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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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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없이 축구하는 EU

집권당 연쇄 붕괴 등 정치 위기 불러온 유럽 재정위기… 쇠락한 미국, 책임 꺼리는 중국 등 위기 넘을 글로벌 리더십 부재
등록 2011-11-17 11:32 수정 2020-05-03 04:26

“감독 없이 축구 경기를 하는 모양새다.”
지난 10월 초 이순우 우리은행장은 세계경제 위기와 관련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막힌 비유다. 커스티 휴즈 영국 옥스퍼드대학 국제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이렇게 표현했다. “정치와 시장의 대결이라면, 정치가 현재로서는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있다. 경제위기는 이제 개별 국가와 유럽연합(EU) 전체의 정치적 위기로 변하고 있다.”

경제위기는 집권당의 무덤
재정적자로 촉발된 경제적 위기가 정치적 위기를 낳고, 그 위기가 다시 경제위기를 부추기는 악순환이다. 지도력의 위기가 유럽을 흔들고 있다. 그 위기는 개별 국가에서, 또 EU 전체 단위에서 드러나고 있다. 17개국이 유로존이라는 한 틀에, 27개 회원국이 EU라는 한 틀 안에 묶여 있다 보니 더욱 그러하다. 위기에서 지도자가 빛나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EU는 그 빛나야 할 지도자가 없다. 경제위기는 ‘목숨이 9개다’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도 쫓아냈다. 베를루스코니는 11월8일 의회에 제출한 예산지출 승인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총리직 사임을 선언했다. 온갖 성추문과 부패 스캔들에도 아랑곳 않고 버티던 그가 결국 경제위기에 항복했다. 이탈리아는 위기를 수습해야 할 수장인 베를루스코니 자체가 위기의 원인이라 지목했다. 유럽의 위기를 경제적 위기뿐 아니라 정치적 위기라고 평가받게 만든 대표적 인물이다. 가 베를루스코니가 즉각 사퇴하지 않고 경제개혁안이 의회에서 통과된 뒤 물러나겠다고 밝힌 것을 두고 “왜 기다리나? 일찍 그만둘수록 좋다. 가능한 한 더 이상의 지연과 불확실성을 피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한 데서 잘 드러난다.
경제위기 이후 지난 2년간 유로존에서 베를루니코니까지 합쳐 7명이 총리직을 내놨다. 경제위기는 좌파든 우파든 가릴 것 없이, 현 집권 정당에 무덤이 되고 있다. 그것이 설령 과거 정부에서 씨앗이 뿌려졌더라도, 그 책임과 비난은 현 정권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극우 정당들이 득세하는 것도 경제난으로 살림살이가 팍팍해지고 집권세력에 대한 불만이 높은 가운데 반유럽통합 및 반이민 정서 등을 자극하는 인기 영합적 정책에 유권자가 끌려가는 탓이 크다.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구제금융안과 관련해 국민투표를 요청해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구제금융을 받은 아일랜드는 지난 2월 총선에서 집권 공화당이 14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 포르투갈도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뒤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됐다. 지난해 6월 슬로바키아 총선에서도 제1야당인 중도좌파 스메르 주도의 연립정부가 무너졌다. 결국 지금의 형국은 선거가 치러지기만 하면 현 정권의 패배로 이어지고 있다. 각국의 집권 정부가 국민이 누리는 사회복지 혜택을 대폭 삭감하는 긴축정책을 줄줄이 내놓는 상황에서 여당이 국민에게 인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향후 선거에서도 이런 추세는 이어질 전망이다. 스페인은 11월20일 치러지는 총선에서 여당의 완패가 예상되고 있다. 내년 4월 대선 1차 투표가 실시되는 프랑스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재선도 비관적이다. 프랑스 일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은 프랑수아 올랑드(32%), 사르코지(21%), 국민전선(NF)의 마린 르펜(16%) 순이었다. 프랑스 국민의 60%는 올랑드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독일도 2013년 총선이 예정돼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연립정권은 최근 7번의 지방선거에서 모두 패배했다. 최근 조사에서는 유권자의 절반이 2013년 차기 총선에서 메르켈 정부의 퇴진을 희망했다. 내년 3월에는 슬로바키아가 조기 총선을 치른다. 슬로베니아도 10월 대선과 총선이 예정돼 있다. 모두 현 집권세력의 고전(苦戰)과 정권교체가 예상되고 있다.

