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베트남 국경 열차를 타기 위해 인천공항을 출발해 도착한 곳은 중국 충칭이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전략사무국(OSS)은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 호찌민의 베트남 독립 부대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군의 동아시아 전력을 무력화하려 노력했다. 호찌민은 베트남과 같은 처지인 조선의 혁명가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었다. 3·1운동이 있던 해인 1919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잡지 에 ‘인도차이나와 조선’이라는 글을 싣기도 했다. 호찌민은 코민테른이 러시아 모스크바에 동아시아 혁명가들을 위해 세운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재직 시절에도 조선 혁명가들과 교류했다. 이 때문에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호찌민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는 존재이자 항일투쟁전선에서 힘을 모아야 하는 협력자이기도 했다.
조선인과 베트남 독립투사들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했다. 중국 광저우에 있는 황푸군관학교에는 조선인과 베트남 혁명가들이 식민지 해방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대거 입학했다. 1925년 이후 의열단원들은 황푸군관학교에 입소해 전문 군사교육 과정을 이수했다. 약산 김원봉은 쑨원의 지원으로 장제스와 교섭해 의열단원들의 군관학교 입학 길을 열었다. 또 자신이 4기생으로 입교해 전 과정을 이수했다.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200여 명은 조선의용대의 주축이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서울로 돌아가진 못한 임시정부 사람들</font></font>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한 이후에는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의 뼈대가 됐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으로 조국을 되찾는 최후의 무장항쟁을 벼르고 있었다. ‘독수리 작전’이라 이름 붙인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해 OSS와 합동훈련을 마친 광복군은 출동의 날만 기다렸다. 이들이 무장한 채 태극기를 앞세워 조선 땅에 들어왔다면 한국의 역사는 또 다른 줄기로 흘렀을 것이다.
베트남 혁명가들은 일본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행동에 나섰다. 1945년 5월부터 호찌민의 게릴라 부대는 일본군 진지를 공격했다. 미군은 ‘사슴팀’이라는 작전명으로 베트남 북쪽 국경에 군사교관을 투입해 베트남 게릴라 부대들의 군사훈련을 지도했다. 7월에는 50여 명의 OSS 특수전 부대가 하노이 북서쪽 산악 지대에 낙하산으로 투입됐다. 이 요원들은 보응우옌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무장 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8월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호찌민은 빠르게 움직였다. 중국의 난닝·쿤밍 일대 베트남 국경과 가까운 지역의 베트남 항일 전사들은 하노이로 입성하기 위해 속속 하노이 외곽에 집결해 진군 명령을 기다렸다. 8월19일 베트남 무장 선전대와 농민이 새벽부터 하노이 시내로 몰려들었다.
베트남행 국제열차에 몸을 싣기 위해 난닝으로 떠나기 전 찾아간 충칭 임시정부 청사는 관람객이 없어서 그랬는지 산속 절처럼 고요했다. 그 때문인지 더 숙연한 마음으로 전시관 안을 걷다가 익숙한 사진을 만났다. 임시정부 사람들이 중앙 계단에서 귀국을 앞두고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다시 사진을 찬찬히 살펴봤다.
사진을 찍은 날짜는 1945년 11월3일이다. 베트남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충칭의 조선 혁명가들에게 서울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8·15 광복을 맞이하고도 한참이 지났는데 아직 충칭에 있던 사람들 심정은 어땠을까? 사진 속 얼굴들은 모두 굳어 있다. 얼굴마다 담긴 처연한 표정 속에 광복의 기쁨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설렘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은 지연되다가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가됐다.
임시정부 청사의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갔다. 일본에 일격을 가하려고 혼신을 다해 이 계단을 뛰어다녔던 사람들이 느꼈을 상실이 어땠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친일파가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되살아났다. 임시정부 인사들에 대한 모욕과 테러, 암살이 미 군정의 묵인과 권력욕에 눈먼 자들의 비호를 받아 일어났다.
