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인공을 뽑을 때와 영화 주인공을 뽑을 때가 다르다. 영화 주인공은 배우와 주인공의 성격이 꼭 일치할 필요가 없다. 2시간짜리 한 편 찍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주인공은 배우와 주인공의 성격이 일치해야 한다. 오래 찍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스타일에 맞는 정치를 해야 하고, 하고 싶다. 대선 때는 내 스타일의 정치를 하지 못했다. 이번엔 드라마 주인공 정치를 해보고 싶다.”
새로운 정치 플랫폼, 안철수 신당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는 지난 설 연휴 미국에서 캠프에 참여했던 한 핵심 인사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의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 출마 소식은 ‘드라마 정치’의 예고편인 듯하다. ‘안철수 스타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좀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3월3일 일요일 오후 송호창 무소속 의원이 발표한 안 전 교수의 4월 재보선 출마 소식은 전격적이라 할 만했다. 야권을 떠돌던 ‘안철수발 불확실성’은 해소됐다. 좌고우면, 우유부단 등 대선 때 늘 따라붙던 부정적 평가도 상쇄됐다. 이 인사는 “대선 당시 새 정치를 얘기하며 권력의지 부족에 대한 지적이 많았는데, 이 부분을 극복한 것 같더라. 권력의지가 강고해졌다”고 전했다. 안 전 교수는 국회 입성을 시작으로 정치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해나가겠다는 생각이라고 한다. 송 의원은 설 연휴 직후 미국에서 안 전 교수와 함께 찍은 나무 사진을 공개하며 “깊이 뿌리내린 나무는 언덕 위 강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안 전 교수와 의견을 나눠온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는 큰 틀의 정치권 개편을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대선 때부터 51 대 49의 싸움이 아니라, 6 대 4 정도의 비율로 ‘특권층이 소수가 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정치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안 전 교수는 대선 때 자기 자신을 새로운 정치 플랫폼이라고 여겼다. 중도뿐 아니라 온건보수까지 지지 기반으로 삼는 자신으로 야권 단일화가 될 경우 보수가 우세인 지형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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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에서 석 달 가까이 체류하며 안철수 개인이 아닌 정치세력, 즉 ‘안철수 신당’을 통해 새로운 정치 플랫폼을 만들려는 구상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정치 환경은 그가 예상보다 빨리 ‘행동’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안 전 교수는 측근들에게 “박근혜 후보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웠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 준비가 안 된 후보라고 하더니 내가 더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기남 전 비서실 부실장은 “장관도 제대로 임명 못하는 등 박근혜 정부가 국정 운영의 난맥상을 보이고 있고, 127석을 가진 제1야당 민주당은 계파 투쟁에 매몰돼 위기감은커녕 존재감도 없다. 이런 한심한 정치 상황이 안 전 후보의 결단을 끌어냈다고 본다”(3월7일 YTN 라디오)고 말했다.
노무현과 다른 선택을 하는 이유안 전 교수는 4월 재보선으로 원내에 진입하는 게 일차 목표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스피커 파워’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르면 10월 재보선, 또는 내년 6월 지방선거에 ‘안철수 신당’으로 뛰어들어 주도권을 갖고 야권을 재편해나가며 ‘새누리당 소수’의 구조를 만들겠다는 게 다음 목표다. 안철수 캠프에 참여했던 정연정 배재대 교수는 “안 전 교수에게는 상당히 많은 숙젯거리가 있다. 자신의 정치활동을 재개해야 하고, 조직과 세력을 형성해야 하고, 신당 창당 문제와 야권의 대표(가 되는) 과제도 있다. 시기를 멀리 두고 준비해서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도 있지만, 단계별로 차근차근 한 가지씩 풀어가며 기반을 형성하는 방식도 있다. 두 가지 방법론을 놓고 고민하다가 단계별 방식을 택한 것 같고, 본인의 직접 출마가 첫 단추가 되는 것”(3월6일 CBS 라디오)이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안 전 교수 쪽은 ‘민주통합당은 경쟁 상대이고, 야권연대는 그다음 단계의 문제’라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야권의 대표’를 거쳐 최종 목표는 당연히 대선 후보, 대통령 순으로 이어질 터다.
