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영정 앞엔, 밥 대신 빵이 수북이 쌓여 있다. 지난 4월부터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선생이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대한문 옆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 분향소에 들러 외로운 영혼들에게 건넨 빵이다. 40여 년 전, 형님인 전태일 열사도 매일 빵을 샀다. 그는 차비를 아껴 산 빵을 배고픈 어린 여공들 손에 쥐어주었다. 그렇기에 밥이 아닌 빵이어야 했다. 값비싼 빵은 아니지만, 날마다 새로 구운 빵이다.
꼬박 230일, 대한문 옆 ‘함께 살자! 농성촌’에도 날마다 새로운 태양이 떴다. 최저기온이 영하 2℃였던 11월20일에도 그랬다. 전날 오후, 농성촌에서 41일째 단식농성을 이어가던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장이 결국 쓰러졌다. 12시간 뒤인 이날 새벽엔 한상균 전 지부장·문기주 정비지회장·복기성 비정규지회 수석부지회장 등 3명이 법정관리 및 정리해고에 대한 국정조사, 해고자 복직 등을 요구하며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차 공장 인근 송전탑에 올랐다. 높이 41m에 15만4천V 전류가 흐르는 곳이다. 평택 소식이 농성촌에 전해질 무렵, 지하철 1·2호선 시청역엔 출근길을 서두르는 직장인들이 모여들었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공사로 어수선했다. 전날부터 스케이트장 설치 공사가 시작됐다. 광장 한켠에선 몇 겹을 껴입은 인부들이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있었다. 서울광장에서 덕수궁으로 건너가는 8차선 도로 앞 횡단보도에 서자, 추위에 잔뜩 웅크린 비닐천막 3동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 일찍 농성촌을 찾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모임 ‘전쟁 없는 세상’ 여옥 활동가가 인도로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다.
분향소가 있는 대한문 바로 옆 천막에 발을 디디자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전 회의를 마친 김정욱(41) 쌍용차지부 대외협력부장이 분향소에서 쓰는 향로를 물티슈로 정성스레 닦고 있다. 따스한 볕이 비닐천막 안으로 파고들려 하자, 분향소로 통하는 쪽 비닐을 접어 올렸다. 차분히 농성촌 상황을 설명하던 그의 눈시울이 갑작스럽게 붉어졌다. “요 근래 한 번씩 마음이 울컥울컥해요. 지난해 정혜신 박사님께 심리 치유를 받았고 많이 울면서 회복됐는데…. 또 동지들이 목숨 거는 걸 지켜보니 우울합니다. 새벽에 전화가 오기만 해도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누군가 천막 안으로 식빵 봉지를 밀어넣었다. 자세히 보니, 손으로 만든 샌드위치였다. 거리 생활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포기하는 일이다. 도로를 쉼없이 내달리는 자동차들은 소음과 매연을 만든다. 천막 뒤편, 담벼락 사이의 작은 공간에는 빨래가 걸려 있다. 인근 서울시청 건물이나 경향신문사에 위치한 금속노조 샤워실 등에서 씻는 문제를 해결한다.
어르신들은 더러 ‘빨갱이’라 비난오전 9시가 넘어가자 경계가 없던 대한문 앞 광장과 농성촌 사이에 빨간 줄이 놓였다. 월요일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세 차례 열리는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시작되려는 신호다. 출근 인파 대신 관광객이 대한문 광장을 메웠다. 농성촌의 하루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울광장으로 향하는 횡단보도 바로 뒤편 3개의 탁자 위에는 모금함과 쌍용차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서명 용지가 놓였다. “당신의 서명이 쌍용차 노동자들을 공장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합니다.” 농성촌 사람들의 호소는 교대식 풍악 소리가 울릴 때마다 잦아들었다. 서명을 촉구하는 이들 중에는 주부 정지영(36)씨도 있다. 팟캐스트 의 김용민 PD가 서울 대학로에 있는 카페 ‘벙커1’에 세운 교회 신도라는 정씨는 다른 10여 명과 함께 지난여름부터 농성촌에 나와 서명운동 등을 돕고 있다. 쌍용차 사태에 대한 영문 전단지는 이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다.
