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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별명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니

‘농구 대통령’에서 ‘입천수’까지 운동선수들에게 ‘제 2의 이름’과도 같은 별명의 희로애락
등록 2009-06-17 17:53 수정 2020-05-03 04:25

“기자님! 뭐 예쁜 별명 좀 없을까요?”
얼마 전 잘 알고 지내는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 진미정 선수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대뜸 별명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가 별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별명은 ‘진미포’. 슛이 좋다고 해서 이름과 합성해 붙여진 별명이다. 그런데 무슨 쥐포나 대구포 같은 느낌 때문에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험한 별명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니

험한 별명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니

운동선수에게는 유난히 별명이 많이 붙는다. 유형도 가지각색이다. 가장 행복한 별명은 멋진 플레이나 자신의 경기 스타일과 관련된 별명이다. 예를 들어 ‘왼발의 달인’ 하석주, ‘제구력의 마술사’ 서재응,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 ‘탱크’ 최경주, ‘전자 슈터’ 김현준, ‘진공청소기’ 김남일, ‘신형 엔진’ 박지성, ‘바람의 아들’ 이종범, ‘총알 탄 사나이’ 신기성 같은 경우다. 이보다 더 영광스런 별명도 있다. 주로 ‘천재’나 ‘황제’ ‘국보’ ‘여왕’ 같은 단어가 붙는다.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 ‘왼손 천재’ 라파엘 나달, ‘국보급 센터’ 서장훈, ‘피겨 여왕’ 김연아 등이 그런 경우다.

스타일·외모·동물·실수 등이 ‘별명의 원천’

유일하게 ‘대통령’도 있다. ‘농구 대통령’ 허재다. 그도 처음엔 ‘농구 신동’이나 ‘농구 천재’쯤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중앙대 4학년 때인 1987년 10월,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혼자 75점을 쓸어담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반전 팀이 기록한 54점을 모두 혼자 넣은 일이다. 게다가 일방적인 경기가 아니라 99-97의 극적인 역전승이었다. 이즈음부터 그에게 ‘농구 대통령’이라는 극찬형 별명이 붙었다.

수려한 외모에서 비롯된 별명도 선수들에겐 영광이다. ‘테리우스’ 안정환, ‘황태자’ 우지원, ‘꽃미남’ 백지훈 등이 대표적이다. 여자 선수들에겐 ‘테니스 요정’ 마리아 샤라포바, ‘미녀새’ 옐레나 이신바예바처럼 주로 ‘미녀‘, ‘요정’ 같은 수식어가 붙는다. 한 나라 이름이 통째로 별명으로 붙는 경우도 있다. 이대호는 신인 시절 피부색은 동양인인데 외국 선수처럼 힘이 세다고 해서 한때 ‘대만 용병’으로 불렸다. 박재홍 역시 쿠바 사람과 외모도 비슷하고 야구도 잘한다고 해서 ‘리틀 쿠바’라는 별명이 붙었다.

동물에 비유하는 별명도 많다. 우선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나는 작은 새’ 조혜정, ‘여시’(여우) 김재박 등이 있다. 80년대엔 ‘오리 궁둥이’ 김성한, ‘코트의 여우’ 유재학, ‘까치’ 김정수 등이 있고, 90년대엔 ‘적토마’ 고정운, ‘황새’ 황선홍, ‘야생마’ 이상훈, ‘가물치’ 김현석, ‘캥거루’ 조성원, ‘사마귀’ 김영만 등이 있다. 2000년대 들어선 ‘매직 히포’ 현주엽이 대표적인 동물형 별명이다.

그런데 별명이라고 다 좋게만 불리는 것은 아니다. 축구선수 이천수는 한때 데이비드 베컴처럼 프리킥을 잘 쏘지만 말이 많다고 해서 ‘혀컴’ ‘입천수’로 불렸다. 과거 유상철의 별명은 유비였다. 그런데 에 나오는 유비가 아니라 ‘흐를 유’에 ‘날 비’ 자를 써서 중거리 슛이 너무 높이 날아 번번이 골문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은퇴한 프로야구 스타 마해영은 강타자지만 찬스에 약하다고 해서 ‘공갈포’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었다. 여자프로농구 우리은행에서 뛰었던 외국 선수 타미카 캐칭은 별명이 ‘우승 청부사’였는데 ‘청부사’라는 단어 때문에 본인은 이 별명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은퇴한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찰스 바클리는 대식가로 유명했는데 ‘빵트럭’ ‘피자타워’ ‘인간 냉장고’ 등의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다.

선수는 딱 두 부류, 별명 있거나 없거나

두 선수가 똑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한 별명 두 선수’도 있다. 마치 길 가다가 자기랑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달갑지 않은 일이다. 이승엽과 이동국의 별명은 똑같이 ‘라이언 킹’이다. 야구의 김원형과 농구의 김동우도 ‘어린 왕자’라는 같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90년대 축구스타 김주성과 배구스타 이상열은 긴 머리 때문에 ‘삼손’이라는 같은 별명이 붙었다.

선수들의 별명은 대개 스포츠 기자들의 머리에서 나온다. 기사를 쓰다가 ‘번쩍’하고 떠오르는 단어가 별명이 되기도 한다. 프로농구의 ‘명장’ 신선우 감독의 경우 경기를 읽는 수가 신선처럼 능하다고 해서 한 스포츠 기자가 ‘신산’(神算)이라는 그럴싸한 별명을 붙였다. 그의 이름과 경기 운영 스타일을 절묘하고 압축적으로 만든 최고의 별명이다. 여자프로농구 신한은행 임달식 감독은 최근 몇몇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미스터 9할’이라는 별명이 지어졌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에서 37승 3패, 승률 92.5%의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덕분에 명예로운 별명이 붙은 것이다. 여자프로농구 국민은행 3점 슈터 김나연 선수 역시 한 기자가 ‘에인절 슈터’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평소 천사처럼 마음이 고운데다 선천적으로 희귀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에게 거금 500만원을 쾌척해 지어진 별명이다.

운동선수에게 별명은 제2의 이름이나 다름없다. 별명이 없는 선수는 불행하다. 한 스포츠 구단 관계자는 “운동선수는 두 부류가 있다. 별명이 있는 선수와 없는 선수, 딱 그렇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다. 듣기 싫건 좋건 별명이 있는 선수는 그래서 행복하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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