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이 노벨상을 수여하는 장소인 스톡홀름 시청에는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명사들을 위한 연회장인 ‘유진 왕자 갤러리’가 있다. 구스타프 5세 국왕의 동생이던 유진 왕자는 벽을 보고 앉은 이들이 반대쪽 창에 비치는 호수의 멋진 풍광을 볼 수 없는 일은 불공평한 일이라며 벽면에 프레스코 형식으로 호수의 풍광을 그려넣게 했다. 또 시 청사를 장식한 상당수 흉상은 명사들이 아니라 이 건물을 짓는 데 참여했던 노동자들이다. 스톡홀름 초등학교의 한인숙 교사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신념이 건물 하나를 짓는 데도 드러난다고 말한다.
평등과 민주주의는 스웨덴 교육의 근간이기도 하다. 스웨덴 교육법은 모든 학교 활동이 기본적으로 민주적 가치에 따라 이뤄져야 하고, 아무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스웨덴에 거주하는 어느 누구도 차별 없이 공부해야 하며, 국가는 그런 기반을 마련해줘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평등이란 대원칙에 기반한 스웨덴 교육 체제도 지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학교선택제, 자율학교, 학교 평가 등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말들이 이 사회에서도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웁살라대학 교육학과장인 레나트 비칸데르 교수는 그 배경을 1990년대 이래 스웨덴 사회를 휩쓴 시장중심경제로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오랜 사회민주주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이래 스웨덴은 유럽에서 영국 다음으로 급속하게 시장경제화된 나라다. 이후 스웨덴 사회에서는 분권화·평등·효율성이 화두가 됐고 이것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1991년 정권을 장악했던 우파 정부는 학교선택제와 자율학교 등을 도입해 교육에서 경쟁원리를 강화해왔다. 1994년 사민당이 다시 집권했지만 학교선택제 등의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학부모의 90% 이상이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황선준 스웨덴 국가교육청 재무담당관이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이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PISA)에서 거둔 성적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학생 1인당 교육비를 가장 많이 들이는데도 이웃 핀란드에 훨씬 뒤처지는 중위권에 머문 것은 스웨덴 교육제도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란 주장이 제기됐다고 비칸데르 교수는 전한다. 교육 문제는 2006년 스웨덴 우파연합이 개혁을 화두로 내걸고 사민당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지나친 평등주의 교육 대신 엘리트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는 현 정권이 등장한 이래 이곳에서도 일제고사, 학교평가, 학교선택제 등 최근 우리 교육현장을 뒤흔드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현 정부가 교육의 책임성을 높이고 교사 간, 학교 간 경쟁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
평가 강화를 위해 현재 5학년과 9학년 때 보는 국어·수학·영어 일제고사를 6학년과 9학년 때 실시하고 대상도 전체 교과목으로 확대했다. 또 3학년에 읽기·쓰기·수학 일제고사를 보기로 했다. 국가가 제시한 교육목표 달성이 어려운 학생들을 조기에 발견해 지원 방안을 찾기 위해서란다. 현재 8학년과 9학년에서만 3단계(최우수·우수·통과)로 내왔던 성적 산출은 2009년부터는 6학년부터 9학년까지 계속 이뤄지며 등급도 7단계로 세분된다.
학생들의 성적은 교사나 학교 평가의 근거가 돼 교사와 학교의 경쟁을 강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스톡홀름대 사범대학 잉어노티얼 교수는 학업 성적 경쟁을 추구하는 이런 방식은 21세기 지식 기반 사회에 필요한 창의력 있는 인재를 키우는 대신 20세기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그는 “교사들의 자율성을 키워주는 대신 타율적인 평가를 통해 통제하는 정책은 영국에서 이미 실패한 정책”이라면서 “현 정부의 정책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직종의 직업교육을 받더라도 기본 소양을 갖춤으로써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가꾸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갖고 1992년에 도입됐던 종합고등학교도 수술대에 올랐다. 황선준 국가교육청 재무담당관은 의무교육을 마친 학생의 98%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평균 중도 탈락률이 25%에 이르고 직업예비 과정은 그 비율이 더 높은 게 개혁의 동기가 됐다고 설명한다. 종합고등학교에선 건설기능 인력이 될 학생도 자연과학 전공 학생과 같은 수준의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데, 이런 학습 부담 때문에 많은 탈락자가 생긴다는 게 현 정부의 판단이라는 것이다. 직업준비 과정 학생들에게 훨씬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국가로선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사회과학 전공자에겐 국가가 1인당 8만크로나를 부담하는 반면 자동차 전공 학생에겐 112만크로나를 투입한다). 스웨덴 정부는 앞으로 고등학교를 인문계와 직업고등학교, 도제학교로 3분할할 예정이다. 기능인력 양산을 목표로 설립되는 도제학교는 현장실습 중심이기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어렵게 된다.
