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불균등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할 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권력 불균등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점이죠. 잘못 다루면 착취와 차별, 편견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권력을 잘 다룰 수만 있다면 그 결과는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이해하고 협상하고 전망을 공유하고 열정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해 12월 풀뿌리정치 실험실 ‘와글’(WAGL·We All Govern Lab)의 초대로 한국에 온 ‘루미오’(Loomio·온라인 기반의 협력적 의사결정 프로그램)의 창립자 벤 나이트의 말입니다. 대학원에서 진화심리학을 공부한 그는, 인간이 가지는 선의와 협력의 본성에 주목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탐욕스러운 존재다’라든가 ‘시민들은 너나없이 자기 이익만 밝힌다’와 같은 시각에 그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인류의 진화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루미오를 통해 “인간이 권력을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 자신들을 잘 조율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소통과 합의를 통해서 극대화되는 자발적 협력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왔는지 설명할 때 그는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그는 투사가 아니라 몽상가(Visionary)입니다.
벤 나이트와 함께 와글이 초대한 해외 연사들은 모두 이런 몽상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 ‘Visionary’라는 단어는 두 가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실재하지 않는 환상을 보는 몽상가’ 혹은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선지자’. 소수의 직업정치인이나 전문가, 관료가 독점하는 정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조직되지 않은 다수 군중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의견을 내며 시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때, 더욱 지혜롭고 현실적인 대안이 나온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이들의 주장이 ‘헛된 망상과 환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최근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정치 혁신의 바람은 이들 몽상가의 주장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온라인정당으로 원내 2당이 된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스페인의 뿌리 깊은 양당 체제를 깨고 제3당이 된 ‘포데모스’, 다양한 시민정치 세력의 연합정당으로 지방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둔 ‘바르셀로나 엔 코뮤’와 ‘아호라 마드리드’, 핀란드의 시민입법을 가능케 한 ‘오픈미니스트리’, 에스토니아의 선거제도 혁신을 가능케 한 ‘민회’ 운동 등은 모두, 시민세력이 온라인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결정을 하며 정치적으로 세력화될 때 얼마나 큰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디지털 기반의 풀뿌리정치 구현’을 목표로 설립된 와글은 ‘99% 민주주의를 위하여’란 주제로, 세계 각지에서 시민 주도의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온라인 전략가, 시민참여 전문가, 연구자들을 초대해서 지난해 12월2일과 7일 두 차례의 공개강연회를 열고, 국내 청년활동가들과 함께하는 2박3일간의 난상토론 캠프도 열었습니다. 공개강연을 마치고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 청중과의 공개적인 질의응답까지 열띤 논의를 이어갔지만, 여전히 더 많은 분들과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지면을 빌려 와글이 지난해 말 이 몽상가들과 나눈 인터뷰의 요지를 공유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와글이 초대한 해외 연사들을 통칭해서 무어라 불러야 할지 사실 마땅한 용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액티비스트’(Activist)로 소개하고 있어서 한국어로 직역하면 ‘운동가, 활동가’ 같은 것이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운동가나 활동가라고 하면 보통 시민단체나 사회운동단체 같은 곳에 소속되어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될 테니까요. 한국의 사회운동가들과 달리, 이들은 훨씬 자유분방합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느슨한 연대관계를 맺고 협업적으로 활동하지만, 특정한 조직의 강령이나 목표에 종속되기보다는 프로젝트별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협력자들을 규합합니다.
스페인의 싱크탱크 ‘라보데모’(Labodemo)의 설립자 야고 베르메호 아바티는 신생 정당 포데모스에 정보기술(IT) 전략을 제공했지만, 포데모스에 소속돼 있지 않습니다. 그는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당의 산하기관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참여 전략을 전세계에 확산시키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깁니다.
대만의 프로그램 개발자 치아량카오는 “경제문제는 복잡하니 시민들은 알 필요가 없다”는 정부의 광고방송에 분개해서, 각종 지표와 정부 데이터를 시민들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독립적인 온라인 플랫폼 ‘g0v’(거브제로)를 오픈했습니다. 천재적 프로그래머로 손꼽히는 그는, g0v에 쓰이는 프로그램의 소스를 모두 공개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하기 원하는 많은 개발자, 디자이너들이 자발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속속 합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단체나 조직구조를 가지지 않고 느슨한 커뮤니티 형태로 일을 분담하거나 협력합니다.
데이터 시각화를 통해서 사람들의 의견 분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앱/웹 서비스 ‘폴리스’(pol.is)를 개발한 미국의 콜린 메길은 원래 컴퓨터 전공자가 아닙니다. 대학에서 국제관계학과 정치학을 전공했고, 자급자족하는 농업에 관심이 많아 직접 유기농 농사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가 시민기술(Civic-tech)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캐나다에서 온 제임스 매키니는 정부 투명성과 시민 참여를 목표로 하는 비영리기관 ‘오픈노스’(Open North, www.opennorth.ca)의 창립자입니다. 전세계 개발자들과 협력해서 데이터 표준을 개발하고, 각국 정부의 데이터를 공유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유권자와 지역구 의원을 직접 연결해주는 레프리젠트(Represent API), 시민이 자치단체 전체 예산의 흐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새로운 제도 도입을 현실감 있게 주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산 편성 시뮬레이션 서비스(Citizen Budget) 등을 개발·운용하고 있습니다.
실용적·효율적 합의의 조건은
이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시민이 더 많은 정보와 데이터를 갖는 것이 시민의 정치적 능력을 배양한다고 믿습니다. 둘째, 적절한 도구와 의사결정 프로세스만 마련된다면 평범한 시민들은 소수 전문가나 관료, 직업정치인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판단과 합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앞으로 5회에 걸쳐 이들이 남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시민주권을 주장하는 이들의 ‘몽상’에 더 많은 분들이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
이진순 와글 대표 ① 스페인편 - 야고 아바티 인터뷰 보러가기 ▶'‘화장’만 고치는 정치는 이제 그만!'※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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