그러나 안 전 교수가 출발지로 택한 ‘서울 노원병’이라는 특정 지역을 놓고 보면, 이런 구상이 순차적으로 이뤄질지는 매우 유동적이다. 야권에서 들끓고 있는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왜 하필 노원병이냐’와 ‘야권을 분열시키려 하느냐’다.
왜 하필 노원병이냐는 문제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가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실명 공개를 이유로 의원직을 잃은 지역구를 선택한 것에 대한 반감이다. 명분상으로나 정치 도의적으로 무리한 것이라는 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안 전 교수가 부산 영도구 재선거에 출마해 정면 승부를 하면 좋은데, ‘체급’에 맞지 않게 ‘쉬운 지역’을 골랐다는 주장이다. 노 공동대표는 “구태정치” “여기는 좀 안 왔으면 좋겠다” “여기는 안 전 교수가 아니더라도 야권 후보 단일화가 되면 승산이 있는 곳”이라는 말을 연일 쏟아냈다. 진보정의당은 3월8일 노 전 의원의 부인으로 노동운동·여성운동가 출신인 김지선씨를 전략공천하기로 했다.
부산 영도 출마론은 민주당에서 많이 나온다. 우원식 민주당 의원은 “안 전 교수 정도면 얼마든지 승부를 해볼 수 있다. 대권을 노리는 입장에서 국민들의 요청이 몰릴 수 있고 희망을 줄 수 있는데, 어려운 곳에 가서 싸워야 좀더 큰 인물이 되는 것 아닌가”(3월5일 PBC라디오)라고 말했다. 설사 낙선하더라도 야권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어려운 싸움을 배짱 있게 치렀다는 정치적 자산을 얻게 된다는 얘기다. 2000년 총선 때 서울 종로를 버리고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다가 떨어졌지만 오히려 정치적으로 부활했던 ‘노무현 효과’를 언급하는 이도 많다.
그렇다면 안 전 교수는 왜 노원병을 택했을까. 안 전 교수 쪽은 수도권이라는 상징성을 강조한다. 수도권 민심이 여론의 바로미터로 여겨진다는 이유에서다. 정연정 교수는 “안 전 교수에 대한 여론을 검증받는 ‘테스트베드’로서 수도권이 갖는 의미를 존중했다”고 말했다. 또 “안 전 교수는 대선에서 정치 개혁, 검찰 개혁, 재벌 개혁 등을 얘기했고, 노회찬 전 의원(의 의원직 상실)이 갖고 있는 의미, 자신이 주장했던 정치 개혁의 내용 등을 결합시킬 수 있는 선거구에 대한 본능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 영도에 출마할 경우 문재인 의원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진다는 우려도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당선 가능성에 대한 고려다. 노원병은 상대적으로 야권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다. 19대 총선 때 통합진보당 소속이던 노 전 의원이 야권 단일후보로 나서 57.2%라는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18대 총선 때는 홍정욱 한나라당 후보(43.1%)가 당선됐지만, 야권의 득표율(민주당·진보신당 합계 56.3%)이 훨씬 높았다. 부산 영도는 새누리당 텃밭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상대적으로 고전하는 지역으로 꼽힌다. 한진중공업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9대 총선 때 새누리당 후보가 43.8%를 얻어 당선됐지만,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민병렬 통합진보당 후보가 37.6%를 기록했다. 18대 때는 김형오 한나라당 후보(43.5%)가 무소속 후보(41.7%)를 간신히 이겼다. 이번 4월 재선거에서는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을 지낸 김무성 전 의원이 출마를 선언했고, 민병렬 통합진보당 최고위원이 다시 출사표를 냈다. 안 전 교수 쪽의 한 핵심 인사는 야권의 ‘안철수 영도 차출론’에 대해 “노무현 케이스와는 다르다. 노 전 대통령은 부산 동구에서 초선이 됐고, 3당 합당을 거부하면서부터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안 전 교수는 처음 정치를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당선 가능성을 봐야 한다. 이겨야 (국회에) 들어가서 플레이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소탐대실” vs ‘마이웨이’물론 야당 쪽의 주장에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진보정의당 처지에서는 억울한 판결을 받았고, 서울에 하나뿐인 의석의 재탈환이 시급하다. 그러나 지역구가 사유물이 아닌 이상, 노원병에 대한 ‘우선 권리’를 주장하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더 난감하고 다급한 건 민주당이다. 민주당은 3월7일 “원내 제1야당으로서 후보를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공식 견해를 내놓았지만, 내부적으로는 후보 공천에 대한 부담감이 커서 속을 끓이고 있다. 민주당은 안 전 교수가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 전에 민주당과 협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후보를 ‘자연스럽게’ 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속내다. 더 큰 고민은 재보선 이후다. 안 전 교수가 당선돼 신당 창당을 가속화할 경우 대선 패배 이후 지리멸렬한 행태를 보여온 당의 존립 기반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국회 입성이라는 눈앞의 과제에 매몰돼 야권 전체에 분열과 반목의 앙금을 남기는 소탐대실의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신기남 의원), “의도했든 안 했든 야권을 분열시키고 야권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다”(김동철 의원), “야권 분열의 씨앗이 되지 않도록 신중한 처리를 해주셨으면 한다”(박지원 의원) 등의 발언에는 이런 우려와 불안감이 깔려 있다.