레임덕으로 대외 문제 대처 곤란
“못 살겠다, 바꿔보자.”
이만큼 매력적인 구호도 없다. 가수 이정현의 노래 가 과거 선거 캠페인송으로 인기를 끈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유럽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무소속 박원순 후보의 당선과 ‘안철수 현상’은 현 정권 등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거부이자, 제3의 대안세력에 대한 갈망과 닿아 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로 걸출한 인물이 없는 상황인데도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는 드물게 재선을 낙관하기 힘든 최대 이유도 경제위기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찰스 쿱찬 전 유럽국장은 미국 (NPR) 인터뷰에서 “유럽 전역에서 유로존을 안정화하려는 노력에 유권자가 반발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지도자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최근 위기의 출발이 된 그리스에서 2차 구제금융안 확보를 주임무로 하는 과도 연립정부가 11월11일 출범했다. 과도 연정을 이끌 총리에는 그리스 중앙은행 총재와 유럽중앙은행(ECB) 부총재를 지낸 경제전문가 루카스 파파데모스(64)가 지명돼 정국 혼란이 한 고비를 넘겼다. 이에 따라 국민투표 사태를 계기로 촉발된 그리스 정국 혼란이 일단락돼 2차 구제금융안 비준 및 이행, 1차 구제금융 중 6회분(80억 유로) 집행 등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걷히게 됐다. 그리스 총선은 내년 2월19일께 치러질 전망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후임에 마리오 몬티 전 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새 정부 구성을 위한 조율에 나선 조르조 나폴리타노 대통령이 11월9일 몬티를 종신 상원의원에 지명한 것은 새 총리로 선출하기 위한 준비 조처로 해석됐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했다. 자국의 문제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선거 앞 레임덕 상황에서 대외 문제를 제대로 이끌기 어렵다. 국책 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최근 유럽 경제위기 관련 보고서에서 “재정위기 대응 과정에서 각국 간의 이견으로 정치적 리스크가 시장 불안을 가중시킨 바 있으며, 회원국 내 여당의 지지율이 낮아지고 정권교체를 위한 선거가 임박한 점도 강력한 정책 공조가 어려움 배경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유로존과 EU의 현 위기가 그 틀에 묶인 데서 오는 만큼, 그 해법도 틀의 운영과 맞물려 있다. ‘EU 차원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이미 2008년 12월14일 영국 일간 에 ‘유럽 지도력의 위기’라는 기고가 실렸다. 줄리아노 아마토 전 이탈리아 총리를 비롯해 유럽의 전직 총리 3명 등 4명이 공동으로 기고한 이 글에서 “유럽은 더 재빨리, 그리고 이전의 어떤 경우보다 더 단호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위기 대처를 강조했다. 약 3년 전의 글이지만 오늘날의 문제를 그대로 예견하고 있다. 11월2일 에 실린 “유럽은 대통령이 있지만 리더가 없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이 신문은 “유럽이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재정적자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국익이 상충하고 권한 분산으로 인해 과감하고 신속한 행동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운영 구조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유럽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이가 많아 미국 같은 ‘유럽 합중국’은 결코 실현될 가능성이 낮다고 본 것이다.

솔솔 흘러나오는 유로존 해체설
이런 점에서 영국 방송이 유럽을 연방제인 미국에 비교한 최근 지적은 눈에 띈다. 미국에선 미시간주가 자동차산업의 붕괴로 어려움을 겪자, 강력한 연방정부가 있었기에 다른 주에서 거둔 세금을 이전해 미시간주의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자동차 기업을 지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방송은 “유럽도 유로 체제가 앞으로 작동하려면 이처럼 재정 이전을 할 수 있는 중앙시스템이 필요하다”며 “진짜 문제는 유럽 공동의 이익을 위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곧 각 사안에 따라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결국 실랑이를 벌이는 사태가 되풀이됐다는 것이다. 균형 잡힌 위치에서 이익을 조정할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럽 대통령’이라 불리는 헤르만 반롬푀이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사실상 허수아비에 불과한 까닭이기도 하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이 선거로 선출됐다면 서로 다른 국가의 이익을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부에서는 EU의 대국인 독일을 이끄는 메르켈의 지도력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메르켈이 유럽 재정위기 초기에 미온적으로 대응한 것이 현 사태를 키웠다는 것이다. 차기 프랑스 대선에서 사르코지가 패배하고 사회당이 집권할 경우 유럽 각국을 압박하는 긴축정책에 반대할 수도 있고, 프랑스와 독일 간에 갈등을 불러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사실 유로존 17개국의 어떤 결정도 회원국 의회에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만큼 의사결정이 느릴 수밖에 없고,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하지만 위기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U의 결속을 다지는 쪽보다는 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솔솔 흘러나오는 유로존 해체설이 그 하나다. 2년 넘게 지속된 유럽의 경제위기가 세계 8번째 경제대국인 이탈리아까지 흔들자 금기시되던 유로존 해체까지 수면 위에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탈리아는 유로존 경제규모 3위로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크다. 부채가 약 2조유로에 이르는 이탈리아에 구제금융을 하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기 때문이다. 캐피털 이코노믹스 연구그룹의 벤 메이는 11월11일 독일 통신 인터뷰에서 “이탈리아의 금융 및 경제적 부채 조정은 유로존의 안정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하고, 이탈리아가 문제를 겪는 다른 나라들과 함께 유로존을 떠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국 통화가 있으면 평가절하를 통해 대외 흑자를 시현하고 잉여자금을 활용해 부채를 갚을 수 있지만, 유로존에서는 불가능하다. 재정이 부실한 회원국이 유로존 탈퇴를 전제로 한 환율 조정은 마지막 카드로 거론된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지난 11월9일 강연에서 “유럽의 경제위기는 남유럽과 북유럽이 분리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놨다.

