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일 오후 제임스 스타인버그 미 국무부 부장관이 대부대를 이끌고 방한했다. ‘시위’라도 하는 기세였다.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 스튜어트 레비 재무부 차관, 월리스 그레그손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 제프리 베이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 등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한반도 정책에 관여하는 거의 모든 고위 당국자를 이끌고 왔다. 모종의 정책 변화를 예고하는 걸까?
스타인버그 부장관은 6월3일 오전 서울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권종락 외교통상부 제1차관과 만난 뒤 “북한의 2차 핵실험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 특정한 제재 조처보다는 장기적인 전략에 대해 한국 쪽과 논의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고위 당국자도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논의 내용은 구체적인 게 아니라 일반적인 차원”이라고 말했다.
대북 금융제재의 상징 격인 ‘방코델타아시아’(BDA) 사태를 주도한 레비 차관보가 대표단에 포함된 것을 두고, 미국이 독자적인 대북 금융제재를 고려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미 대표단이 한국에 이어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대북 금융제재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설득 작업을 벌일 것이란 관측도 설득력 있게 제시됐다. 가능성 있는 얘기다. 취임 직후부터 ‘광폭’ 행보를 이어가는 북한이 마침내 ‘2차 핵실험’ 카드마저 휘두른 터다. ‘선의적 무시’란 신조어까지 만들어가며 고심하던 미국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듯싶다.
좀더 더듬어보자. 지난 5월28일 제임스 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워싱턴의 외교·안보 전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 주최 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의 최근 핵실험과 대포동 미사일(또는 인공위성) 발사 실험은 미국이나 동북아에 임박한 위험이 아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북한의 핵기술이 테러단체 등 외부로 확산되는 것이다.”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한 지 불과 사흘 만에 내놓은 발언치고는 다소 뜻밖으로 비쳐질 정도로 ‘침착’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핵실험 소식이 전해진 직후 “세계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위협”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존스 보좌관의 이날 발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북핵 문제가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 우선순위에서 여전히 후순위로 밀려 있다는 얘기다. 북한의 추가 핵실험에도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방향이 바뀌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된다. 둘째, 미국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한반도 비핵화’에서 ‘북핵 비확산’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6자회담이란 다자틀을 통해 지지부진하기만 한 ‘비핵화’란 큰 목표를 고집하기보다, 미국의 국익과 밀접하게 관련된 ‘비확산’이란 작은 목표라도 확실히 다져두는 게 낫다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수정할 수도 있다는 게다. 이는 적어도 잠정적으론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외교·안보 전문가인 스티븐 월트 미 하버드대 교수(국제관계학)도 북의 핵실험 직후인 5월26일 자신의 블로그(walt.foreignpolicy.com)에 올린 글에서 비슷한 지적을 한 바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이 좋은 소식일 순 없다. 그렇다고 충격에 빠질 이유도 없다. 미국은 이미 북한이 핵무기 능력을 갖췄음을 알고 있다. 2차 핵실험이 1차 핵실험보다 다소 강력하긴 해도, 전략적 환경을 바꿔낼 수준은 아니다. 물론 북한의 행태가 거슬리긴 하지만, 핵실험 자체가 북한 정권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월트 교수는 같은 글에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 때문에 오랜 세월 전전긍긍해왔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던 1993~94년엔 북한의 핵시설에 대한 예방적 선제 타격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위험이 워낙 크다는 동맹국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조지 부시 행정부는 외교를 강조한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 방향에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초기엔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대북 강경책도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을 막지는 못했다. 되레 이를 부추긴 측면도 있어 보인다. 결국 부시 행정부 역시 북한을 강압할 만한 옵션이 없음을 깨닫고 외교적 노선으로 회귀했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뾰족한 정책 대안을 내놓을 수 없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게 월트 교수의 분석이다. 첫째, 미국은 북한과 별다른 경제 교류가 없다. 그러니 원조나 무역·투자 중단 등의 위협이 통할 수 없다. 둘째, 군사력을 동원해 북한에서 ‘정권 교체’에 나서거나 전면 봉쇄에 들어간다면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북한이 갑자기 붕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대량 난민 사태 등 인도주의적 재난이 닥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이 닥치면, 북한의 핵물질이 외부로 유출된 가능성도 높아진다. 월트 교수는 “미국은 이미 상당 기간 북의 핵 능력을 용인해온 게 현실”이라며 “마땅한 정책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도 그런 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는 게 최선”이라고 지적했다.