임시정부 청사를 나와 지난해 복원된 광복군 사령부 건물을 찾아나섰다. 충칭 번화가인 해방비 광장에서 양쯔강변을 향해 남쪽으로 걸어가면 10분도 채 안 돼 말끔하게 새로 단장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만날 수 있다. 다 쓰러져가던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이 재개발에 밀려 아예 철거된 것을 중국 당국과 협의해 복원했다. 기와를 얹고 벽돌로 마감한 4층 건물이 제법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렇게라도 옛 흔적을 살려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 광복군 청사 건너편 중국 식당에서 창밖의 청사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지독히 매운 사천식 훠궈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하노이에서 이틀째 날인 1월13일, ‘하노이 힐턴’이란 별명이 붙었던 ❶호알로감옥을 찾았다. 호알로감옥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항불 전선에 나섰던 베트남 전사들을 수감한 곳이다. 하노이의 서대문형무소 같은 곳이다. 베트남 독립투사들은 발에 족쇄를 찬 채 고문과 병으로 고통받았다. 감옥에 설치된 단두대는 수감자들의 마지막 운명이 어떤 길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호알로감옥이 베트남전쟁 때는 공습에 나섰다 격추된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의 수감시설로 쓰였다. 이때 하노이 힐턴이란 별명이 붙었다. 이곳을 거쳐간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버락 오바마와 미국 대통령직을 걸고 공화당 후보로 맞붙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다. 베트남전 당시 매케인의 아버지는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다. 하노이에선 거물급의 아들인 매케인을 석방해 미국과의 협상을 좀더 원활히 하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수감된 자가 먼저 석방돼야 한다는 매케인과 미군 쪽의 주장에 따라, 매케인은 5년6개월 동안 호알로감옥에서 생활해야 했다.
배를 채운 뒤 하노이 북쪽 홍강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붉은 강을 넘어 하노이 시내로 기차가 다니도록 철교가 놓여 있다. 1899년 공사를 시작해 1902년 완공된 ❷롱비엔 철교다. 철골 트러스교로 에펠탑을 설계한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했다. 에펠의 첫 일터는 프랑스 파리 생라자르역 근처 철공소였다. 급속히 발전하는 철도라는 파도 위에 올라탄 공장에서 에펠은 기술자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선각자의 눈은 달랐다. 강철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설계와 건축 방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프랑스의 수많은 철교, 강철과 유리로 된 대담한 헝가리 부다페스트역을 비롯해 유럽을 넘어 남미까지 수많은 철도역과 다리가 에펠의 손길을 거쳤다. 마침내 아시아 식민지 하노이 홍강 위에 ‘강철의 마법사’로 불리는 에펠의 작품이 걸렸다. 롱비엔 철교는 홍강을 넘어 하노이와 베트남 북쪽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로 쿤밍~하노이~하이퐁 철도 노선을 이어주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베트남전 때 중국 군수물자 유입 ‘전략 인프라’ </font></font>베트남전쟁 때 롱비엔 다리는 중요한 전략 인프라였다. 북베트남을 지원한 중국은 철도를 통해 하노이로 많은 군수물자를 보냈다. 이 때문에 롱비엔 철교는 미군 폭격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다. 롱비엔 철교를 둘러싼 숨바꼭질은 전쟁 내내 이어졌다. 미군이 공습으로 다리를 파괴하면 하노이의 다리 복구대는 밤새 복원해놓았다. 나중에는 미군 포로를 복구 작업에 동원하기도 했다. 녹이 잔뜩 묻은 롱비엔 철교의 과거는 1900년 완공된 한강철교와 닮았다. 식민 시기를 겪어냈고 전쟁 속에 폭격으로 끊겼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마음속으로 두 다리를 자매결연해줬다.
롱비엔 철교에서 시내로 돌아가려고 택시를 잡으려 하니 모든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이 구글 지도에 의지해 시내를 향해 걸었다. 퇴근 시간에 접어든 길은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로 뒤덮였다. 몽골인들이 말 위에서 먹고 잘 정도로 말을 잘 다룬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오토바이의 달인이다. 오토바이 무리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해 질 녘 서해안 가창오리 떼가 군무를 벌이면서도 서로 부딪치지 않는 마법을 부리는 것 같다. 뒷자리에 앉은 이들은 몽골 사람들이 마상 무예를 선보이듯, 오토바이 위에서 앞사람을 잡지도 않은 채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검색하고 동영상을 본다.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도 있다. 작은 오토바이 한 대에 4인 가족이 타거나, 도저히 오토바이 한 대로는 적재가 불가능해 보이는 양의 화물을 싣고 달리기도 한다. 거리에서 서커스가 펼쳐지는 듯하다. 분명히 존경할 만한 능력이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❸레닌 공원이었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레닌 동상이 서 있는 도시는 흔치 않다. 사회주의혁명이니 레닌주의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건 재미없는 구식 가요를 듣는 것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는 시절이다. 그럼에도 하노이의 레닌 동상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레닌 동상 앞에 새해를 축하하는 ‘2020’이란 거대한 숫자 조형물이 설치됐기 때문이다. 2020년에도 살아 있는 레닌 정신은 무엇일까?