‘Two-Speed EU’, 일부만의 통합 강화론
실제 일부에서는 EU 27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만이 통합을 더 강화하는 방향의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이른바 ‘투스피드(two-speed) EU’다. 그리스가 위기에 처한 뒤 “그리스보다 유로존 안정이 더 중요하다”는 발언이 그것이다. 사르코지도 11월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2개의 유럽 속도가 분명 있을 것이다. 하나는 유로존 통합을 강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EU 안의 연맹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유로가 무너지면 EU도 같이 무너진다’고 여겼던 만큼 이런 논의는 그만큼 충격적이다.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자 바호주 EU 집행위원장은 11월9일 “유로존이 분리되면 초기 단계에 유로존 총생산의 50%까지 비용을 치를 것으로 추정된다”며 “유로존이 핵심적인 몇 개 국가로 줄어들 경우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이 3% 줄어들고 100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경고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KIF)은 최근 ‘유럽 재정위기의 전망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향후 전망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로 유로존 분할을 제시했다. 곧 “그리스에서 시작된 디폴트가 독일·프랑스 등을 향한 디폴트 도미노로 이어지고, 유로화를 이탈한 국가들이 재정건전성이 악화된 국가연합과 재정건전성이 양호한 국가연합으로 새롭게 통합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 10월 ‘유럽 위기를 보는 체크 포인트’ 보고서에서 “유로존이 분열하지 않고 안정적 단일통화 지역으로 회생할 수 있는 방법은 재정연방주의를 실현하고 유로공동채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재정 통합은 회원국 주권의 부분적인 양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난한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경제 여건과 국가적 이해관계가 다른 유로존 17개국의 승인과 유럽연합의 법적 기초인 리스본 조약의 수정 등 어렵고 긴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결국 유럽 각국이 더 많은 권한을 EU에 내놓고 통합을 더 강화해야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각국은 이를 꺼리고 있다. 유럽 국가 국민의 EU와 유로존에 대한 피로는 EU 해체를 주장하는 극우정당의 득세에서 보듯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롬푀이 EU 상임의장은 “유로존 17개국이 모두 함께 가려면 강력한 경제적 조정과 예산 통제가 필요하지만, 일부 회원국만 주권 공유 및 예산 감시 분야 등에서 동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소하는 유럽, 외면하는 중국
지도력 위기에 돈까지 바닥난 유럽은 중국에 구세주로 나서줄 것을 바라지만, 중국은 아직 그 임무를 맡기를 꺼리고 있다. 유럽은 중국이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에 투자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거부했다. 11월9일 중국 관영 은 이렇게 지적했다. “정치적 결속력 약화가 유로존 단위에서 드러나고 있다. 정치적 단호함과 집행 능력의 부족이 위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좋은 기회를 이미 낭비했다.” 이 지적은 마치 중국 정부의 태도를 대변하는 듯하다. ‘알아서 하라’로 읽힌다. 유럽은 제 코가 석 자에 자중지란이고, 미국은 쇠락해 도와줄 힘이 없다. 중국은 책임을 떠맡을 진정한 ‘주요 2개국’(G2)이 될 뜻이 아직 없다. 이래저래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로 경제위기는 길어지고 있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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