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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에는 김밥집만 있다

정치에서 배제된 시민에게 정치권력을 돌려주기 위한 ‘정치 스타트업’ 와글의 몽상가들
등록 2016-04-21 16:14 수정 2020-05-03 04:28
기획연재


와글이  만난  '몽상가들'


① 스페인 시민참여 싱크탱크 ‘라보데모’ 설립자 - 야고 아바티
② 데이터 시각화 의사소통 도구 ‘폴리스’ 설립자 - 콜린 맥길
③ 캐나다 ‘오픈노스’ 설립자 - 제임스 매키니
④ 대만 ‘거브제로’ 설립자 - 치아량카오
⑤ 한국 정치 스타트업 ‘와글’ 멤버 - 이진순·서정규·김정현·천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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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3일 제20대 총선이 진행되던 날, 정치에서 배제된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정치를 기획하는 ‘정치 스타트업’ 와글을 만났다. 류우종 기자

4월13일 제20대 총선이 진행되던 날, 정치에서 배제된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정치를 기획하는 ‘정치 스타트업’ 와글을 만났다. 류우종 기자

“나의 미래를 규정할 정치적 상상력은 오후 6시가 지나면 당분간 작동을 멈춘다.” 제20대 총선이 있었던 4월13일 1면 기사의 한 문장이다. 이날 오후 4시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 ‘코워킹스페이스 카우앤독’에서 열린 와글 멤버들과의 대화에서 이 문장이 도마 위에 올랐다.

“유권자는 할 수 있는 게 투표밖에 없다는 생각이 기정사실화돼 있다. 이 프레임이 사회 전반에 걸쳐 너무 강하다.”(김정현)
“이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정치를 4년에 두세 번,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하는 거구만요.”(이진순)
“루소가 말했죠. 선거는 4~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라고. 지금 선거제도하에서 어쩔 수 없다고 볼 수도 있죠.”(서정규)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해 모이다

와글은 ‘정치 스타트업’이다. 쏘카(카셰어링 업체), 위즈돔(지식 공유 플랫폼) 등 세상에 없던 방식으로 세상에 없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이를 통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스타트업’의 역할을 정치 영역에서 하는 곳이다.

그들이 하려는 것은 시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일이다. 투표하는 순간에만 ‘주인 대접’ 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시민이 권력을 누리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기획하고 있다.

지난해 세계 곳곳에서 같은 시도를 하는 액티비스트들을 한국에 모아 공개포럼과 캠프를 열었고, 투표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앱) ‘핑코리아’를 선보였고, 관련한 다른 플랫폼들도 개발 중이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플랫폼을 만드는 개발자들’을 비롯한 여러 자생적 시민 모임들과 협업하고 청소년 정치 참여 프로젝트도 기획하고 있다.

와글이 선보인 투표 가이드 앱 ‘핑코리아’ 서비스 화면(위쪽). 4월 중순 오픈할 와글의 새 홈페이지. 위쪽부터 핑코리아 사이트 갈무리, 와글 홈페이지 갈무리

와글이 선보인 투표 가이드 앱 ‘핑코리아’ 서비스 화면(위쪽). 4월 중순 오픈할 와글의 새 홈페이지. 위쪽부터 핑코리아 사이트 갈무리, 와글 홈페이지 갈무리

은 와글과 함께 ‘와글이 만난 몽상가들’을 연재했다. 세계 곳곳에서 와글이 꿈꾸는 정치가 시도되고 있다. 스페인에는 와글처럼 시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여러 플랫폼을 연구하는 싱크탱크(라보데모)가 있다(1회). 미국의 콜린 맥길은 온라인에서 흩어지고 마는 목소리들을 계량화해 효율적 의사소통과 생산적 의사결정을 돕는 앱(폴리스)을 개발했다(2회). 대만과 캐나다에서는 공공데이터를 알기 쉬운 방식으로 공개(오픈노스, 거브제로)해 일상에서 모두가 공공정보를 공유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일상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었다(3·4회).

와글은 한국 정치를 앞에 두고 어떤 몽상을 펼치고 있을까. ‘와글이 만난 몽상가들’ 마지막 회에선 와글을 만났다. 미국에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 ‘재미없어’ 그만두고 한국에 와서 ‘정치 스타트업’에 시동을 건 이진순 와글 대표, 와글의 ‘거의 모든 문제 담당’ 김정현 프로젝트 매니저, ‘투표 가이드 앱’을 기획·개발한 서정규 프로젝트 매니저,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정치 문법을 바꾸는 일을 하려고 와글에 합류한 천영환 시니어 매니저로부터 그들의 ‘몽상’과 현실정치에 대한 ‘지적질’을 들었다.