이날 낮, 농성촌을 지키는 해고노동자·단체활동가·시민 등의 수는 10여 명. 그러나 단 몇 초라도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쌍용차 노동자, 제주 해군기지 백지화를 외치는 강정마을 주민, 송전탑 건설을 맨몸으로 막고 있는 경남 밀양의 어르신,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서울 용산 참사 유가족…. 저마다 절박한 화두를 놓고 국가와 힘겹게 싸우던 이들이 끝내 도심 한켠 대한문 옆으로 모인 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무심한 얼굴을 한 차가운 도시 사람들은 농성촌 주민들에게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다. 농성촌에 눈길이라도 던지는 이들은 행인의 절반가량이다. 시선 끝에는 미안함·안쓰러움·호기심 등이 교차한다. 어느 시민은 애써 농성장을 보지 않으려는 듯 큰 포물선을 그리며 돌아갔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동료와 함께 쌍용차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서명에 참여한 윤아무개(42)씨는 경기도 수원 직장에서 외근을 나왔다 했다. “뉴스를 통해 쌍용차 문제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어요. 약자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입니다.” 담배를 입에 문 30대 직장인은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단식에 함께 참여한 이들이 남긴 메시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쌍용차가 잘나가는 회사는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연봉이 높은 정규직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건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농성촌은 때때로 도심 안의 섬처럼 고립된다. 지난 10월4일 밤이 그랬다. 서울광장에선 가수 싸이의 무료 공연이 열렸다. 8만 명이 넘는 인파는 여느 때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농성촌까지 밀려들었다. 공연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농성촌은 관심 밖 세상이었다. 18년 동안 대한문 돌담길에서 나무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 팔고 있는 조규현(43)씨는 농성촌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털어놨다. 천막이 들어서면서부터 대한문 옆에서 점점 밀려나 벌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10살 때 불의의 사고로 오른 손목을 잃은 조씨는 팔순 노모와 단둘이 살 고 있다. 오른팔에 망치를 붕대로 둘둘 감아 고정시켜서 조각 작업 을 한다. 그가 보기에 농성촌 사람들은 부모 속 몰라주고 떼쓰는 자 식 같다. 그가 말하는 부모는 곧 국가다. “나 같은 사람도 살겠다고 죽어라 열심히 일했는데, 팔다리 멀쩡한 사람들이 어디서든 일을 못 하겄어요.”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어르 신들은 더러 농성촌 사람들을 향해 ‘빨갱이’라 비난한다. 조씨 역시 국가로부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군사정권 시절, 군용트럭이 일으 킨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다. 농성촌에도 국가유공자가 있다. 18년 전 쌍용차에 입사한 박정만(47) 조직부장은 군 복무 중에 일어난 간 첩 사건으로 총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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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 행복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덕수궁 인근에서 10년간 작은 슈퍼를 운영해온 60대 자영업자는 농성촌 사람들보다, 문제 해결을 나 몰라라 하는 정부나 정치인들이 원망스럽다. 간혹 시민들은 그의 가게에 들러 농성촌에 필요한 물건 이 뭐냐고 묻는다. “단식하던 지부장이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마음이 안 좋아요. 저 사람들 얼굴이 하루하루 더 초췌해져요. ‘어떡하느냐’ 고 물으니 ‘그냥 죽으면 되죠’라고 합디다. 정부가 얼른 해결책을 세우 든지, 하다못해 살아갈 길이라도 모색해 희생자가 더 나오지 않도록 해야죠.” 덕수궁 주위는 하루 종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콜롬비 아 국적의 라파엘 루이스(33)는 러시아·몽골·중국을 거쳐 한국을 여 행 중이다. 농성촌 사람들을 오래도록 지켜보던 그는 쌍용차 투쟁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물었다. 벌써 4년째라고 답하니, 믿을 수 없다 는 반응이다. 그는 “하루빨리 복직하기를 바란다”며 서명지에 이름을 남겼다. 수문장 교대식을 보러 온 러시아 남성 3명은 농성장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한국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자 일터로 향했던 직장인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나온다. 저녁 7시, 대한문 앞 광장에서는 농성촌에서 여는 문 화제가 시작됐다. 이날은 내년도 제주 해군기지 예산 전액 삭감을 촉 구하는 강정 집중집회가 열렸다. 강동균(55) 제주 강정마을 회장이 24시간 공사가 이어지는 현지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호소했다. 집회 가 진행되는 동안, 천막 앞에서는 박아무개(54)씨가 모금함에 돈을 넣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그가 농성촌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 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일부러 들렀다고 했다. “늘 미안해.” 오른 쪽 손을 가슴에 얹고 말을 이었다. 미안함을 토로하는 이는 그뿐만 이 아니었다. 방명록에는 이런 글들이 쓰여 있다. “저만 행복한 것 같 아 죄송합니다. 함께 행복하고 싶습니다.”(남양주 시민 김아무개) “아 픔을 외면하는 사회는 더 아프다.”(오아무개)
밤 9시. 문화제가 끝났다. 농성촌 사람들은 인근 식당에서 늦은 저 녁을 먹는다. 하루 일과가 마무리될 무렵,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 오기도 한다. 취객이나 노숙인들이다. 시비를 걸기도 하고, 자신의 신 세 한탄만 늘어놓기도 한다. 4월부터 농성촌에 나온 한국기독청년학 생연합회 신하나(29) 간사는 한국 사회에 얼마나 힘든 사람이 많은지 를 알게 됐단다. “남루한 행색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 역시 어디선 가 생계 곤란을 겪는 분들 아니겠어요. 자주 그런 분들을 보니까 짜 증 나기도 하지만 마음이 좋지 않아요.” 오전에 발을 디뎠던 쌍용차 천 막에선 작은 불빛이 새나왔다. 천장을 보니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전구 7개가 오밀조밀 붙어 있었다. 누가 자동차 공장 노동자 아니랄까 봐, 자동차 배터리를 활용해 만든 빛이다. 농성촌 사람들은 어느 한의 사가 보내왔다는 쌍화탕을 따뜻하게 데워 기자 손에 쥐어주었다.
성탄의 축복이 닿을 수 있을까
서울광장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8차선 앞 횡단보도에 섰다. 새로 지 은 서울시청·국가인권위원회·재능교육 을지사옥 등의 건물이 회색빛 병풍처럼 펼쳐졌다. 광장 안에는 어느새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우뚝 솟아 있다. 풍찬노숙을 하고 송전탑에 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대한 문 앞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시민들, 그리고 손목을 잃은 조규현 씨까지. 그 모든 사람에게 성탄의 축복이 닿을 수 있을까.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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