스웨덴 초·중등 교육 지형을 뒤흔드는 것은 무엇보다 학교선택제와 자율학교 확대다. 현 정부는 1992년 당시 우파 정부에 의해 도입된 학교선택제를 초등학교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초등학교는 주거지 인근에 배정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음악에 재능이 있는데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음악으로 특성화된 학교가 있을 경우 그쪽으로 보낼 수 있다. 또 국가 예산으로 운영하지만 교과과정은 자율적으로 정하는 자율학교도 선택이 가능해졌다. 이때 학생의 주소지 지자체는 학교 소재지 지자체에 해당 학생의 교육 비용을 지급한다. 이러다 보니 지원 학생이 너무 적어 문을 닫는 공립학교도 생겼고, 타비 같은 시처럼 공립학교를 개인에게 팔아버리는 곳도 나타났다.
1992년 우파 정부가 바우처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누구라도 국가교육청의 허가를 받아 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설립을 희망하는 주체가 교육목표와 과정 등을 수립해 국가교육청에 18개월 전에 신청해 인가를 받으면 학생을 모집할 수 있다. 자율학교에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지방정부에서 바우처를 받아 학교에 내고, 학교는 지방정부로부터 바우처에 해당하는 돈을 받는다.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이어서 학생들에게 따로 받는 수업료는 없다. 학생 선발은 선착순으로 이뤄진다. 성적 등을 선발 기준으로 할 경우, 학교 순위가 생겨나는 등 부작용을 우려해서다.
스웨덴의 자율학교는 다양하다. 발도로프, 몬테소리, 프레네 등 다양한 교수법을 내세우는 학교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적 특색을 가진 학교들도 있다. 스웨덴 교육부는 “자율학교가 부모와 학생에게 선택권을 줌으로써 학교 간 경쟁을 불러일으켜 스웨덴 학교 제도를 더 높은 수준으로 이끌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민당 정권 아래서 주춤하던 자율학교는 새 정권이 들어선 뒤 급속히 늘어 2008년 현재 초·중등 과정을 합해 모두 900여 개교에 이르고 전체 학생의 10%에 육박하는 13만5천 명 정도가 재학하고 있다. 2007년 한 해에 300여 개 자율학교가 생겨났다. 자율학교와 학교선택제가 인기를 끄는 것은 기존 학교 시스템이 경직된 탓이 크다. 공립학교 교사 출신으로 자율학교로 자리를 옮긴 말린 예르너는 “공립학교에서는 새로운 학습 방식을 도입하기 어려웠다. 학생 30명을 혼자 담당해야 하고, 새로운 교수법에 대한 다른 선생님의 동의를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밝혔다.
스톡홀름 공립초등학교 교사인 한인숙씨는 학교선택제와 자율학교의 확대로 학교 간 경쟁과 교사들 사이의 경쟁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인정한다. “교사들 사이에 프로젝트 수업 등 새로운 교수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부모의 지위에 따른 차별 심화이런 긍정적 영향이 있음에도 자율학교와 학교선택제에 대한 비판 역시 높아지고 있다. 국가교육청의 조사 결과 스웨덴 교육의 근간인 평등의 가치가 파괴되고 인종이나 학생의 성적,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차별이 심화되고 있음이 확인됐다고 황선준 국가교육청 재무담당관은 밝혔다. 이민자만 다니는 학교, 스웨덴인만 다니는 학교 등이 생겨나고 극우적인 종교학교도 등장하는 등 사회적 격리 현상이 심화되고 있단다.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학교시설을 줄이는 등 편법으로 운영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경우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는 게 황 담당관의 설명이다.
앞서 소개한 프투룸스콜란은 자율학교와 학교선택제로 대변되는 사회의 변화 요구에 대한 공립학교의 창조적 대응 사례다. 교사들 스스로 스웨덴 교육의 장점인 통합교육과 새로운 시대적 요구인 개별화 학습 등을 연결해 미래에 대비할 수 있는 새로운 학교 모형을 만들어냈다.
쿤스캅스스콜란은 자율학교 가운데 평판이 높은 학교다. 1999년 처음 설립된 뒤 10년 만에 30여 개 학교를 거느린 기업학교군이 됐고, 영국 등 외국에도 진출했다. 지식 위주의 교육이란 비판을 받지만 어쨌거나 성공한 모델이다.
두 학교 가운데 과연 어느 모델이 한국 교육에 바람직한 대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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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 교육과정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국가이지만, 그 목표 달성 방법은 각 학교나 교사가 정한다. 국가가 정한 교과서도 없어 각 학교에서 연구팀을 조직해 교재를 만든다. 의무교육에서 국가가 정한 교육목표를 달성했는지는 5학년과 9학년의 일제고사를 통해 확인한다.
대학에는 등록금이 없고 학생들은 교재비와 생활비만 부담한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취업으로 간주해 일정한 급여를 받는다. 그런데도 대학 진학률은 40%를 밑돈다. 직업에 귀천을 두지 않기에 굳이 대학 진학에 목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스웨덴이 특히 자랑하는 것은 성인교육이다. 성인교육 참여율은 53.5%로 아이슬란드(69.1%), 덴마크(58.5%), 핀란드(55.9%) 다음으로 높다. 우리나라는 26.7%에 지나지 않는다. 성인교육센터에는 기초교육과 고등학교 과정은 물론 추가 교육과정이 개설돼 이곳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사람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언제라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정신을 구현한 이 평생교육제도는 스웨덴을 평생학습 사회로 이끄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스톡홀름(스웨덴)=권태선 한겨레 논설위원 kwont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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