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참 좋아했다. 동네 가게 유리창을 매일같이 깨트리며 공을 찼는데, 전두환 통치하의 1980년대는 축구를 구경하는 것도 편안하지 않았다. 프로리그가 출범했지만 나는 내 나름의 판단이 가리킨 이정표를 따라 서울 동대문운동장과 정반대에 있는 1호선 저 끄트머리의 항구도시 쪽으로 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모든 것이 시들해질 무렵 동대문운동장에 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들어간 운동장은, 고향 같았다. 비가 오는 날에는 라면박스를 뒤집어쓰고 관전했고, 박종환 감독의 천안 일화(현 성남 일화)가 패했을 때는 아저씨 팬들과 함께 ‘박종환’을 연호하며 운동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때는 그런 풍경이 다반사였다.
사무총장 사퇴가 시원해 보이겠지만
또 누가 있었던가. 김주성이 있었다. 중앙고 출신의 김주성은 3학년 때 고교상비군에 선발돼 교육부의 방침에 따라 대학 입학 자격을 얻어 조선대로 진학했다. 또래 선수로 김종부, 신연호, 김판근 등이 1983년 멕시코 4강 신화의 스타들이었다. 조선대 시절, 무명의 김주성은 영하의 날씨에도 손에 동상을 입을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다. 그 결과 역대 최초의 1억원 계약금으로 대우에 들어갔고 최연소로 대표팀에도 선발돼 월드컵을 세 차례나 뛰었다. 전성기 때는 ‘아시아 최고 선수상’을 3년 연속 받았다.
잠시 독일 보훔으로 떠났다가 1994년 부산대우(현 부산아이파크)로 복귀한 김주성은 이듬해부터 스위퍼를 맡아 1997년에는 K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그해 MVP까지 수상했다. 바로 그 경기들을 나는, 기이하게도 한가로워진 1990년대의 경기장에서 보았던 것이다. 우상이 내 앞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김주성은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 대신 국제스포츠 행정가의 길로 혼자 걸어갔다. 경성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으며, 국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국제축구행정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그 뒤 김주성은 축구협회의 국제부장을 지내며 우리 축구문화의 후진성을 조금이나마 극복해내는 데 일조했다. 2006년 국제부장 취임 100일에 맞춰 가진 인터뷰에서 김주성은 “인생에서 축구는 한 부분이지 전부는 아니다. 지식을 등한시하지 말고 학교 생활도 충실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벌써 몇몇 독자들의 쓴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야생마 김주성’ ‘삼손 김주성’을 모를 사람이 누가 있소. 하나 작금의 사태에서 김주성은 왕년의 스타가 아니라 대한축구협회 사무총장 아니오. 굴욕적인 문서를 일본축구협회에 보낸 실무 책임자라, 어떤 궤변으로도 비판의 덫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딴은 그렇다. 나는 지금 김주성 총장이 아무 책임도 없다는, 위에서 다 시킨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책임이 있다. 최근 불거진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에 대한 매끄럽지 못한 사후 처리 과정에도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김 총장 스스로, 원칙과 대의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최고 수뇌부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이행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 사무총장직을 사퇴한다? 시원해 보인다. 아마 그런 수순을 밟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란 말인가.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2000년 아시안컵 대회 때 허정무 감독을 경질하며 자신도 책임이 없지 않다며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매일반’이라는 명언을 남겼으나, 12년이 넘도록 전무에서 부회장을 거쳐 회장까지 승진하며 군림하고 있다. 그사이 수많은 감독들이 경질됐고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있었으며, 최근에는 공금 횡령 및 이를 덮으려는 억대의 비리 사건도 있었다. 그 지저분한 사건을 수습하려고 김주성 총장이 지난 1월 취임했다. 그런데 이제 박종우 사태와 관련해 또 사무총장만 갈아치우면 그만인가.
조중현 회장이 책임지는 일 없이 김 총장의 사퇴나 징계로 일단락된다면 이는 한국 축구 행정에 치명타가 될 것이다. 실무 책임자의 목을 자를지언정 최고 책임자의 상투는 건드리지 못하는 이런 꼼수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면 정몽준 명예회장의 ‘상왕 체제’도 끝내 비극으로 종막을 고하게 될 것이다.
한국 축구의 유일무이한 자산
축구계를 돌아보라. 지금 대한축구협회 안팎의 30∼50대 중에서 이제 막 석사를 마친 신예나 노익장 운운하는 원로 말고, 책임지고 일할 만한 나이에 있는 축구인들 중에서, 그것도 스타 플레이어 출신 중에서, 국제적 네트워크와 일정한 행정 능력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안타깝게도 김주성이 유일무이하다. 그와 비슷한 길을 걸으려 했던 홍명보 감독은 행정가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 2005년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김주성 총장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일정하게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완전히 축구계에서 떠나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훗날 반드시 귀하게 쓰일 인재다. 프란츠 베켄바워나 미셸 플라티니처럼 큰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김주성 개인을 위한 충언이 아니다. 축구계 안팎에서 선수 경력과 행정 능력과 국제 경험을 가진 인재로는 유일무이하다. 제발, 당장 떠나야 할 사람들이 떠나야 한다. 자기 보신을 위해 후배들 목을 자르거나 그 앞길을 막는 일을 당장 그만두고, 제발 당장 그만둬라. 무슨 청명과 한식이 이다지도 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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