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매케인 미 공화당 대선 후보는 ‘이단아’로 불려왔다. 이유는 여럿이지만, 민주당 러스 파인골드 상원의원과 공동 발의한 ‘2002년 연방 선거법 개정안’(매케인-파인골드법)이 결정적이었다. 선거자금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게 법안의 뼈대였다. ‘동업자’들의 ‘공분’을 살 만했다. 그에게 ‘매클린’(매케인+클린)이란 별명이 추가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물론 그에게 ‘어두운 면’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다. 1980년대 말 미 정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키팅 파이브’ 사건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에선 서민 가계대출을 주로 하는 주택대부조합이 줄줄이 파산 위기에 처했다. 이에 따라 미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업체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워싱턴 정가와 연줄이 닿아 있던 찰스 키팅이 운영하던 링컨주택대부조합에 대한 조사를 일부 정치인들이 가로막고 나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에 연루된 5명의 상원의원이 바로 ‘키팅 파이브’다.
앨런 크랜스톤·존 글렌·도널드 리글·데니스 드콘시니 상원의원 등 민주당 정치인들과 함께 공화당 정치인으론 유일하게 매케인 후보가 여기에 이름을 올렸다. 미 상원 윤리위원회는 1991년 크랜스톤·드콘시니·리글 의원 등이 당국의 조사에 부당하게 간섭했다고 지적했지만, 글렌 의원과 매케인 후보는 직접 압력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매케인 후보를 둘러싼 의혹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부터 키팅과 절친한 사이로 지내온데다, 11만2천여달러의 정치자금까지 지원받았기 때문이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도 매케인 후보 주변에선 크고 작은 로비 관련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중심에 매케인 후보 선거캠프에서 외교안보 관련 수석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랜디 슈너먼이 버티고 있다. 1980년대부터 미 의회에서 잔뼈가 굵은 슈너먼은 최근까지 로비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대표적 보수 논객으로 꼽히는 팻 뷰캐넌은 지난 8월22일 내놓은 칼럼에서 “슈너먼은 자신의 고객을 위해 미국이 피를 흘리도록 부추기고 있다”며 “바로 이런 게 미국식 민주주의의 고전적 부패상”이라고 질타했다. 무슨 얘기일까?
슈너먼은 1986년 공화당 데이비드 듀렌버거 상원의원 보좌관으로 워싱턴 정계 생활을 시작했다. 공화당 정책위원회와 상하 양원 외교위 등을 두루 거친 그는, 밥 돌·트렌트 로트 등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의 외교안보보좌관 생활을 거치면서 이름을 알려나갔다. 밥 돌 상원의원은 1996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그를 수석 외교안보보좌관으로 삼았고, 매케인 후보 역시 2000년 공화당 경선에 출마하면서 슈너먼에게 외교안보 정책 입안을 맡긴 바 있다.
슈너먼이 오랜 세월 ‘관심’을 기울여온 국가는 이라크였다. 트렌트 로트 상원의원이 공화당 원내대표로 있던 1998년 슈너먼은 ‘이라크해방법’(ILA) 초안을 마련해 의회 통과를 주도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 기조는 ‘정권교체’로 가닥을 잡게 된다. 미 의회가 지난 2002년 가을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이라크에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킨 법적 근거도 바로 ‘이라크해방법’이다. 법안 통과로 슈너먼과 절친한 사이인 이라크 망명정객 아메드 찰라비가 의장으로 있던 ‘이라크국민회의’(INC)는 미 국무부로부터 1억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찰라비는 후세인 정부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조작된 정보를 미 중앙정보국에 넘긴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전미총기협회·록히드마틴, 오리온의 고객2000년 대선 이후 슈너먼은 네오콘의 심장부 노릇을 해온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에 적극 가담했다. 슈너먼을 포함해 윌리엄 크리스톨 편집장, 리처드 펄 전 국방부 자문위원장 등 이 단체의 핵심 인물 37명은 2001년 9월11일 동시테러가 벌어진 지 9일 만에 부시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려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시절 잠깐 미 국방부의 ‘컨설턴트’로 이라크 정책을 조언했던 슈너먼은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2002년 11월 초 아예 ‘이라크해방위원회’(CLI)란 단체를 창립하고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부시 행정부의 든든한 지원 아래 꾸려진 이 단체는 후세인 정권 타도를 위한 여론전을 주도했으며, 매케인 후보 역시 이 단체의 주요 임원이었다.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함께 ‘이라크해방위원회’가 해체된 뒤 슈너먼은 ‘오리온 스트래터지스’란 로비업체를 창업했다. 그의 고객 명단엔 미국 최대의 압력단체로 꼽히는 전미총기협회(NRA)와 거대 군수업체 록히드마틴 등도 포함됐다. 하지만 그가 로비활동을 집중한 것은 주로 외국 정부다. 그루지야와 마케도니아, 대만 등이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슈너먼의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이 가운데 그루지야를 둘러싼 논란이 지난 8월 그루지야-러시아 무력분쟁으로 여론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지난 2004년부터 최근까지 오리온 쪽은 로비활동을 목적으로 모두 71차례 매케인 후보와 통화를 하거나 대면접촉을 했다. 