애초 오바마 행정부는 북핵 협상의 형식으로 기존 ‘일괄타결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협상의 새 판을 짜려는 북한은 ‘단계별 접근’을 원한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한 국책연구소의 외교·안보 전문가는 “북한은 최종적으로 비핵화를 거부하진 않겠지만, 핵 폐기의 최종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과도기적으로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고 싶어한다”며 “이는 막 취임한 오바마 행정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고, 미국이 주저하는 사이 북한은 주저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가 핵실험 이후에도 미국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이른바 ‘당근과 채찍의 딜레마’다. 북이 핵실험까지 한 마당에 ‘당근’부터 내놓을 순 없는 사세다. 당장 미 국내에서 “악행에 대한 보상”이란 역풍이 거세질 터다. 그러니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북제재 결의안이란 ‘채찍’을 먼저 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일단 ‘채찍’을 먼저 든 연후엔 당근책이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게다. 미국으로선 ‘채찍질’의 수위를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얘기다.
물론 미국이 금융제재를 포함한 독자적인 대북제재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렵다. 북한의 ‘초정밀 위폐’(슈퍼노트) 문제가 워싱턴 정가를 떠돌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하지만 “미국이 결국 유엔 안보리를 통한 다자 차원의 제재에서 그치게 될 것”이란 지적도 만만찮다. 국내법을 근거로 독자 제재에 나설 경우, 향후 대화가 전격 재개됐을 때 의회 강경파가 협상의 중요 국면에서 이를 근거로 발목을 잡을 수도 있는 탓이다. 미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최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라”고 요청한 것과 관련해 필립 크롤리 국무부 부대변인은 6월5일 정례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정 국가를 테러지원국으로 등재시키려면 일정한 법적 요건을 갖춰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바로는 (북한이) 이런 요건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미사일을 발사하고 과도한 발언을 일삼는 것은 분명 현명치 못하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처사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법적으로 테러리즘으로 규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
그럼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은 어떨까? 북한 대외무역의 73%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 달렸다. 지난 4월5일 미사일(로켓) 발사 때만 해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중국은 5월25일 추가 핵실험 이후 강경한 행보를 보인 바 있다. 데릴 킴벨 미 군축협회(ACA) 사무총장이 5월26일 내놓은 성명에서 지적한 것처럼 “강화된 대북제재로 인해 대량 난민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보다, 핵 무장한 북한이 동북아에서 전면 군비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 탓이다.
북한, 중·러에 배신감 표명중국의 이런 움직임에 대한 북쪽의 반응 역시 강경했다. 북 은 지난 5월29일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 내용을 따 이렇게 열을 냈다. “(현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의 평화적 위성 발사를 유엔에 끌고 가 비난 놀음을 벌린 미국과 그에 아부·추종한 세력들에 있다. 이런 나라들은 우리 앞에서는 위성 발사가 주권 국가의 자주적 권리라고 말해놓고 정작 위성이 발사된 후에는 유엔에서 그를 규탄하는 책동을 벌였다.” 중국과 러시아를 정면으로 겨냥한 게다.
안보리 대북결의안의 ‘열쇠’를 중국이 쥐고 있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다. 중국으로선 대북제재의 모든 책임을 혼자서 지고 있는 상황이다.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어 보인다. 중국이 제재 결의안의 원칙엔 일찌감치 합의해놓고도, 세부 사항에서 주춤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은 “결국 안보리에서 대북제재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중국이 정리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일정한 수준의 제재에는 동의하되, ‘북이 대화에 복귀하면 푼다’는 식의 조건을 걸어 제재안의 수위를 조정하려 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은 6월4일 오후 3시 ‘불법 입국’과 ‘적대 행위’를 한 혐의로 이미 기소된 미국 기자 로라 링과 리승은(유나 리)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고 이례적으로 미리 밝혔다. 재판에 앞서 지난 5월26일엔 이 두 기자와 가족들의 전화 통화를 허용하기도 했다. 지난 1990년대 두 차례 억류된 미국인 석방을 위해 방북했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는 〈CNN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전례에 비춰) 재판이 끝나면 하루이틀 안에 선고가 내려질 것”이라며 “선고가 내려진 직후부터 석방을 위한 협상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점’이 무르익고 있다는 얘기다.
한반도가 다시 ‘기로’에 섰다. ‘운명’은 남의 손에 맡겨진 채다. 여전히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정책인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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