인 열여섯 살 소년 마샤오쥔의 성장기를 그렸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중-소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에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샤오쥔이 동네 건달들과 함께 베이징의 ‘모스크바 식당’에서 커다란 생맥주잔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건배하는 장면이다. 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늘어선 한 무리의 철부지 소년 건달들을 향해 그들의 두목이 이렇게 외친다.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형제다!” 하지만 당시 중국과 소련은 형제가 될 수 없는 사이였다. 마샤오쥔의 최대 희망사항이 소련 제국주의를 박살내는 거라고 나오듯이, 1950년대 말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949년 신중국 초기부터 1953년 스탈린 사망 전까지 중국과 소련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마오쩌둥이 “소련 10월 혁명의 포성은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가져다줬다”고 했을 정도로, 중국은 정치·경제·이념 등 대부분을 소련에 의지했다. 당시 중국에는 ‘소련의 오늘은 우리의 내일’ ‘소련 큰형을 따라 배우자’ 등의 구호가 온 거리에 나붙었고, 중국어로 번안된 <카추샤>와 <모스크바 교외의 밤> 같은 소련 가요가 중국인의 국민가요로 불렸다. 또한 중국인들은 러시아 식당이나 소련 영화 등을 통해 처음으로 서양음식과 서양문화를 접했다.
영화 <햇빛 쏟아지던 날들>에 자주 등장하는 베이징의 ‘모스크바 식당’은 베이징 최초의 서양음식점이다. ‘나 때는’ 중·고등학교 시절 경양식집이 서양음식을 맛보게 한 곳이었다면, 베이징인들이 최초로 서양음식을 체험한 곳은 ‘모스크바 식당’이다. 지금 50대 이상 베이징인은 모스크바 식당을 ‘라오모’(老莫)라는 친근한 약칭으로 부른다. 라오모는 베이징인의 기억 속에 ‘중-소 우호’를 상징하는 장소이자, ‘포크와 나이프’로 대변되는 서양음식에 대한 우아한 환상을 심어주던 곳이다.
라오모는 1954년 10월2일 처음 문을 열었다. 오픈 당일 저우언라이 총리가 직접 테이프를 끊었고, 그날 밤 베이징 주재 소련 귀빈들과 다른 나라 외교관들을 초대해 오픈 축하 만찬을 했다. 라오모가 있는 곳은 당시 소련식 건축물을 본떠 만든 ‘소련 전람관’(베이징 전람관으로 1958년 개명) 옆으로, 일반인을 위한 식당이 아니라 주로 소련과 사회주의국가에서 오는 관료나 전문가 그리고 중국 내 고위급 관료와 지식인을 접대하는 국가급 만찬 장소였다.
중-소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던 1960년대 이후, 특히 1966년 문화대혁명 이후부터 1978년 개혁·개방 전까지 라오모는 암울한 시대를 맞았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영업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고, 어린 홍위병들에게 점령돼 ‘소련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라오모에서 밥을 먹다가 들키면 수정주의자로 몰리기도 하고, 식당 이름도 ‘모스크바 식당’에서 ‘베이징 전람관 식당’으로 바꿔야 했다. ‘베이징 전람관 식당’ 시절에는 요리도 죄다 중식으로 바뀌었고, ‘소련 수정주의자’들의 요리는 메뉴판에서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에도 베이징인들은 여전히 그 식당을 라오모로 불렀다. 라오모가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정상적인 영업을 시작한 것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인 1970년대 후반이다. 1984년 11월7일, 소련 10월 혁명 68주년을 맞아 ‘모스크바 식당’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았고 본격적인 대중식당으로 새 출발을 했다.
그러나 옛날 라오모가 누린 영광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베이징에는 미국식 패스트푸드 식당과 서양식 레스토랑이 눈 뜨면 하나씩 새로 생겨났다.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베이징을 방문한 뒤 중-소 관계도 다시 정상화됐지만, 소련은 더 이상 중국의 든든한 사회주의 맏형이 아니었다. 중국도 소련도 각자 살길을 찾아 눈부시게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전쟁 영웅이 되기를 바랐던 열여섯 살의 순진한 소년 건달 마샤오쥔이 20년이 흘러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흐르고 배에 살이 찬 교활한 성인 건달이 되어 베이징의 눈부신 햇살 속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 베이징은 ‘20년의 세월 속에서 현대 도시로 탈바꿈했고 옛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라오모도 그 옛날의 혁명과 낭만, <카추샤>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다. 내가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대신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을 선택했듯이, 라오모 역시 ‘앞으로 더 잘나갈 수 있는’ 생존법을 선택했다.
며칠 전, 베이징에 첫눈이 폭우처럼 쏟아지던 날. 아직 러시아 음식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라오모에 갔다. 천장 가득 하얀 눈꽃이 덮인 그곳에 가면 마치 한겨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듯, 사락사락 눈 내리는 자작나무숲과 바이칼호를 지나 어느덧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으로 나를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나의 러시아’로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봉사료가 10% 부과된다는 설명과 함께 ‘악’ 소리 나는 가격대가 적힌 굵직한 메뉴판이었다. 이제 막 열다섯 살이 된, ‘햇빛 찬란한’ 청춘 시절을 맞이하는 아들 녀석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식당 안을 두리번거리며 러시아인 가수가 부르는 노래 <카추샤>를 듣고 있었다. 오랫동안 주문을 못하는 나를 보자 녀석은 재빨리 눈치채고 이렇게 말했다. “엄마, 돈 없으면 빨리 나가자!”
<햇빛 쏟아지던 날들>의 주인공 마샤오쥔과 그의 건달 친구들이 자주 보던 <1918년 레닌>이라는 소련 시절 영화에서는 레닌의 경호원인 바실리가 아내에게 빵 한 덩이를 양보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전쟁이 끝나면) 빵도 있고 우유도 있고 모든 게 다 있게 될 거요.” 그런데 말입니다, 바실리! 여기 베이징 라오모에는 빵도 있고 우유도 있고 모든 게 다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비싸서 함부로 사먹을 수가 없단 말이오. 아시겠소? 바실리!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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