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나는 핀란드 수도 헬싱키 인근 소도시 야르벤파에 위치한 야르벤파고등학교 2학년이다. 우리 방문단이 이 학교를 찾았을 때 엘리나는 미술실 한구석에서 데생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한 데생 수준에서도 짐작이 갔지만, 역시 미술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있단다. 미술 실기 지도를 받기 위한 사설학원이 있는지 물으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 핀란드에선 사교육이란 말이 그처럼 낯설기 때문이다. 헬싱키에서 8년째 살고 있다는 한국 동포 곽수현씨도 “제가 영어가 부족해 학원을 찾아봤는데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헬싱키 시 당국에서 제공하는 성인학습 과정의 영어 프로그램을 들었는데, 그게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엘리나 역시 학교 미술 시간에 배우는 것 이외에, 빈 강의 시간 틈틈이 미술실에 와서 스스로 연마하는 것이 미술대학에 가기 위한 공부의 주된 방법이다. 더 필요하다면 지역사회가 제공하는 예술센터 등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야르벤파고등학교가 음악과 미술에 대한 특화과정을 개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이처럼 학교마다 자신만의 색깔이 있어 학생들이 학교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종합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핀란드 내 고등학교 가운데 5곳에 우선순위를 매겨 지원할 수 있다. 각 자치단체 교육위원회는 지원자들의 종합학교 졸업 성적과 지원율 등을 감안해 학생들을 배정한다.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학교마다 경쟁률이 다르다. “우리 학교는 인기가 있는 편이어서 경쟁률이 5~6 대 1이 될 정도로 꽤 높다. 2008학년도 우리 학교의 커트라인은 10점 만점에 8.08이었다”고 에스포 소재 포요이스 타비올라고등학교의 토이니 라우타마키 교장은 밝혔다. 에스포에는 10여 개의 고등학교가 있고, 이 학교보다 커트라인이 높은 학교도 있단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학교가 성적순으로 서열화돼 있는 것은 아니다. 각 학교별 특성화 과목 역시 아이들의 중요한 선택기준이 된다”고 덧붙였다. 야르벤파의 음악과 미술처럼 포요이스 타비올라는 드라마와 미디어학이 특성화 과목이어서 이 분야로 진출을 꿈꾸는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들고 있다고 라우타마키 교장은 자랑했다.
라토카르타노종합학교가 채택한 무학년제가 고등학교에선 일반적으로 적용되고 있었다. 타비올라나 야르벤파 모두 그랬다. “과거에 학급은 30명으로 구성된 항구적인 반이 있었다. 개인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경우에 따라선 다 아는 내용도 함께 들어야 했다. 그러나 무학년제 채택으로 학생들은 자신의 학습 속도와 목표에 따라 수업을 구성할 수 있게 됐다”고 라우타마키 교장은 설명했다.
학생들은 의무과목과 선택과목을 조합해 자신의 시간표를 만들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2년에서 4년 사이에 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보통 70% 정도는 3년 만에 졸업하고, 4년 만에 졸업하는 비율은 10% 정도, 그리고 2년 만에 졸업하는 비율은 아주 낮아 3~5%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야르벤파고등학교의 유카 오텔린 교감은 말한다. 이러니 학생들은 동료가 아닌 자기 자신과 경쟁하며, 뛰어난 학생은 뛰어난 대로, 좀 늦는 학생은 늦는 대로 자신의 속도에 맞춰 공부할 수 있다. 우리처럼 특수목적고나 수준별 수업 등 모두에게 상처 주는 제도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수월성 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무학년제로 바뀌면서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의 소속감과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강화하는 문제였다. “학생들의 학습목표 관리를 돕는 담임교사제를 운영함과 동시에 학교 단위로서 소속감을 키우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한다”고 야르벤파고등학교 앗소 타이팔레 교장은 설명했다. 이 학교 건물 역시 이런 고민의 소산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학급이 없으면 공동체 의식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함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선생님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면서도 협동작업이 가능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이런 구상에는 교장은 물론 교사들의 의견도 반영됐다.”
70%는 3년 만에 졸업, 나머지는 2~4년그래서 학교 가운데 학생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원형 공간(아레나)을 중심으로 두고 거기서 5개의 회랑이 뻗어가도록 건물을 만들었다. 보통 때는 식당으로 사용되는 아레나는 음악·드라마·예술 등의 공연장으로도 변신해 학생들이 공동체의 소속감을 나눌 수 있는 장이 된다. 공간이 이렇게 열려 있으니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의 소통 역시 활발하다. 수업 외에 음악·예술·스포츠·드라마 등 특별활동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각 회랑은 역사회랑, 과학회랑, 예술회랑 등 전공 과목별로 나뉘어 있어 인접 분야 교사들 사이의 협업이 쉽게 이뤄질 수 있다. 또 각 회랑의 앞쪽에는 컴퓨터 등이 비치돼 있어 수업이 없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인터넷 등으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다.
우리가 방문한 오후 시간에도 많은 학생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학습에 전념하고 있었다. 튜터라는 명패를 달고 우리를 안내한 한넬에게 한국 학생들은 공부하는 것이 힘들어 지쳐 보이는데 이곳 학생들은 밝아 보인다고 했더니 “공부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궁금한 것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 즐겁기도 하다”고 답했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일반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시험은 봄·가을에 두 번 치러진다. 학생들은 한 번에 필요한 시험을 다 볼 수도 있고, 3번까지 연달아 나눠 볼 수도 있다. 먼저 본 시험 결과가 흡족하지 않으면 재시험을 볼 수도 있다. 단순히 학생들을 서열화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필요한 실력을 갖추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목적임을 알 수 있는 제도다. 대학 진학률은 평균 45% 정도지만, 핀란드에선 어떤 수준에서라도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제도가 있기에 대학 입시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고 헬싱키 거주 한국인 아티스트인 안애경씨는 말한다.
야르벤파·에스포(핀란드)=권태선 한겨레 논설위원 kwonts@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국힘 “오늘 헌법재판관 3명 임명동의 표결 불참”
김용현 쪽 “포고령에 ‘통행금지’ 포함…윤석열이 검토·수정”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단독] 권성동 “지역구서 고개 숙이지 마…얼굴 두껍게 다니자”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김용현 쪽 “부정선거 조사할 ‘수사2단’ 결성 지시”
‘오징어게임2’ 전 세계가 들썩…오늘 오후 5시 공개
민주, 한덕수에 최후통첩…“1초도 지체 말고 재판관 임명하라” [영상]
대법원, 윤석열 주장과 달리 “비상계엄은 사법심사 대상”
끝이 아니다, ‘한’이 남았다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