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11일 저녁 6시5분, 긴 여운이 담긴 기적 소리를 승강장에 남긴 채 중국 난닝발 베트남 하노이행 T8701호 국제열차가 출발했다. 이로써 나의 첫 베트남 방문은 육로로 이어지는 여행이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전세계가 문을 걸어 잠그기 전까지 한국 사람들에게 베트남 여행은 특별한 해외여행이 아니었다. 남녀노소, 패키지여행과 자유여행 할 것 없이 베트남 여러 도시에 한국인들 발걸음이 이어졌다. 한국 여행자들은 한국 공항에서 비행기를 이용해 베트남에 도착한다. 내가 오래전 베트남 여행을 기획했을 때 가슴에 담은 것은 철도였다. 오랜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베트남 여행을 기획했을 때도 굳이 사양했다. 베트남 첫 방문은 공항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철도 인간의 고집 같은 것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5칸 침대차만 하노이로</font></font>춘절이 2주나 남아 있었지만 난닝역은 중국 각지로 이동하는 승객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춘절이 다가올수록 역은 점점 더 인파의 파도에 잠긴다고 한다. 출발 시각 한 시간도 전에 역에 도착해 보안검색을 받았다. 역 매점에서 먹을 것을 산 뒤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개찰구 앞 긴 줄에 서 있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집어삼키는 철도는 참으로 대단한 운송수단임이 틀림없다. 열차 출발 뒤 차장은 객실마다 여권을 거둬 승차인 명부를 작성했다. 깔끔한 정복에 훤칠한 미남 철도원이 여권을 돌려주고 다음 객실로 갔다. 객실에 설비된 대형 철제 물병을 들고 복도로 나가 뜨거운 물을 받아 왔다. 즉석 비빔밥과 컵라면을 식사 겸 안주로 테이블 위에 차렸다. 하노이행 열차는 어둠을 헤치고 달렸다.
차장이 문을 두드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 곧 중국 국경 역에 도착하니 하차 준비를 하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열차는 점차 속도를 줄여 핑샹역에 도착했다. 승객들은 짐을 들고 모두 내렸다. 난닝에서 출발하는 하노이행 T8701 국제열차는 복합열차이다. 좌석으로 이루어진 객차와 5칸의 침대차가 연결돼 있다. 좌석을 이용한 국내선 승객은 핑샹역에서 내리고 이들이 타고 온 객차는 분리된다. 국제선 승객이 탄 5칸의 침대 열차만 국경을 넘는다.
어둠이 깔린 승강장을 걸어 국제선 승객이 늘어선 출입국관리사무소 창구 앞에 줄을 섰다. 줄이 점점 줄어들다 마주친 무표정한 출입국사무소 직원이 여권에 출국 스탬프를 쾅 찍었다. 이제 공식적으로는 중국을 벗어났다. 짐을 들고 다시 객차에 올랐다. 출국 심사가 모두 끝났는지 한참을 서 있던 열차가 움직였다.
열차는 어느새 국경을 넘어 베트남 땅에 들어섰다. 열차가 멈춘 역은 베트남 국경 역 동당역이다. 승객들은 다시 여권과 짐을 챙겨 동당역 개찰구 앞에 섰다. 국경 경비대원이 승객들을 순서대로 한두 사람씩 출입국 관리 부스로 보냈다. 승객들이 늘어선 줄 한쪽 옆에는 환전상 아주머니가 베트남 화폐인 동 뭉치를 들고 나타났다. 몇몇 승객이 달러나 위안을 들고 모였다. 나도 당장 하노이에서 쓰기 위해 중국돈 400위안(약 7만원)을 동으로 바꿨다.