하지만 안 전 교수 쪽은 출마 지역구를 옮길 가능성을 일축하는 한편, 야권 후보 단일화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송호창 의원은 3월5일 보도자료를 통해 “지금까지 야권은 대안과 비전이 아닌 반여 후보 단일화에 모든 것을 건 ‘반대의 연합’을 통해 유권자의 선택을 요구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정치도, 거대 여당을 뛰어넘는 대안세력의 성장도 가능하지 않다”고 밝혔다. 4월 재보선은 물론, 앞으로 10월 재보선이나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마이웨이’ 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안 전 교수 쪽은 그동안 야권이 ‘기계적 단일화’에 매달려 서로 경쟁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총선·대선에서 잇달아 패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이번 재보선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 2개월 만에 치러지는 ‘허니문 재보선’이기 때문에 야권이 무조건 하나로 합쳐서 이겨야 한다는 기존 단일화 논리에서 벗어나 “어떤 형태로든 존중하며 경쟁하는 체제를 시험해보는 계기”로 삼자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정치혁신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도 “야권연대가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능사인지는 모르겠다. 이번에 지더라도 대선까지는 5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야당들도 경쟁 속에서 긴장하며 혁신하는 당이 살아남는 과정도 좀 필요할 것 같다”(3월6일 YTN 라디오)는 의견을 내놨다.
이런 주장이 나오는 건 현재 민주당이 너무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한상진 민주당 대선평가위원장은 “민주당은 심각한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작은 권력에 도취돼 정당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는 계파들의 치열하지만 지루하고 소모적인 다툼이 지속되고 있다. 5월4일 전당대회를 향해 이런 고질병이 다시 곪아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당 전체의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기 짝이 없다”며 연신 쓴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안 전 교수가 야권연대라는 틀 자체를 걷어차선 안 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김기식 민주당 의원은 “야권은 나눠져 있을 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상호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는 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거대 여권과 보수 세력에 대해 연대·연합해서 함께 공동의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3월7일 BBS 라디오)고 말했다.
그러나 당선 장담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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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전 교수는 노원병에 출마해 당선될 수 있을까? 안 전 교수가 공식 출마 선언 전후로 왜 하필 노원병이냐, 야권을 분열시키려 하느냐는 논란을 어떻게 해소 또는 돌파해나갈지가 그의 정치력을 가늠해보는 시험대다. 야권 후보가 ‘난립’할 경우 당선을 장담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평일 치러지는 보궐선거는 투표율이 40% 정도에 그친다는 점도 위험 요인이다. 새누리당은 중도와 온건보수 유권자들을 의식한 듯, 안 전 교수의 4월 재보선 출마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허준영 노원병 당협위원장뿐 아니라, 새누리당의 ‘청년대표’인 이준석 전 비상대책위원, 안대희 전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 등을 공천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교수의 ‘드라마 주인공 정치’가 장편 국민 드라마가 될지 조기 종영의 위기에 처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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