호찌민은 레닌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레닌은 사회주의혁명이 각성된 전위당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전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식민지 해방운동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함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찌민은 농민이 90%인 베트남의 현실에서 전통 교리에 따라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고집에 힘이 빠졌다. 미미하거나 존재감 없는 세력으로 무엇을 도모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레닌과 작별한 뒤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을 찾아 밤길을 걸었다.
스마트폰 앱으로 여행자 추천 수가 많은 음식점을 몇 개 골라, 지도 앱의 인도를 받았다. 발전하는 정보기술(IT)은 이방인이 길을 몰라 헤매는 일을 대폭 줄여줬다. 길을 걷다가 반가운 골목을 만났다. 철길이 마을을 뚫고 나 있었다. 아마도 철길이 먼저 생겼겠지만 기차가 사람들 생활 공간을 살갑게 스치는 풍경이 있는 곳이다. 주택 사이 철길 위를 걷는 사람들 표정이 즐거워 보였다. 철길은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이라도 동심으로 돌려놓는 힘이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소화도 시킬 겸 하노이의 밤거리를 유랑했다. 정처 없는 발걸음은 숙소 근처에 있는 ‘하노이 노트르담’이라고 부르는 ❹성요셉 성당까지 이끌었다. 성당 앞은 차량과 오토바이, 행인이 뒤섞인 채 흥겨운 번잡함을 담고 있었다. 번잡함을 뚫고 성당 건너편 삼거리로 걸어가 특별한 가게를 몇 개 만났다. 사회주의 선전 포스터를 파는 곳이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호찌민 초상화와 미국과 전쟁할 때 인민을 독려하던 포스터나 엽서가 가득 차 있다. 사회주의국가의 번영, 희망찬 미래를 담은 포스터 속 사람들은 빛나는 광채 속에 약속의 땅을 향해 웃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사회주의는 이제 이런 “올드 프로파간다(사상 선전) 숍”에서나 만나는 과거가 되었다.
이어진 방랑 끝에 호안끼엠 호숫가 펍(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길거리를 가득 메웠던 하노이 시민들을 TV 앞으로 잡아끄는 이벤트가 열리는 날이었다. 대형 TV에선 U-23(23살 이하) 아시아 선수권 축구대회 베트남과 요르단의 경기를 생중계하고 있었다. 베트남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감독이 그라운드를 향해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축구가 한국과 베트남의 거리를 좁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시간여행을 온 듯한 식당칸</font></font>호텔에 맡겨놓은 짐을 챙겨 택시를 타고 ❺하노이역으로 갔다. 웅장한 하노이역이 어둠 속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노이발 후에행 SE1 야간열차는 1번 승강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인쇄한 승차권의 바코드로 개찰구를 통과하고 승차권에 표시된 객차를 찾아 올라탔다. 야간열차 침대칸 승객 대부분은 서구인이었다. 4인실 침대칸 탁자 위 꽃병이 인상 깊었다. 꽃병 안의 예쁜 꽃이 여행자를 환하게 맞아주었다.
밤 10시20분, 정시에 열차가 출발했다. 밤거리 오토바이들이 열차와 나란히 달리다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사라져갔다. 하노이 거리의 불빛이 작별인사를 했다. 객실 복도에 설치된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에는 차내 온도와 속도가 표시됐다. 열차는 시속 60~80㎞로 달렸다. 슬슬 객차 탐방에 나섰다. 침대칸들을 지나자 좌석칸이 나왔다. 좌석은 깔끔한 인조가죽 시트로 돼 있었다. 웬만한 선진국 열차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마지막 칸은 식당칸인데, 늦은 시간이라 영업은 끝난 상태였다. 승무원들이 모여서 쉬고 있었다. 식당칸만이 복고풍 나무 의자로 돼 있어, 시간여행을 온 듯 과거의 맛을 풍겼다. 열차 탐방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깔끔한 객실에 적당히 흔들리는 열차라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font color="#008ABD">글·사진 </font>박흥수 기관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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