긴 기다림 끝에 베트남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여권에 찍어준 입국 스탬프 왼쪽 아래에는 증기기관차 모양이 찍혔다. 기차로 입국했다는 의미다. 2019년 2월26일, 베트남 랑선 지방의 출입구 구실을 하는 동당역이 통제됐다. 다음날 하노이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동당역에 도착했다. 특별열차 편으로 평양을 출발한 김정은 위원장은 중국을 횡단해 난닝을 거쳐 동당까지 66시간에 이르는 길을 달렸다. 김정은 위원장은 동당역에서 승용차를 이용해 하노이로 들어갔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관계의 전기가 마련될까 기대가 컸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김정은, 도널드 트럼프 두 정상이 베트남 혁명가 ‘호 아저씨’ 호찌민의 유연성을 절반만이라도 발휘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철도는 근대라는 용광로가 전세계에 만들어낸 강철 거미줄이다. 네트워크의 특성은 연결성이다. 연결만 돼 있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한국에서는 남북철도가 연결되면 만주와 시베리아로 달리는 대륙철도를 떠올렸다. 그러나 동아시아 철도망은 북쪽으로만 이어져 있지 않다. 서울역이 국제역이 된다면 중국 하얼빈이나 만저우리, 러시아 이르쿠츠크로 이어지는 북쪽 행로도 있지만 남쪽으로는 중국을 횡단해 베트남까지도 갈 수 있다. 다른 차원이었던 동남아시아 철도망과 한국이 연결되는 것이다. 현재 운행되는 베이징~하노이 열차를 서울~하노이 구간으로 연장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노이를 향해 달리는 열차는 동당역에서부터 열차편명이 T8701에서 MR2로 바뀐다. 베트남 철도의 주간선은 미터 궤간이라고 부르는 1000㎜의 협궤 철도다. 반면 중국 철도는 국제 표준궤로 한국과 같은 1435㎜이다. 궤간 호환이 안 되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서 달리려면 바퀴 모듈인 대차를 교체해야 한다. 중국에서 몽골이나 러시아로 왕래할 때나 러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열차는 차량기지에서 이 작업을 한다.
그런데 핑샹역에서도 동당역에서도 바퀴 장치 교환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밀은 선로에 있었다. 베트남 철도 노선 중 유일하게 동당~하노이 구간은 협궤와 표준궤를 같이 깔았다. 이른바 복합궤도로, 표준궤를 이용해도 협궤를 이용해도 열차가 달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동당에서 하노이까지 158㎞는 중국과의 원활한 국경 열차 운영을 위해 표준궤를 부설했다. 덕분에 장시간 걸리는 대차 교환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중국 철도 최초의 국제노선은 쿤밍을 출발해 하노이를 거쳐 통킹만 해안도시 하이퐁으로 이어지는 노선이다. 프랑스는 청일전쟁에 패해 힘이 떨어진 청나라의 조정을 비집고 들어가 윈난 철도로 불리는 쿤밍~하이퐁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1900년 건설이 시작된 윈난 철도는 남쪽 베트남부터 구간별 완공을 거쳐 1910년 쿤밍까지 전 노선이 완공됐다. 이런 연유로 중국 철도는 표준궤를 채택했지만 쿤밍~하노이~하이퐁 구간은 베트남식 미터 궤간 협궤가 적용됐다.
식민지 철도답게 윈난 철도는 건설 과정에서만 적어도 1만2천 명의 노동자가 말라리아나 사고로 죽어간 마의 노선이었다. 프랑스는 자국 생산품을 중국 시장에 팔고 윈난 지역의 천연자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식민지 베트남의 쌀과 생선, 나무, 석탄 등을 중국에 공급해 이익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베트남과 중국을 잇는 철도를 건설했다. 근대를 연 철도였지만 건설 주체가 누구였는지에 따라 철도는 축복이기도 지옥이기도 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혼잡한 소음에 깼다. 지난밤 10시께부터 새벽 2시까지 국경을 넘는 법석을 떠느라 잠을 설친 탓에 머릿속이 멍했다. 난닝에서 하노이까지 356㎞를 밤새 달린 열차는 어느새 종착역인 하노이 잘럼역에 도착했다. 새벽 5시30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승강장에 발을 디뎠다. 육로로 하노이에 입성하는 순간이었지만 정신을 먼저 차려야 했다. 잘럼역은 하노이시 외곽의 작은 역이다. 옛 경의선 신촌역이나 작은 시골 역 모습과 닮았다. 국제선을 취급하는 역이라면 떠오르는 규모나 격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국경을 넘는 열차가 출발하는 잘럼역이 부러웠다. 섬에 갇힌 폐쇄회로 속의 신세라면 번듯하고 으리으리한 역사를 가진들 무엇하랴.
<font size="4"><font color="#008ABD">휴일 호안끼엠 호숫가 카페에서 모닝커피 한잔</font></font>잘럼역 앞마당에 대기하던 택시기사와 간단한 흥정을 마치고 하노이 시내로 향했다. 빈 거리를 달려 호텔에 짐을 맡긴 뒤 막 깨어나는 도시의 뒷골목 식당을 찾았다. 뜨거운 국물과 그 속에 담긴 쌀국수를 후루룩 넘기자 잠이 확 달아나면서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하노이 시내 명소인 호안끼엠호수를 산책했다. 휴일 이른 아침부터 호수 곳곳에는 시민들이 모여 체조를 하거나 춤을 추고 있었다. 손을 뻗고 다리를 움직이는 율동 속에 여유가 가득했다. 전통 무술 같은 동작부터 신나는 왈츠까지 무리마다 다른 테마의 선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호숫가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한잔 마시고 택시를 잡아 바딘 광장으로 갔다. 광장 중앙에는 베트남 국기인 대형 금성홍기가 펄럭였다. 국기 게양대는 1945년 9월2일 호찌민이 광장을 가득 메운 민중 앞에서 감격에 찬 채 독립선언서를 읽어내려간 자리였다. 광장을 돌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무덤을 닮은 호찌민 무덤으로 들어갔다. 한 치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베트남 병사 두 명의 호위 아래 호찌민이 유리관 안에 누워 있었다. 혁명가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져 밀랍인형처럼 보였다.
