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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2년 뒤, 봄은 어디에


‘아랍의 봄’이 불러온 이슬람주의 정치세력 이집트·튀니지 잇따라 집권… 독재 우려와 물가 폭등 등으로 고단한 민심
등록 2013-03-28 21:46 수정 2020-05-02 04:27

무함마드 부아지지’를 기억해보자. 북아프리카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부지드에서 청과 노점상으로 살아가던 스물여섯 청년 말이다. 2010년 12월17일 오전 노점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저울과 손수레를 압수당했다. 팔던 과일과 채소는 길바닥에 동댕이쳐졌고, 얻어맞기까지 했다. 분했다. 항의하러 시청으로 달려갔다. 정문에서부터 가로막혔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형제단, 엔나흐다와 자유정의당의 뿌리
시청 근처엔 주유소가 있었다. 단속반에 횡액을 당한 지 불과 1시간 남짓 만인 이날 오전 11시30분께, 부아지지는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스스로 불을 댕겼다. 는 2010년 12월31일치에서 부아지지의 여동생 사미아의 말을 따 “오빠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가족 8명의 생계를 혼자서 책임져왔다”고 전했다.
“우리는 모두 부아지지다.” 부아지지가 몸을 불사른 날 오후 시디부지드에서 시작된 항의시위는 삽시간에 튀니지 전역으로 번져갔다. 24년 철권을 휘둘러온 독재자 벤 알리는 부아지지가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지만, 저항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2011년 1월4일 부아지지는 끝내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열흘 뒤, 벤 알리 정권도 막을 내렸다. ‘아랍의 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 봄이 꽃을 피운 곳은 이집트였다. 벤 알리가 쫓겨난 지 불과 11일 만에 카이로 중심가 타흐리르(해방) 광장에서 반독재 시위가 시작됐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끝장내는 데는 꼭 18일이 걸렸다. 은퇴한 독재자의 빈자리를 차지하려던 탐욕스런 군부를 막아낸 것도 거리의 시위대였다. 봄기운이 완연해졌다.
2011년 10월23일 튀니지에서 제헌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1956년 독립 이래 최초의 민주선거였다. 새 헌법안을 마련할 제헌의원 217명을 뽑은 당시 선거에서 37.04%의 지지율로 제1당에 오른 건 이슬람주의 정당 엔나흐다였다. 1981년 창설된 이슬람주의 운동단체를 모체로 한 엔나흐다는 벤 알리 정권 아래서 온갖 탄압을 당해오다, 혁명 이후에야 합법 정당의 지위를 되찾았다.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1년 11월28일과 2012년 1월11일 두 차례로 나눠 치러진 총선에서 이슬람주의 정당인 자유정의당이 37.5%를 득표하며 무난히 제1당에 올랐다. 2012년 6월 치러진 대선에서 독재자의 마지막 총리와 맞붙어 승리를 거둔 것도 자유정의당 후보로 나선 무함마드 무르시였다.
엔나흐다와 자유정의당은 뿌리가 같다. 두 정당 모두 아랍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막강한 풀뿌리 이슬람 조직 무슬림형제단(알익환 알무슬리문·이하 형제단)이 모체다. ‘아랍의 봄’이 불러온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의 잇따른 집권을 두고, 아랍권 전문 인터넷 매체 가 ‘형제단화’(Brotherhoodization)라고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28년 이슬람 신학자 하산 바나가 수에즈운하 노동자 6명과 함께 시작한 형제단은 3월로 창설 85주년을 맞았다.
1980년대 들어 정치권 진입 시도
‘신은 우리의 목표이며, 코란은 우리의 헌법이다.’ 이 정리한 자료를 보면, 창설 초기 형제단은 이슬람식 가치관 전파를 위한 일종의 선교단체였다. 바나는 이집트 전역에 지부를 설치하고, 이슬람 사원(모스크)과 학교·체육단체 등을 만들면서 회원 수를 늘려갔다. 1940년대에 이르면 이집트에서만 회원이 2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몸집이 커졌고, 이슬람권 전역으로 영향력이 퍼져나갔다. “형제단은 모든 이슬람주의 운동단체의 뿌리”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52년 영국 식민통치가 막을 내렸다. 그해 7월23일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청년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파루크 왕조를 무너뜨렸다. 이미 이집트 최대 조직으로 성장한 형제단은 애초 나세르 진영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은 “(나세르에 이어 1970년대 대통령을 지낸) 안와르 사다트가 한때 청년장교단과 형제단간 연락장교 노릇을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1954년 나세르 대통령을 겨냥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면서 두 진영의 사이가 틀어졌다. 사건의 배후로 형제단을 지목한 나세르 정부는 즉각 단체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집트 전역에서 수많은 형제단 회원들이 체포·구금되는 등 대대적인 탄압도 이어졌다. 형제단이 ‘비합법 지하조직’이 된 건 이때부터다. 1966년엔 무지한 사회(자힐리)와 맞선 투쟁(지하드)을 강조해온 형제단의 지도자 사이드 쿠틉이 체포·처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키운 형제단은 198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주류 정치권 진입을 시도했다. 1984년엔 와프드당과, 1987년엔 노동당·자유당과 각각 연대해 무바라크 정권과 맞선 게다. 2000년엔 무소속으로 출마한 회원 17명이 의회에 진출했고, 2005년 선거에선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형제단 후보들이 전체 의석의 20%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독재자는 당황했다. 탄압의 광풍이 다시 불어왔다. 형제단 지도부 수백 명이 투옥됐고, 정치행위와 정당활동은 특정 종교를 배경으로 할 수 없다는 내용의 개헌까지 이뤄졌다. 무소속 후보의 대선 출마가 금지됐고, 반테러 입법을 통해 정보기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집회·시위까지 제한됐다. 봄이 오기 전까지, 겨울은 혹독했다.
