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은 전 지구적 현상이라고 불린 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을 쓴 68혁명 연구의 권위자이자 2018년까지 독일 빌레펠트대학 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잉그리트 길혀홀타이 교수는 “다양한 나라의 저항운동이 각기 특수한 진행 경로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주된 동원 요인은 어디서나 베트남전 반대였다”며 68혁명은 베트남전 반대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코리아’에 웃는 소녀와 1968년 한국군
1968년 2월17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국제베트남회의’가 열렸다. 참가자 3천여 명이 외친 “호! 호! 호찌민!”의 함성이 베를린 하늘에 메아리쳤다. 5월3~10일 단 일주일 만에 프랑스에선 전후 최대 시위가 일어났다. 5월 말에는 950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 시민이 파업에 들어갔다. 프랑스의 전쟁 영웅 샤를 드골은 헬기를 타고 독일로 떠나야 했다. 프라하, 베이징, 런던, 도쿄, 로마, 멕시코시티까지 전세계에 퍼진 68혁명 바이러스는 야만 종식과 인간성 회복을 외치는 함성으로 진화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카를 야스퍼스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가 1848년에서 배우듯” 21세기 아이들은 “1968년에서 배울 것입니다”라고 썼다. 1968년 베트남 ‘구정 대공세’에서 시작한 나비의 날갯짓이 전세계에 반전운동을 일으켰고 이 운동은 다른 세상을 향한 상상력으로 퍼졌다. 베트남전쟁은 1975년 막을 내렸지만 전쟁의 승패는 이미 1968년에 결정 났다.
1월15일 후에를 출발한 열차는 얼마 안 가 다낭역에 도착했다. 1965년 3월, 미국의 첫 번째 원정부대인 해병대 제3상륙부대가 들어온 베트남 중부 최대 도시 다낭은 화려한 불빛을 밤하늘에 쏟아놓았다. 다낭에 정차한 열차가 다시 달리는가 싶더니 시내 한복판 건널목에 섰다.
객차 안에서 건널목 차단기 밖에 서 있는 수십 대의 오토바이 무리와 마주했다. 차창에 얼굴을 대고 창밖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때 오토바이를 탄 한 소녀가 수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녀는 더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흔들었다. 나도 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소녀가 갑자기 휴대전화를 꺼내 두 손으로 자판을 누르더니 화면을 차창 쪽으로 내밀었다. 휴대전화 화면에 “Where are you from?”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도 휴대전화를 꺼내 “Korea”라고 쓴 화면을 창에 댔다.
소녀는 고개를 뒤로 젖힐 정도로 웃으며 더 크게 반가움을 표했다. 소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무엇인가를 쓰더니 화면을 보여줬다. 이때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낭역 쪽으로 열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갔다. 베트남 철도는 단선이기에 반대편 열차가 올 때까지 내가 탄 열차가 기다렸던 것이다. 멀어지는 열차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짧은 정차 시간이었지만 낯선 이방인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소녀에게 마음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해변의 불빛을 뒤로 밀어내며 야간열차는 계속 달렸다. 다낭 바로 아래 남쪽 도시 호이안은 1968년 1월 한국군 제2해병여단의 작전 지역이었다. 한국군 해병대는 ‘괴룡1호’라는 작전명으로 구정 대공세 때 빼앗긴 호이안 탈환 작전에 나섰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제2해병여단은 생소한 작전 환경에서도 초기 혼란 상황을 조기에 수습하고 지역 안정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케산 전투의 충격과 구정 대공세는 미군과 그 연합군에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은 물론 미군이 주둔한 지역 안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전투는 서부 산악지대나 농촌뿐만 아니라 그동안 안전지대로 여겼던 해안가 도시도 위험한 전장임을 보여주었다.
온 마을 사람들의 제삿날이 같은 날
1968년 1월24일 오전 9시30분, 마을 외곽에 탱크와 장갑차를 대기해놓은 한국군 병사들이 세 방향에서 마을을 포위해 들어갔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공터에 불러모았다. 일부 주민은 군인들이 전처럼 음식과 사탕을 나눠주려는 줄 알았다. 베트남 통역을 앞세운 지휘장교가 연설을 마친 뒤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에 맞춰 M60 기관총이 난사되고 M79 유탄 발사기가 불을 뿜었다. 도망가는 사람들에게는 수류탄이 던져졌다.