지난해 와글은 온라인 의사소통 플랫폼 ‘루미오’ 창업자를 비롯한 세계의 혁신가들을 초청하고 한국의 청년, 액티비스트 등이 만나는 캠프를 마련했다. 와글 멤버들도 여기에 참여했고, 그 내용을 에 소개했다. 와글 멤버들이 그들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나.

김정현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만난 친구들 대부분 악기를 한두 개도 아니고 6~7개씩 다루더라. 대부분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을 병행했다. 그 창조적 에너지를 정치를 바꾸는 데 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정치야말로 창조적이고 예술성이 발휘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 이진순   우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크리에이티브 액티비즘’이라고 말했다. 예술적 활동을 즐기고 향유해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게 그들의 지론이었다.

천영환  루미오 세션에 참가했는데 그들은 일터에서도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었다. ‘피어투피어’(peer-to-peer) 방식으로 위계가 없고 서로가 서로를 관리해준다. 지방자치단체라는 관료제 조직에서 일했던 나로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서정규   폴리스 창업자 콜린 맥길은 나와 같은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의 준말로, 인문계열 졸업생들의 취업난에서 비롯됐다)이다. 심지어 전공도 국제관계학으로 같다. 그런데 맥길은 코딩을 배우고,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폴리스를 기획하고 개발자와 협업해 만들었다.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봤다. 그들과 나 사이에 불가능한 벽이 있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해주고 실행에 옮기게 해줬다.

와글에서 ‘리서치 펠로우’로 해외 사례 발굴 작업 등을 했던 ‘문송’ 서정규씨는 지난해 12월 열렸던 ‘몽상가들’과의 캠프 이후 직접 ‘핑코리아’라는 정치 앱 프로젝트팀에서 ‘온라인 투표 가이드 서비스’를 만들었다. 제19대 국회에서 의원들이 했던 표결 성향과 법안에 대한 이용자의 의견을 매칭해 ‘도플갱어 국회의원’을 찾을 수 있는 서비스를 먼저 내놓았고, 이어 20개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정당들의 공약을 매칭해서 ‘나와 어울리는 정당 찾기’ 서비스도 발표했다. 3월22일 서비스 오픈 뒤 4월13일까지 20만5천 명이 서비스를 이용했다.

온라인 투표 가이드 서비스 개발 제20대 총선 과정에서 보여준 정당들의 모습은 어떻게 평가하나.

서정규   핑코리아 서비스를 만들면서 느낀 것은 한국에선 정책선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원내 주요 세 정당을 보면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사이에 공약 차이가 없다. 정당을 구분짓는 키워드는 당수가 누구냐, 당수의 전직이 뭐냐 같은 것들이다. 지역구 국회의원에 출마한 의원들이 나눠주는 명함에도 ‘어떤 정책을 펴겠다’는 내용은 없다. 내가 누구랑 같이 일했고, 누구를 보좌했고, 어디서 일했다라는 이력이 전부다.

이진순   핑코리아가 문항을 설계한 뒤 각 정당에 해당 정책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답변을 거부했다. 테러방지법이나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 등 20개 질문 가운데 어떤 질문에는 ‘대답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서 안 한 거다. 이 작업은 언론사인 와 함께 했다. 선거를 앞두고 언론사가 물어도 (한국의 정당은) 제대로 답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일반 유권자가 궁금해할 때는 제대로 답변을 들을 수 있을까. 선거 때 유권자는 구경꾼일 뿐이다. 무대에는 언제나 정치인이 서 있을 뿐이다.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 천영환  나는 이번에 관외 투표를 했다. 집이 대전이라 부재자투표를 했다. 내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들을 면대면으로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보니 온라인상에서 지역구 후보들의 공약을 찾아보려 했다. 하지만 정당 홈페이지는 물론 후보자 홈페이지에서도 공약을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1980년대에 태어난 나 같은 디지털 네이티브 유권자에게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찾아가 어렵게 공약집을 찾아야 한다. 결국 유권자들이 직접 나섰다. ‘우리동네 정치인’이라거나 ‘정치실로그’ 같은 여러 가지 플랫폼은 다 시민이 만든 거다. 정치인이나 정당은 정책이나 공약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자기 역할을 방임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 서정규    문제는 그렇게 살펴본 공약들도 다 똑같다보니, 배고파서 뭐 먹기는 하는데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어서 기분 나쁜 느낌이다. 김밥천국 옆에 김밥나라 있고, 그 옆에 김밥24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김밥 말고 파스타도 먹고 싶은데 다들 김밥에 단무지를 하나 넣었다, 두 개 넣었다, 앞으로는 멸치도 넣어보겠다 하는 식이다.