‘이슬람이 해법이다.’ 2011년 혁명 이후 형제단은 자유정의당을 창당하고,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나섰다. 총선 승리에 이어, 후보를 내지 않겠다던 애초 약속을 깨고 대선까지 도전했다. 혁명의 동지들이 서서히 멀어져갔지만, 자유정의당 후보로 나선 무르시는 결선투표를 거쳐 2012년 6월 무난히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랜 탄압의 세월을 딛고 형제단은 명실상부한 집권세력이 됐다. 무르시 대통령 취임 9개월여, 형제단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존엄 회복을 위한 금요성일.’ 지난 3월22일 카이로 남동부 모카탐 지역의 나푸라 광장에서 이집트 야권이 주최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무바라크 정권 시절엔 그곳 광장 부근을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체포의 이유가 됐다. 광장 건너편에 형제단의 본부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르시 대통령 집권 이후엔 사정이 표변했다. 나푸라 광장은, ‘혁명의 성지’인 타흐리르 광장 다음으로 시위대가 즐겨 찾는 장소가 됐다. 단 2년의 세월이 뒤집어놓은 세상이다.
형제단 권력 독점에 반대 시위 들끓어
이날 시위를 촉발한 사건은 지난 3월16일 벌어졌다. 당시 일부 젊은이들이 형제단 본부 건물 주변에서 반정부 그라피티(스프레이 벽화)를 그리겠다고 나서면서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건물 경비원이 그라피티 작업을 가로막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취재하던 사진기자와 일부 젊은이들이 경비원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갔다. 야권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 이유다. 형제단의 권력 독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지난해 11월 이후 이집트에선 대규모 시위가 다시 일상이 됐다.
집권 초기, 권력의 고삐를 놓지 않으려는 군부와 맞서야 했던 무르시 대통령은 과감한 숙군 작업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그 정점은 지난해 11월22일 전격 발표한 이른바 6개 항에 이르는 ‘헌법선언’이다. 선언 제6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혁명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대통령은 어떤 법적 조치라도 내릴 수 있다. 헌법선언이나 법률 등 이와 관련해 대통령이 내린 결정은 최종적인 것으로, 어떤 경우라도 법적 다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타흐리르가 들끓었다. 성난 시위대는 대통령궁을 에워쌌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등 35개 조직을 중심으로 범야권 연대 조직인 ‘구국전선’이 꾸려졌다. 반정부 시위대에 맞서 형제단 지지자들은 ‘친위 시위’를 벌였다. 무르시 대통령은 결국 12월8일 헌법선언을 스스로 철회했지만, 반정부 시위대와 친정부 시위대가 곳곳에서 충돌하면서 유혈 사태가 속출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이때부터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 사태를 △무바라크 정권을 무너뜨린 반정부 시위 △혁명 이후 반군부 투쟁에 이어 이집트 혁명의 ‘제3기’로 분류하고 있다.
튀니지 상황도 엇비슷하다. 혁명 이후에도, 고단한 이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17%를 웃도는 공식 실업률과 폭등하는 물가, 절대권력의 공백이 만들어낸 치안 불안까지 겹치면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엔나흐다 역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이유다. 지난 2월6일 야권의 유력 정치인 초크리 벨라이드(47)가 암살당한 직후부터 벌어진 대규모 시위 사태는 결국 함마디 지발리 총리의 사임으로까지 이어졌다. 엔나흐다 쪽은 조기 총선을 약속한 뒤에야 알리 라라예드 신임 총리 정부에 대한 의회의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혁명 2년 뒤, 청년의 여전한 죽음
지난 3월12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 한복판에 자리한 시립극장 앞에서 한 청년이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담배 행상으로 전전하던 스물일곱 청년 압델 카드흐리다. 카드흐리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뒀다. 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그가 치료받은 병원의 이름을 눈여겨 적어놨다. ‘모하메드 부아지지 기념 중증화상센터.’ 혁명 2년여, 봄은 어디쯤 와 있는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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