그루지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과 그루지야 정부의 남오세티야 관련 정책을 지원하는 내용의 ‘NATO 자유강화 법안’을 논의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 법안은 매케인 후보가 지난 2006년 공동 발의해 내놨다.” 는 지난 8월13일 오리온 쪽이 미 법무부에 제출한 로비활동 관련 자료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문제는 슈너먼이 지난 2007년 1월부터 매케인 후보 선거 캠프에서 활동을 시작했음에도 최근까지 그루지야 정부의 로비스트로 활약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슈너먼은 지난 4월17일 매케인 후보와 미하일 샤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하는 데 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의 통화 직후 매케인 후보는 “러시아가 그루지야의 주권을 유린하는 정책을 멋대로 펼칠 수 있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며 그루지야 정부를 지지하는 내용의 성명을 내놨다. 이와 관련해 매케인 후보 쪽은 “샤카슈빌리 대통령과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절친한 사이로 지내왔다”며 “워싱턴 주재 그루지야 대사관 쪽이 러시아의 최근 동향에 대해 우려하며 전화 통화를 부탁해와 이에 응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그루지야 대통령과 전화한 날 생긴 일하지만 공교롭게도 슈너먼의 회사가 문제의 통화 당일 그루지야 정부에 ‘전략적 조언’을 해주기로 하고 20만달러짜리 로비계약을 따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는 “지난 2004년 이후 그루지야 정부의 로비를 대행해주고 오리온 쪽이 챙긴 돈은 모두 80만달러에 이른다”며 “슈너먼은 매케인 후보가 선거캠프 참여 인사의 로비활동을 금지시킨 지난 5월15일에서야 오리온 쪽과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전했다.
그루지야를 둘러싼 의혹은 8월 들어 미 정가 안팎에서 ‘음모론’으로까지 발전해갔다. 지난 8월7일 그루지야군의 남오세티야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와의 무력분쟁이 슈너먼을 포함한 네오콘 진영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게다. 대선에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네오콘 진영이 그루지야 정부를 부추겼다는 게 소문의 내용이다. 특히 그루지야의 남오세티야 침공 한 달여 전 공화당 매파의 책사인 칼 로브 전 백악관 부비서실장이 ‘크리미아반도를 여행 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음모론’은 더욱 설득력을 얻어갔다. 로브는 7월10~13일 우크라이나 얄타의 오레인다 호텔에서 열린 제5차 얄타연례회의에 토론자로 참석했는데, 회의 참가자 명단에는 샤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도 끼어 있었던 게다.
‘네오콘의 맏형’ 격인 딕 체니 부통령의 최근 행보도 ‘의혹’ 확산의 땔감이 되고 있다. 캐나다 일간 은 8월14일치에서 “부시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비치발리볼 경기를 관람하고 있던 8월7일 체니 부통령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며 “이는 러시아를 국제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잠재적 적’으로 덧칠해, 국가안보 문제를 다가오는 대선에서 쟁점으로 키우기 위한 노림수로 보인다”고 전했다. ‘음모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은 국제사회의 동반자로서 러시아를 신뢰할 수 있을지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행동은 불법이며, 그루지야 국경을 무력으로 바꾸려는 시도나 마찬가지다. 미국은 그루지야의 영토적 통합을 지지하며, 그루지야가 궁극적으로 NATO에 가입하게 될 것으로 본다.” 은 9월4일 그루지야를 방문한 체니 부통령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그는 이날 샤카슈빌리 대통령을 만나 러시아를 거센 어조로 비판하며, 그루지야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거듭 약속했다. 그루지야가 NATO에 가입하면,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무력분쟁에 휘말릴 경우 미국은 자동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에 앞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9월3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된 주택과 인프라 재건 비용으로 그루지야에 10억달러를 지원할 것”이라며 “2008~2009 회계연도에 5억7천만달러를, 차기 행정부에서 4억3천만달러를 각각 지원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애초 부시 행정부가 2008 회계연도에 그루지야에 지원하기로 한 예산은 6400만달러였다.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은 그루지야군의 훈련 및 군수품 조달에 쓰였다. 라이스 장관은 “새로 지원하는 자금은 일절 군사적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애써 강조했지만, 러시아의 반발을 무마하진 못했다. 영국 은 9월4일 이안드레이 네스테렌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미국이 그루지야군의 무장을 강화하는 것은 이 지역의 안정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외교정책은 지난 8년처럼부시 행정부의 지난 8년 외교정책은 네오콘 진영이 주도해왔다. 진군의 북소리를 울리며 이라크로 내달렸던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몰락의 서막을 맞아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하다. 이란 위협론을 끊임없이 들먹이며, 러시아와의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매케인 후보는 그들에게 둘러쌓여 있다. 그가 백악관에 입성한다면, 미국의 대외정책은 지난 8년과 매한가지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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