내가 사는 지역구를 예로 들면 지하철을 어디까지 연결하겠다, 지역에 보호관찰소를 유치하겠다·막아내겠다, 특정 기업을 유치하겠다 같은 개발 공약만 있다. 정당 불문하고 다 중앙의 돈을 많이 끌어와서 지역을 부흥시키겠다는, 중세 토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공약 일색이다. 한국이 연방제 국가도 아닌데, 선거 때만 되면 253개(지역구 수)의 연방제 국가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이진순   ‘유권자가 아닌 것 같다. ‘반권자’ 정도 될까? 권력이 나한테 있었단 말이야?’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정치 지형을 보면 나를 대변하는 정당이 도대체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50대 학부형이고 주부이고 직장생활을 하는데 어느 정당도 이런 나의 정체성에 입각한 요구 사항을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고 있다. 이걸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당도 없다.

<i>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와글의 ‘몽상’으로 이어졌다. </i>천편일률 공약에 ‘정책선거’ 불가능 이런 문제적 정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진순   적어도 총선에선 지역에 국한된 공약이나 발언은 못하게 하면 안 되나? 지방자치단체 선거도 아니고 대한민국 국회잖아. 왜 ‘대한민국’ 공약은 없고 자기네 지역 공약이 반이 넘는가. 그리고 다 성장시킨다는 말뿐이고.

서정규   영국에 있을때 의원들 선거 공약집을 보면 이라크 전쟁, 시리아 문제 등 국제적 이슈에 대한 입장까지 다 담겨 있다. 후보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출마한 정치인의 대북정책, 노동정책, 동성애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확인하기 어렵다. 말해서 불리한 것은 아예 말하지 않고 나중에 자신의 말이나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 심지어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거짓말을 하니까.

류우종 기자

류우종 기자

◀ 김정현   공약으로 뻥 못 치게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뻥정치 가라’.

이진순   병역기록, 전과기록을 선관위 등록정부에 필수 기재하는 것처럼 정치인이 재선에 나오는 경우 ‘공약 이행률과 그 내역’도 필수 기재 항목으로 의무화하면 어떨까. 사실 공약 지키는 일이 제일 중요한데. 그러면 뻥 좀 덜 치겠지.

김정현   일단 공약집부터 보관해놓는 작업을 해야겠다.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4년 전 공약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천영환  이탈리아의 원내 2당인 ‘오성운동’은 1년 내내 당 홈페이지에 공약을 걸어놓고 진행 상황이 어떤지를 체크한다. 오성운동은 물론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장을 당선시킨 정치연합체 ‘바르셀로나 엔 코뮨’ 등은 애초에 선거 공약을 당원들의 투표를 통해서 정했기 때문에 공약 자체에 무게가 실려 있다.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사임시킬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김정현   우리도 공약 안 지키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러면 함부로 공약하진 않겠지.

이진순   벌금은 너무 약하다. 의원직을 관두는 게 맞다.

공약 이행률 필수 기재로 ‘뻥정치 그만’? <i> 이야기를 진행하던 중 오후 6시가 됐다.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예상 밖의 결과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민심을 제대로 듣지 않은 정부와 여당을 ‘심판’하는 듯한 결과가 보였다. 그러나 와글은 총선 결과에 대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i>

이진순   유권자의 심판이 끝나지 않았다. 소선거구제하에서 내가 던진 한 표도 사실상 소신투표가 아니라 전략투표였다. 내가 투표하고 싶던 약체 후보가 있었는데, 정말 싫은 후보를 견제하기 위해 전략투표를 했다. 이건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뽀뽀한 기분이다. 나뿐 아니라 모든 국민이 전략투표를 해야 한다는 다차원 함수를 돌려가며 투표한 것임을 기성 정당이 알아야 한다. 좋아서 뽑아준 게 아니다.

서정규   권력의 과밀 집중, 제1당의 의회 독점과 질주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최악은 면했다고 본다. 이번 선거 결과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의 기억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더 큰 숙제다. 앞으로 2년 동안 야당들이 의정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대선에서도 바뀌는 게 없을 것이다. 정당들이 제대로 ‘정책 의정’을 해야 한다.

천영환  그렇지만 감정적 동력은 생긴다. 뭔가 해볼 수 있지 않나. 정답은 결국 시민에게 권력을 주는 것에 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발판 삼아 우리가 무언가를 좀더 신나게 해볼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 것 같아서 좋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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