호찌민은 1969년 9월2일, 자신이 24년 전 독립을 선언했던 그날 생을 마감했다. 호찌민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적대 관계인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시민들도 애도를 표했다. 호찌민은 유언으로 유해를 화장해 조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나누어 뿌리고 장소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주석이나 되는 분이 어찌 폐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를 신느냐는 물음에 “인민들이 맨발로 다니는데 어찌 내가 고급 신발을 신을 수 있겠소”라고 답했던 검소한 혁명가다운 유언이었다. 호찌민의 바람과 달리 후계자들은 신화가 돼버린 호찌민이 계속 필요했다. 유언은 기각됐고 주검은 방부 처리돼 보존됐다. 어쩌면 호찌민이 꿨던 꿈에도 방부제가 덧발라지면서 인민을 위한 공화국으로 가는 길도 미로가 돼버렸는지 모른다.
프랑스는 베트남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치 통치에 대한 프랑스의 저항은 영광스러운 항쟁이었지만 프랑스 통치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은 테러리즘이었다. 호찌민은 신생 독립국 베트남민주공화국의 기초를 다져야 하는 동시에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 열강의 이해관계 속 빈틈을 뚫어야 했다. 내부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좌파 이상주의자들의 고집도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1946년 3월5일,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는 베트남의 위상에 대해 합의했다. 베트남을 ‘자유국가’로 인정하지만 그것은 프랑스 연합 내 자치정부를 의미했다. 프랑스군 1만5천 명의 주둔도 허용됐다. 합의 내용이 하노이 신문에 실리자 민족주의자들이 먼저 들고일어났다. 호찌민은 반역자라는 비난이 일었다. 사람들은 완전독립이 아닌 자치권은 굴욕적으로 민족을 배신한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호찌민을 따랐던 독립투사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호찌민은 합의서에 대한 설명을 들으러 시립극장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합의서가 독립으로 가는 출발점이지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역설했다.
호찌민은 미국의 시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가 쓴 의 롤모델 같은 혁명가다. “급진주의자들은 유연해야 하며, 유동적인 정치적 상황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하며, 자신들의 전술 때문에 스스로가 친 덫에 걸려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로 빠지지 않고 사건의 흐름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통제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알린스키의 말은 호찌민 삶에서 따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과 상관없이 늘 최선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때때로 최선이 선의 적이 돼 나타난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렵게 나아가려는 한 걸음을 비난하며 열 걸음 밖의 깃발을 외면한다고 비웃는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혁명의 원칙과 순수성을 지킨다고 착각했다.
1월의 하노이는 쌀쌀했지만 경량다운파카 하나로 충분히 버틸 만한 날씨였다. 택시에서 내린 다음 장소는 B-52승리박물관이다. 박물관 안뜰에는 추락한 미 공군 B-52기 잔해가 자연사박물관의 멸종동물 전시물처럼 놓여 있다. 베트남전쟁 시절 워싱턴은 수시로 하노이에 융단폭격을 시도했다. B-52가 동체 아래 폭탄 창을 열고 폭탄을 뿌리면 그 아래 땅은 잿더미가 됐다. 학교도 병원도 마을도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은 무고한 사람들 생명을 제물로 요구했다.
1972년 7월, 미국의 젊은 배우가 하노이에 도착해 공습 중단을 호소했다. 그는 베트남전쟁은 미국 정부의 위선과 거짓이 만든 것이라며 당장 범죄행위를 멈추라고 소리쳤다. 제92회 아카데미 작품상 시상자로 나서 을 호명하고 봉준호 감독과 포옹한 제인 폰다였다. B-52승리박물관 정문 길 건너편에는 분짜를 파는 허름한 동네 식당이 있다. 잘 구워진 돼지고기와 쌀국수의 조합이 하노이에 있음을 실감 나게 하는 곳이다.
<font color="#008ABD">글·사진 </font>박흥수 기관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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