2시간 동안 학살이 계속됐다. 다른 곳에선 마을 사람 70명이 방에 욱여넣어졌다. 그리고 기관총이 발사됐다. 배 속 아기 3명, 갓난아이, 어린이, 소녀, 노인, 부녀자를 포함해 135명의 마을 사람이 죽었다. 다낭과 호이안 사이 하미마을에 있었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하미마을에선 매년 음력 1월24일 전날 집집마다 제사를 지낸다. 학살의 비극이 온 마을 사람들의 제삿날을 같게 만들었다.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죽음은 산 사람들에게도 고통의 멍에를 벗을 수 없게 했다. 군인들이 불도저로 구덩이에 밀어넣은 주검들은 누구의 부모형제이고 자식인지도 모르게 유골로 뒤섞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하미마을 사람들은 치유받지 못했다. 북베트남군이나 남베트남해방전선의 유해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모셔졌지만 적군에 학살당한 민간인들은 정권이 굳이 부각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었다.
어둠 속 창밖으로 펼쳐진 들판을 보았다. 학살이 벌어진 땅 위로 열차가 달리는 것만 같았다. 다낭을 떠나 남쪽으로 달리는 내내 억울한 영혼들의 명복을 빌었다. 베트남 철도 종단의 두 번째 구간 도착지인 냐짱역을 앞두고 열차는 바다를 끼고 달렸다. 파도가 달라붙는 해안과 멀리 바다 위에 뜬 섬과 배들이 보였다. 객실 스피커에서 곧 냐짱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베트남어와 영어로 흘러나왔다. 객실 복도에는 이미 내릴 준비를 마친 여행객들이 가방을 챙겨 몰려나와 있었다. 밤새 달린 열차가 숨을 고르며 승강장에 섰다.
객차에서 내리니 새로운 하루가 여행자를 맞았다. 냐짱의 태양은 여름의 따가움을 발산했다. 아침을 먹고 휴양시설로 이름난 리조트로 가서 몸을 씻었다. 머드탕에서 묻은 진흙을 샤워로 털어버리고 수영장에서 잠깐 물장구를 치고는 선베드로 탈출해 지친 몸을 쉬게 했다.
호찌민과 티에우의 간격
한국군 주둔 시절 냐짱 해변엔 군 휴양시설이 있었다. 잠깐의 휴식을 부여받은 군인들을 상대로 현지 상인들이 장사했다. 한국군은 상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물건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 병사들이 냐짱 해변 선베드 위에 누워 맥주캔을 비울 때 한국 병사들은 종일 바닷속에서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한국군 사병들의 참전 수당은 참전국 중 최하위 수준이었지만 이마저도 사병들은 고향으로 송금했다. 가난한 병사들에게는 콜라 한 병을 사는 것도 사치였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를 잊고 물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미국이 앞세운 응오딘지엠 정권(1956~63년)이 장악한 남베트남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협조했던 자들이 정부와 군의 요직을 차지했다. 민주주의는 폐기됐고 비밀경찰을 동원한 폭압 정치가 자행됐다. 소수 가톨릭 세력이 다른 종교를 억압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에 이어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독재 정권도 다를 바 없었다. 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였던 남베트남 혁명가들은 물론이고 다수의 평범한 시민에게도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져야 할 썩은 권력이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참전 미군 사이에서도 왜 남베트남 정권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의문이 퍼져갔다.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공허한 명목과 현실의 괴리는 메울 수 없었다. 이 문제에서 한국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많은 젊은이가 국가가 보낸 전쟁터에서 무엇을 지키려는지도 모른 채 죽었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사이공이 함락되기 전 미국은 사임한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를 망명시키기로 했다. 미 대사관에 파견된 중앙정보국(CIA) 요원들은 급히 티에우가 있는 빌라로 차를 몰았다. 티에우의 비서들이 리무진 트렁크에 옷가방을 실을 때 안에 가득 든 금덩어리들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인솔 지휘자 스넵 요원은 티에우 부인이 보이지 않자 티에우에게 부인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티에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그림 몇 점 사려고 며칠 전 홍콩에 갔어요”라고 가볍게 말했다. 옷 몇 가지만 남긴 채 수도사처럼 세상을 떠난 호찌민과 남베트남 대통령 티에우의 간극은 너무 멀었다.
이런 현실에서도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이 반공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정권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적으로 선포했다. 베트남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같은 정규군의 전면전과는 양상이 완전히 달랐다.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후에부터 남쪽 사이공까지 모든 도시와 촌락이 전선이었다. 그런 연유로 베트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에나 있었다. 따로 전선이 없는 전장에서 미군은 적을 없애기 위해 적을 찾아야만 했다.
갖은 노력에도 적을 찾지 못하면 전과를 올리기 위해 적을 만들었다. 죽은 베트남 사람은 적이어야 했다. 한국군은 물(민간인)과 물고기를 분리해 물고기인 베트콩을 잡는다고 했지만, 종종 물을 말려버리는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으려 했다. 한국군 장교들 눈에 베트남 민간인들은 공산주의자에게 세뇌당했거나 그들의 선동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였다. 베트콩의 끄나풀이거나 최소한 베트콩을 지지할 수 있는 자들이기에 민간인들은 언제든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양민 1명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현실에서는 지킬 수 없는 다짐이었다. 백마부대와 맹호사단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두환, 노태우 같은 군인들이 보기에 1980년 5월 광주 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 역시 불순분자에 오염된 적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이미 베트남에서 경험한 터였다.
냐짱 해변에 밤이 찾아오자 도시와 해변이 불야성을 이뤘다. 야자수가 늘어선 해변 산책로에는 다국적 관광객이 각기 다른 언어가 담긴 웃음으로 시간을 즐겼다. 냐짱의 파도를 뒤로하고 그랩(공유 승차 서비스) 택시를 호출했다.
호찌민 거리의 오토바이, 그들이 향하는 곳
밤 9시34분, 냐짱발 호찌민행 SE29 열차가 긴 기적을 울렸다. 내가 배정된 4인실 침대칸 객차의 다른 방들은 모두 비어 있었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지나 객실이 너무 더운 사실을 알아차렸다. 승무원을 찾아나섰다. 다음 침대칸도 방 하나를 빼고는 모두 비어 있었고 그다음 침대칸은 아예 통째로 비어 있었다. 침대칸을 모두 지나자 좌석칸이 나왔다. 빈 객차는 은하철도나 유령열차를 연상하게 했다. 한 사람이 정원수로 써도 될 만한 거대한 나무 두 그루를 객실 의자에 놓고 여행 중이었다. 다음 칸에는 승객 3명이 의자에 쪼그려 잠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1명이 더 있었다. 뒤늦게 발견한 승객은 객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의자에 어설프게 기대느니 차라리 바닥에 눕는 게 편하다.
빈 객실을 몇 칸 더 건너가 좌석에 잠들어 있는 차장을 발견했다. 번역 앱을 동원하고 손짓 발짓으로 사정을 이야기했다. 나는 차장을 데리고 길을 거슬러 내 자리로 돌아왔다. 차장은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사라졌다가 아직 잠이 덜 깬 정비 승무원을 데리고 왔다. 정비 승무원이 객차 천장에 달라붙어 스패너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돌렸다. 작업을 마친 뒤 차장과 정비 승무원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시원해질 거라고 말하고는 돌아갔다. 열차가 어느 정도 더 달리자 정말 객실 안이 시원해졌다. 텅 빈 열차로 달리는 베트남 철도의 적자를 걱정하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1월17일 아침 7시32분, 정확한 도착 예정 시간에 열차가 사이공역 승강장에 멈춰 섰다. 도시 이름은 베트남 통일 뒤 호찌민으로 바뀌었지만 철도 시간표와 승차권, 역 이름에는 옛 지명인 사이공이 남아 있다. 중국 난닝에서 출발해 국경을 넘고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1726㎞에 이르는 베트남 종단 철도를 완주했다.
식민지와 전쟁, 가난의 세월을 돌파해온 베트남은 한국과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나라다. 아픈 과거를 서로 보듬고 혐오와 대결이 아닌 이해와 존중의 미래를 함께 만드는 관계로 성장할 수 있다. 서울발 열차로 평양과 신의주를 지나 호찌민에 닿길 기원하며 사이공역을 빠져나왔다.
헉! 아침 출근길에 만난 호찌민 거리의 오토바이 무리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자 오토바이들이 판타지 영화의 대군처럼 나아갔다. 호찌민 시민들은 미래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다. <끝>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시베리아 시간여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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